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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54화 (254/621)

254화. 필유아사(必有我師) (1)

한빈 앞에 선 조호는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침 닦아라, 조호야.”

물론 실제로 침이 흐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 보면 침을 흘리고도 남을 것 같은 느낌이다.

한빈에 말에 조호가 소매로 침을 닦는 시늉을 했다.

“아! 네, 알겠어요. 주군.”

조호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조호야, 하나만 묻자.”

“네, 주군. 말씀하세요.”

“계약서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글공부는 끝낸 것이냐?”

“계약서요?”

“손님 받으려면 그 정도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앗, 제가 거기까지는…….”

조호가 말끝을 흐리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이름 석 자와 복잡하지 않은 문장 몇 줄 정도는 베낄 수 있지만, 계약서를 쓸 정도는 아니었다.

당황한 조호의 모습에 한빈이 활짝 웃었다.

“글자 좀 모른다고 영웅이 못 되는 건 아니지. 하지만, 영웅마다 자신의 몫이 있는 법.”

“주군, 제가 생각이 모자랐네요.”

“뭐, 글은 됐으니. 그러니 어깨를 펴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글공부가 좀 모자란다고 계약서 따위를 못 쓰는 일은 없다.”

말을 마친 한빈은 설화가 갈아 놓은 먹이 있는 쪽으로 가서 붓을 잡았다.

그러고는 일필휘지로 내용을 썼다.

순간 조호의 눈이 커졌다.

한빈이 이제까지 적은 계약서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겨우 한 줄에 불과한 문장만이 종이 위에 있었다.

이것은 조호도 따라 쓸 수 있는 문장이었다.

문장을 다 쓴 한빈은 기지개를 켜며 당기명을 바라봤다.

“오늘은 피곤하니 나머지는 내일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지금 아침인데 벌써 쉬시게요?”

“원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는 일찍 쉬는 법이지요.”

“그렇군요.”

당기명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한빈이 써 놓은 문장을 바라봤다.

-신체발부(身體髮膚) 주군에게 맡기니. 어떤 일이 있어도 주군인 한빈을 따를 것을…….

문장을 다 읽은 당기명은 입을 벌렸다.

“아.”

그것은 영웅이 되기 위한 계약이 아닌 노예 계약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계약서는 등잔불, 수적이 될 뻔한 무리는 불나방들이었다.

한빈은 한 무리의 불나방을 내버려 둔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이 층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한빈을 바라보던 당기명은 고개를 돌려 조호를 바라봤다.

조호는 한빈이 써 준 문장을 맹목적으로 옮겨 적고 있었다.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장삼이 외쳤다.

“줄을 서시오!”

장삼의 외침에 원경을 비롯한 수적 무리가 우르르 몰려들었다.

당기명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천장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체계적이었다.

물론 약속된 행동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한빈과 함께했던 장삼과 소대섭은 아무렇지도 않게 계약을 진했었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밥을 먹고 나면 당연히 물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당기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만큼 가주의 병세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밖을 보니 해는 점점 중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삼 일 뒤 영단산 입구.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한빈 일행은 잠시 길에서 멈췄다.

모두는 두 갈래 길에서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 길은 저번처럼 영단산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고 또 한길은 영단산 옆 잔도로 돌아가는 길이다.

한빈이 팔짱을 끼고 양쪽 길을 보며 관자놀이를 톡톡 치자, 악비광은 옆으로 슬그머니 붙었다.

“형님, 바로 이곳이었죠?”

“그래, 네가 우리를 버리고 간 게 바로 이곳이었지.”

“제가 언제 형님을 버리고 갔습니까? 그리고 형님이 빨리 가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 그게 그거지.”

“제가 없어도 무사히 하남정가까지 가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가고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고 있지?”

“대충 소문은 들었습니다. 사파와 마교 사이에 전쟁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일이 있었지…….”

“사실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형님께서는 그 틈을 타서 무사히 도망치신 것 같아서 안심했습니다.”

“잘 알고 있네.”

한빈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실과는 다르지만, 강호에는 악비광이 들었던 이야기대로 알려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한빈이 원하는 대로였다.

악비광과 대화를 나누던 한빈은 시선을 새로 함께하게 한 원경을 바라봤다.

“원경아. 이리로 좀 와라.”

“주군……. 왜 그러십니까?”

녀석은 힐끔 고개를 돌리더니 겁먹은 듯 천천히 한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은 장하 옆 객잔을 떠나기 전, 영웅이 되고 싶으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놨었다.

그 때문에 열다섯 중 남은 것은 고작 일곱 명.

원경은 남은 일곱에 속했다.

하지만, 아직 한빈이 못 미더운 듯 경계하는 눈빛이다.

거기에 더해 주군이란 말도 입에 붙지 않는 듯 조심스러웠다.

한빈은 씩 웃으며 두 개의 길을 번갈아 가리켰다.

“네가 보기에는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

“음, 그걸 왜 제게 물어보십니까?”

“시험이다.”

“무, 무슨 시험입니까?”

원경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존 본능에 대한 시험이다.”

“새, 생존 본능이요?”

녀석은 살짝 말을 더듬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네가 고르는 길이 사로(死路)도, 생로(生路)도 될 수 있으니 신중히 생각해라.”

“헉!”

녀석의 비명에도 한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갈 길은 정해졌다.

한빈이 원하는 것은 녀석의 촉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한빈의 사람 좋은 모습에 원경은 한쪽을 가리켰다.

“저는 저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러면 저쪽으로 가도록 하자.”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가자고 해서 길을 정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한빈은 씩 웃으며 돌아섰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당기명은 속으로 혀를 찼다.

원경이 가리킨 곳과 한빈이 지도에서 설명한 경로는 똑같았다.

원경이 그쪽으로 가자고 안 했든 말든 갈 길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단산을 가로질러 가자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팽 공자님.”

“왜 그러세요? 당 공자.”

“하필이면 왜 이쪽입니까?”

“가장 빠르지 않습니까?”

“이쪽은 강남 사도련의 성지가 조성되고 있는 곳 아닙니까? 일반 백성들이야 산적이 없으니 더 안전하다고 해도, 요즘 들어 정파와 날을 세우고 있는 사파의 본거지를 지나기에는 껄끄럽지 않으십니까?”

“옛말에 그런 말이 있죠?”

“무슨 말입니까?”

“구더기가 무서우면 장을 담그지 말란 이야기요.”

“뭔가 좀 이상한데요?”

“뭐, 어쨌든 구더기가 앞을 막든 독이 묻은 암기가 길을 막든 저희는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혹시, 독이 묻은 암기는 우리 당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설마 제가 천하의 사천당가를 구더기에 비유하겠습니까?”

“…….”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일정을 막는 것이 사파라면, 적이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이것도 기회입니다.”

“그런 뜻이…….”

말끝을 흐린 당기명은 슬쩍 오기가 생겼다.

무가지회가 왜 열렸는가?

사천당가는 십대세가의 정보가 필요해서 주최했지만, 무가지회의 본질은 사파에 대항할 힘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 적이 눈앞에 있는데 두려워한다?

이것 말이 안 되었다.

그때였다.

덜그럭.

수레바퀴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상인들이 영단산을 가로지르기 위해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상인 행렬이 지나가자 한빈이 당기명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파 덕분에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도 늘었다고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파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상인이 늘어나다니요? 반대가 아닙니까?”

“산적보다는 사파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껄끄럽긴 해도 사파는 말이 통하는 집단이니까요. 사파 덕분에 영단산뿐 아니라 근처 산적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문입니다. 뭐, 원래 사파의 보호를 받던 상인들도 있고요.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은 사파가 우리 정파보다도 고마울 겁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를 더 내지요. 그들이 좋아하는 개는 백구일까요? 흑구일까요?”

“흠.”

당기명은 적잖게 놀라며 한빈을 바라봤다.

정파와 사파를 흰 개와 검은 개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다는 자체가 기가 막힌 일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냥 잘 짖는 개를 좋아하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마 이게 무가지회에서 논의되어야 할 최선이 아닐까 합니다.”

“…….”

당기명은 아무 말 못 하고 한빈을 바라봤다.

마치 고승과 선문답을 주고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한빈은 조용히 마차로 올라서서 손뼉을 쳤다.

“소 대주, 이제 출발하지.”

“네, 주군.”

마차 앞, 마부석에 앉아 있는 소대섭은 기분 좋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휘이잉.

말이 투레질하자 천천히 마차 바퀴가 굴러갔다.

한빈의 마차가 점점 멀어지자, 뒤쪽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푸드덕.

비둘기가 향한 곳은 묘하게도 영단산의 정상이었다.

누가 봤다면 한빈의 움직임과 비둘기가 향한 방향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었다.

하지만, 한빈 일행이 탄 마차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조용히 날아오른 비둘기의 날갯짓은 다른 산 새 소리에 묻혔기 때문이었다.

* * *

그날 오후.

날이 저물자 한빈의 마차는 산 중턱에서 멈췄다.

언제나 그러하듯 어두운 길에 횃불만으로 산을 넘어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고수만으로 구성된 행렬이라면 최소한의 짐으로 산을 넘는 것은 가능했지만, 지금처럼 마차에 짐을 채우고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이 아닌 말이 견뎌 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말이 멈추자 조호가 쪼르륵 달려가 말에게 물과 건초를 준다.

그러고는 소대섭과 장삼이 바닥을 정리하고 노숙할 채비를 마쳤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모든 준비를 마친 장삼과 조호는 새로 일행에 합류한 무리에게 노숙할 때 필요한 일들을 하나하나 가르치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당가의 무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신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호 경험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 중 수장인 당독대는 슬쩍 소대섭에게 다가갔다.

사천까지 함께해야 할 일행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당독대는 소대섭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천당문의 당독대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제야 인사를 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사 공자님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소대섭이라고 합니다. 부업으로 적혈맹호대를 맡고 있기도 하지요.”

소대섭도 마주 포권했다.

포권을 푼 당독대는 기분 좋게 웃음을 흘렸다.

“허허, 부업이요?”

“뭐, 적혈맹호대는 하북팽가에서 내려 준 칭호지만, 제가 사 공자님을 모시는 건 개인적인 사심이 담겨 있답니다.”

“사심이라니요?”

당독대가 화들짝 놀라 묻자, 소대섭이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일류의 경지도 버겁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제는…….”

나뭇가지를 다듬는 소대섭의 단검에 푸른 검기가 살짝 맺혔다.

소대섭이 자신의 경지를 검으로 직접 보여 준 것이다.

그 모습에 당독대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설마요……. 얼마 전까지 일류의 경지도 버거웠다는 분이 검기를 피워 올리십니까?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겸손은 아닙니다. 뭐 죽을 고비는 꽤 넘겼지만, 아마 그때 죽었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겁니다.”

“…….”

당독대는 소대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대섭이 보여 준 경지는 분명 초절정이었다.

당독대의 경지는 지금 절정에서도 마지막 단계였다.

이제 초절정의 끝자락을 잡기 위해 밤낮없이 수련에 임하는 중이었다.

사실 사천당문의 특성상 성취가 조금 느리기는 하다.

일반 무공뿐 아니라 암기와 독까지 섭렵해야 진정한 사천당문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호 속담에 사천당가의 고수는 다른 문파의 경지의 한두 단계를 뛰어넘는다는 말이 있다.

당독대도 일대일 대결에서는 소대섭에게는 밀리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군을 향한 저 진심만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독대의 얼굴이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물들 때였다.

소대섭이 외쳤다.

“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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