255화. 필유아사(必有我師) (2)
다급하게 목소리를 낸 소대섭은 당독대의 어깨를 눌렀다.
깜짝 놀란 당독대가 소대섭의 힘에 바닥에 엎드렸다.
소대섭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기에 그도 따라 움직였다.
동시에 머리 위로 파공성이 울렸다.
팡!
그 파공성은 점점 멀어지더니 멀리 있는 바위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굉음을 냈다.
쾅!
바위가 쪼개질 듯한 소리.
순간 당독대는 허리에 찬 병장기를 잡았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망격진(忘擊陣)을 펼쳐라!”
순간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는 당독대가 틀어쥔 것처럼 병기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잡은 것은 검이 아닌 우산이었다.
그것은 망격산(忘擊傘)이라 불리는 사천당가 특유의 병기였다.
망격산은 적의 공격을 잊게 만든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우산 모양의 병기였다.
등에 메고 다니면 사람들은 우산이라 생각할 정도로 평범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것을 펼치게 되면 성인 셋을 덮을 정도의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다.
암기에 능한 만큼, 대처하는 방법도 사천당가는 남달랐다.
당독대는 재빨리 망격산을 펼쳤다.
팍!
순간 사천당가의 무사들도 당독대처럼 재빨리 망격산을 펼치며 적의 암기에 대항했다.
팍. 팍.
덕분에 고요했던 산 중턱에는 소란이 일어났다.
사천당가가 망격산을 펼치며 방어진을 구축하자, 검은색 장막이 우산 모양으로 전방을 향했다.
망격산과 망격산이 겹쳐지자 검은 장막, 아니 철벽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누군가가 약속한 듯 가운데 피워 놨던 모닥불을 껐다.
당독대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소대섭을 바라봤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있던 소대섭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모닥불을 끈 것은 소대섭과 그 일행 같았다.
당독대는 이제 당기명이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당기명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망격진 안에는 당기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독대가 찾는 당기명은 이 위기의 순간에 어디에 있었을까?
당기명은 지금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당기명은 머리 위로 파공성이 울리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린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것은 암기가 바위에 부딪힌 후 알게 되었다.
암기의 정체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가공할 만한 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저기에 맞았다면?
아마도 몸이 허공에서 터질 수도 있었다.
누가 저런 암기를 날릴 수 있을까?
사천당가 출신인 당기명이 봤을 때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의 위력이었다.
이번 한 수의 대단한 점은 초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대는 저 암기에 내공도 싣지 않고 단순히 힘으로 날렸다.
힘으로 이렇게 무식하게 암기를 날릴 수 있는 인간이 무림에 몇이나 있을까?
상대는 상상도 못 할 고수라 판단이 되었다.
그런 고수가 자신의 등을 노렸다라?
상황을 머릿속에 그린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주변을 바라봤다.
적이 있는 위치라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었다.
그의 심장은 미칠 듯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쿵, 쿵.
두려움과 분노가 적절히 섞여 당기명의 가슴을 자극했다.
암기와 독에 있어서라면 천하제일인 사천당가에서, 확인도 안 된 암기 때문에 겁을 먹고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있다라?
이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결심한 당기명은 큰 나무 뒤에서 나와 어둠 속을 향해 검을 뻗었다.
물론 한 손에는 망격산을 쥐고 있었다.
언제든 방어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 상태에서 어둠 속을 향해 외쳤다.
“누군지 정체를 밝혀라!”
내공을 담은 목소리는 산 전체를 덮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상대는 묵묵부답.
그때였다.
당기명의 옆으로 암기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피슝!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암기가 계속 쏟아지기 시작했다.
당기명은 검으로 암기를 쳐 냈다.
팅.
하지만, 암기는 비처럼 쏟아졌다.
당기명이 쳐 내지 못한 암기는 그의 옆을 스쳤다.
그 암기는 뒤쪽에 있는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팅, 팅.
사천당가 무사들이 펼친 망격진이 암기를 튕겨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칠현금을 튕기는 소리처럼 가늘게 산자락에 울렸다.
가끔 조금 더 둔탁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탕, 탕.
둔탁한 소리가 들릴 때면 망격진이 살짝 흔들렸다.
사천당가의 망격진은 암기 일변도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았다.
그렇게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때였다.
망격진을 펼친 공간의 뒤쪽에서 함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와아!
타다닥, 타다닥.
제법 많은 인원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어우러진다.
그 소리에 당기명은 몸을 돌려 사천당가의 무사가 있는 쪽으로 합류하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암기는 쏟아졌다.
팅, 팅.
당기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암기를 쳐 내기에 바빴다.
망격진의 약점은 바로 후면이었다.
앞쪽에 펼쳐 놓은 망격산은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지만, 뒤쪽은 태풍에 흔들리는 썩은 고목과도 같았다.
그때였다.
사천당가의 뒤쪽에서 소대섭이 외쳤다.
“뒤쪽은 우리가 맡는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대주!”
조호가 칼을 세우며 외치자 장삼도 옆에 섰다.
하지만, 새로 합류한 원경과 그 무리는 난데없는 상황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때 소대섭이 외쳤다.
“지금이 영웅이 될 기회다! 다들 내 뒤를 따르라!”
“모두 대주를 따르자, 우리는…….”
조호가 함성을 질렀다.
“우리는 적혈맹호대다!”
장삼이 구호를 마무리 지었다.
쭈뼛대던 원경도 소대섭의 뒤를 따르며 박도를 세웠다.
사실 원경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
악비광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지금 그가 당황하는 이유는,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암기 세례가 태어나서 처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지금 한 무리의 적이 흉흉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경은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이 영웅이 되는 길이라면 사양하고 싶었다.
영웅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무공을 배워서 괄시받지 않고 살고 싶을 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박도를 잡은 원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선택한 길 중에 위험을 자초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최선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의 끝에는 항상 최악의 위험은 벗어난 결과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선택이 틀린 것 같았다.
사천당가 무사들이 막고 있는 무지막지한 암기와 반대쪽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영웅을 만들어 주겠다고 꼬드긴 한빈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객잔에서 한빈을 떠날걸.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뿐이었다.
그때였다.
원경의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
왠지 머릿수가 비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눈에 띄어야 할 한빈과 악비광이 없었다.
거기에 시녀도…….
하지만, 원경은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앞쪽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챙! 챙!
원경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 * *
병장기 소리가 산중을 깨우고 있을 때, 한빈은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빈이 있는 곳은 모든 싸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바위 위였다.
한빈은 적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몇 명만 데리고 이 바위로 자리를 옮겼다.
적혈맹호대와 사천당가의 무사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있는 바로 이 순간, 한빈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악비광은 손에 쥔 창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군이 밀리고 있는 상황.
당장 그들을 도와야 했지만, 한빈이 악비광의 발을 묶어 놓은 상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라는 지시였다.
드르륵, 드르륵.
악비광의 창이 바위와 부딪히며 울음을 토해 냈다.
“형님, 지금 무슨 짓입니까? 저들을 죽일 셈입니까? 이대로면 사천당가도 그렇고 적혈맹호대도 다 전멸입니다!”
“내가 언제 쟤들을 죽인대?”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자, 악비광이 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보고만 있습니까? 여기서 손 놓고 구경하는 게 말이 됩니까?”
“누가 손 놓고 구경한다고 그래. 여기 술병 쥐고 있잖아.”
한빈은 손에 든 술병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악비광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 형님.”
“너도 한잔해.”
“형님,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습니까?”
“내가 구경만 하는 걸로 보여?”
“그럼요?”
“소리 지르지 말고 자세히 봐.”
“뭘 말입니까?”
“지금 날아오는 암기부터 봐.”
“그 암기가 어쨌다고 그러…….”
악비광은 말끝을 흐렸다.
이제까지 날아오는 암기의 종류가 뭔지는 알아보지도 않으려던 악비광이었다.
악비광은 이제야 암기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묘한 소리가 악비광의 귀에 들어왔다.
슝.
팅!
이것은 일반 쇳소리가 아니었다. 사천당가 무사들이 튕겨 내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악비광이 다급하게 한빈을 바라봤다.
“저 암기가 무엇입니까? 혹시 마교인들입니까?”
“암기 물어봤더니 거기서 마교가 왜 나와?”
“꼭 천산 산맥에서 난다는 마철로 만든 무기의 소리 같아서 그럽니다.”
“비광아.”
“자꾸 부르시지 마시고 저들의 정체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악비광은 눈썹까지 살짝 떨며 재촉했다.
그때였다.
악비광의 옆에 하얀 신형이 나타났다.
스르륵.
덕분에 악비광은 놀라 뒷걸음쳐야 했다.
하얀 신형의 정체는 설화였다. 설화는 뭐가 문제냐는 듯 악비광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주워 왔어?”
“네, 공자님. 여기요.”
설화는 옷소매에서 뭔가를 털어 냈다.
또르륵.
설화가 털어 낸 것은 다름 아닌 밤이었다.
그것도 껍질이 다 까진 밤.
한빈은 그 밤을 잡아서는 엄지로 툭 하고 껍질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악비광이 말했다.
“형님, 이제는 안주까지…….”
“잠시만 비켜 봐!”
한빈이 손짓하자 악비광은 이를 악물고 옆으로 비켰다.
그곳에는 청화가 있었다.
청화가 한빈의 앞으로 오더니 소매 속에 있는 것을 또 털어 냈다.
또르륵.
이번에 떨어진 것은 도토리였다.
“청화도 수고했다.”
“뭘요. 이 정도는 언제든지 시켜 주세요, 공자님.”
청화는 설화의 옆에 앉아 찹쌀떡을 먹기 시작했다.
악비광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제는 형님이고 나발이고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눈을 빛냈다.
‘이놈의 집안은 어찌 다 이 모양이야!’
한빈을 원망했지만,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놈의 도토리가 아주 잘 익었네, 묵을 해 먹어도 맛깔나겠어.”
“형님, 저라도 가 보겠습니다.”
“그래 가려면 가. 그런데 암기는 확인하고 가야지.”
“암기라니요?”
“이제껏 보고 뭔 소리야?”
한빈은 도토리와 밤을 가리켰다.
도토리와 밤을 본 악비광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였다.
팅.
팅.
계속해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사천당가가 암기를 쳐 내는 소리였다.
악비광이 귀를 쫑긋하자, 한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리는 도토리. 조금 더 묵직한 것은 밤.”
이어서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탕, 탕.
악비광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뭐라고 했지?”
“흠, 그러니까. 백번을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고…….”
악비광이 말끝을 흐렸다.
적잖게 당황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데 그건 실력이 비슷할 때 이야기고. 지금 같은 경우는 뭐다?”
“…….”
“뭐, 묵사발 된다고들 하지.”
한빈은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