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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53화 (253/621)
  • 253화. 얘들아 손님 받아라 (3)

    악비광이 다급하게 물었다.

    “형님, 잠시만요. 이무명 무사가 따로 할 일이라는 게…….”

    “응, 일급비밀이야.”

    “역시나 그렇군요.”

    악비광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악비광을 뒤로하고 수적 무리를 바라봤다.

    그들은 대충 열댓 명 정도였다.

    모두 사내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들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던 한빈이 손뼉을 쳤다.

    짝!

    그들의 시선을 모은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부터 너희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다.”

    “…….”

    그들은 답 대신 눈을 크게 뜨며 서로를 바라봤다.

    한빈은 그들의 모습에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제안은 간단하다. 돌아가서 수적 질을 하든 나를 따라 영웅이 되든. 물론 선택은 너희의 자유다.”

    한빈의 말에 수적 무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한빈의 뜻을 못 알아들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그들을 바라봤다.

    뭐, 저래서야 결론이 안 나올 것이 뻔했다.

    대충 강호에서 굴러먹은 이들이라면 자신의 처우에 대해 물어봐야 정상이었다.

    하북팽가에서 거둬 줄 것인지?

    아니면 산동악가에서 거둬 줄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어떻게 영웅으로 만들어 줄 건지를 물어봐야 정상이었다.

    한빈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을 때 수적 무리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대충 봐도 열여섯, 많이 잡아도 열여덟 정도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한빈은 사내아이를 보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강가에서 봤을 때부터 눈여겨보던 아이였다.

    어찌 보면 수적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은 모두 저 아이 때문이었다.

    전생에 인연이 있던 자.

    어찌 보면 핏줄보다 더 끈끈한 인연이 있었던 귀검대 중 한 명이었다.

    전생에 한빈은 녀석을 촉새라 불렀었다.

    앞에 ‘촉’ 자를 붙인 이유는 입이 가벼워서는 아니었다.

    촉을 붙은 진짜 이유는 녀석의 감이 좋기 때문이었다.

    귀신도 울고 갈 만큼 촉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녀석의 운이 좋다는 것이다.

    묘하게 함정은 피해 가고 운 좋게 위험은 비켜 가는 녀석이었다.

    운이 좋은 녀석을 합류시키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전생에 녀석에게 진 빚도 갚을 겸 말이다.

    사실 한빈은 귀검대의 수하 모두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빈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마지막까지 막아 준 이들이었으니.

    결론적으로 녀석의 촉도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등불에 불과했다.

    전생에는 한빈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떴으니까.

    아마 원래 이름이 원경이었던 것 같았다.

    한빈은 검지로 녀석을 가리켰다.

    “이름이 어찌 되느냐?”

    “원경이라고 합니다.”

    “원경이라……. 그럼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아라.”

    자신이 생각하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이라 자신을 밝힌 아이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한빈이 턱짓하자 그제야 원경의 입이 열렸다.

    “공자님을 따라가면 정말 영웅이 될 수 있는 겁니까?”

    “그건 네가 하기 나름이지.”

    한빈이 무표정하게 답하자 녀석의 입술이 달싹였다.

    달싹이는 것은 입술만이 아니었다.

    감정이 요동치는지, 어깨까지 살짝 흔들렸다.

    녀석은 갑자기 상의를 벗었다.

    훌러덩 벗은 녀석의 몸은 생각보다 야위었다.

    모두가 원경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한빈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은 한빈을 한번 바라보더니 자신의 팔을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죄인도 영웅이 될 수 있습니까?”

    원경이 가리킨 곳에는 화상을 입은 듯한 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二).

    그것은 분명히 숫자였다.

    한빈은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전생에도 본 상처이니까.

    한빈이 물었다.

    “어쩌다 자자형(刺字刑)을 받았느냐?”

    자자형이란 이마나 팔에 형벌의 내용이나 횟수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상처를 내고 묵을 입혀 문신처럼 새기는데, 원경의 어깨에는 불로 지진 듯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원경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지나가다가 전낭을 주워서 관아에 찾아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첫 번째 형벌을 받았습니다.”

    원경의 말에 주변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지켜보던 당기명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악비광의 옆에 붙었다.

    “악 공자 지금 저게 무슨 말입니까? 물건을 찾아 줬는데, 형벌을 받았다니요?”

    “저도 잘 모릅니다.”

    악비광이 고개를 젓자 당기명이 물었다.

    “악 공자를 따르던 이 아닙니까?”

    “저도 처음 듣는 말이라…….”

    악비광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을 따르던 수적의 무리 중 하나이긴 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몇몇 수적들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서였다.

    이들 중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칼을 든 자는 거의 없었다.

    다만, 살기 위해서 칼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칼을 들기까지 당했던 자신의 억울한 일들을 떠올렸다.

    “나도 그랬지.”

    “자네만 그런가? 나도 그랬어.”

    그들의 웅성거림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은 앞에 한빈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해 냈다.

    한빈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의 표정만 눈으로 확인했다.

    이중 걸러야 할 자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웅성거림이 살짝 가라앉자 원경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전낭의 주인은 사례하기 싫어서 도둑맞았다고 거짓을 고한 겁니다.”

    “전낭의 주인은 정파였겠군?”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날 바라보는 네 눈빛이 그렇다. 두 번째 상처는 사파 놈들 때문에 생겼겠구나.”

    “허, 어찌…….”

    원경의 눈빛이 떨렸다.

    한빈은 아무 표정 없이 턱짓했다.

    “계속해 보아라.”

    “그러니까…….”

    원경은 계속 말을 이었다.

    원경의 말에 따르면 좋은 일을 하고도 두 번이나 누명을 써서 자자형을 받은 것이다.

    웃기는 것은, 성인이 안 된 자에게 자자형은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관아는 원경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형벌을 내린 것이다.

    원경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한빈이 좌혈랑검을 든 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원경이 입을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놀랐는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쿵.

    한빈의 행동에 다른 이들도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오른쪽 어깨 쪽을 좌혈랑검으로 그었다.

    서걱.

    옷자락 잘리는 소리가 울렸다.

    모두는 입을 크게 벌렸다.

    옆에 있던 악비광은 한빈의 팔을 살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왜 호들갑이냐?”

    “왜 형님 어깨에 칼질을 하시고…….”

    “잘 봐라.”

    한빈은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한빈이 어깨를 살짝 흔들자, 단검에 베어진 옷자락이 펄럭이며 속살을 드러냈다.

    순간 악비광의 표정이 풀렸다.

    “아, 다행이군요.”

    다른 이들도 악비광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탄성을 흘렸다.

    한빈이 팔은 그은 것이 아니라 겉에 의복을 그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모두의 탄성 소리가 흐려질 때, 한빈은 덜렁거리는 의복을 가차 없이 뜯어냈다.

    부욱.

    순식간에 한빈의 팔뚝이 드러났다.

    한빈은 자세를 낮추고 자신의 어깨를 원경에게 보여 줬다.

    “자세히 보거라.”

    한빈은 자신의 어깨가 잘 보이게 원경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한빈의 행동에 원경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무엇을 보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팔뚝은 보통 무인의 팔보다 가늘었으며, 일반인과 똑같았다.

    거기에 자자형으로 두 줄이 그어진 자신의 어깨와는 다르게 한빈의 어깨는 깨끗했다.

    대신에 작은 검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을 뿐이었다.

    원경이 멍하니 있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어때? 자자형 따위는 없지?”

    “네, 없습니다. 그런데 뭘 보라고 하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자님.”

    원경의 말에 한빈은 허리를 들어 모두를 바라봤다.

    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큰 도적은 자자형 따위는 받지 않는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짜 큰 도적은 누명 따위는 쓰지 않는다.”

    “…….”

    원경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지금 한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한빈 자신이 도둑이라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왜 자신을 도적이라 낮추는지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한빈이 악비광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뜯어냈다.

    부욱.

    옷이 찢어지며 악비광이 맨살이 드러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다들 봐라. 큰 도적은 자자형 따위는 받지 않는다.”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수적들에게 산동악가의 악비광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런 악비광의 옷소매를 가차 없이 뜯어낸 것이었다.

    거기에 악비광에게도 도적이라 했다.

    모두가 난데없는 상황에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악비광이 발끈했다.

    “형님, 내가 도둑이라는 얘기입니까?”

    “넌 잠시 기다리고.”

    하지만, 한빈은 고개를 돌려 수적 무리와 원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기세를 피워 냈다.

    한빈이 스멀스멀 기세를 드러내자, 모두의 눈이 커졌다.

    물론 한빈이 평소에 사용하던 반박귀진을 풀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고의로 천천히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한빈의 기세가 객잔 안을 장악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영웅과 도적은 한 끗 차이라는 거다.”

    “그게 무슨…….”

    원경이 놀라 물으려다가 입을 닫았다.

    한빈이 아직 기세를 거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빈은 기세를 거두지 않은 채 표정만 바꿨다.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큰 도적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작은 도적은 물건을 빼앗는다.”

    “…….”

    “나는 큰 도적이나 작은 도적이나 모두 환경이 만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에게 큰 도적이 될 기회를 주겠다.”

    “…….”

    “나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보겠느냐?”

    “…….”

    원경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대신 원경의 어깨는 계속 움찔했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원경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조용히 포권했다.

    “부탁드립니다, 공자님.”

    원경을 시작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탁.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한빈을 바라보며 조용히 포권했다.

    그때 원경이 한빈을 나지막이 불렀다.

    “저희를 큰 도적, 아니 영웅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아직도 의심하느냐?”

    “…….”

    “증거를 보여 줄까?”

    “증거라니요?”

    “내가 너희의 마음을 홈치지 않았느냐?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네 마음을 홈쳤는데, 다른 자의 마음이라고 못 홈치겠느냐?”

    “아.”

    원경은 입을 탁 벌렸다.

    모두가 한빈과 원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유난히 바삐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설화와 청화였다.

    둘은 연신 먹을 갈아 대고 있었다.

    청화가 물었다.

    “언제까지 갈아야 해요? 언니.”

    “인원이 많으니 몇 번 더 갈아야 할 거야, 청화야.”

    “생각보다 힘드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힘든 거야. 일 다 끝나고 나면 점소이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간식거리 준비하게 할 테니 힘내.”

    “알았어요, 언니.”

    한빈은 고개를 돌려 열심히 먹을 가는 설화와 청화를 확인한 뒤 소대섭을 비롯한 적혈맹호대에게 말했다.

    “얘들아, 손님 받아라.”

    한빈의 말에 조호가 활짝 웃으며 번개처럼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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