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얘들아 손님 받아라 (2)
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던 당기명은 입을 탁 벌렸다.
자신이 어떻게 당한 건지를 악비광을 보며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불리한 내용을 한지에 빼곡히 채우고 있는데도 악비광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건 섭혼술을 펼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기명은 지금 상황이 사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악비광의 눈에는 지금 한빈의 입에서 꿀이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 터였다.
당기명, 자신도 그랬으니까.
사람을 옭아 넣는 조항과 상대가 원하는 바가 적절하게 섞여 있는 내용은 진정 장사꾼의 본보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당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무인도 의원도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한빈을 장사꾼이라 생각하니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하나가 있었다.
당기명 자신만이 아닌 악비광의 움직임까지 미리 계산에 넣어 계획을 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한빈이 미래를 내다보고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면?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다음 대의 천하제일 세가는 절대 사천당가가 될 수 없다고 불현듯 느꼈다.
가문의 우환보다 미래의 경쟁자가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당기명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을 때 한빈의 붓이 멈췄다.
탁.
동시에 악비광은 계약서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기민한 그의 수법에는 만만치 않은 기교가 숨어 있었다.
창술을 비기로 삼는 가문이 그렇듯, 산동악가에도 용등조수(龍騰操手)라는 걸출한 조법이 있었다.
산동악가를 무림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주 중 하나는 날아가는 용을 용등조수를 사용해 한 손에 움켜쥐었다고 한다.
물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이것은 용등조수의 위력을 표현하고 있는 좋은 예였다.
그 용등조수를 사용해 계약서를 낚아챘다는 것은 악비광의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계약서를 채어 간 악비광은 기분 좋게 붓끝을 놀렸다.
사삭.
눈 깜짝할 사이에 서명을 마친 악비광은 나머지 한 장을 한빈에게 건넸다.
서명을 확인한 한빈은 뒤쪽에 거지꼴을 한 악비광의 일행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선택의 시간이다.”
“…….”
무씨검가의 식솔과 수적들로 구성된 악비광의 일행은 고개를 갸웃했다.
악비광은 그들을 대신해서 물었다.
“형님,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만 선택하면 돼.”
“그러니까 무슨 선택이요?”
“들어올 건지 나갈 건지. 이것만 딱 정하면 된다.”
“…….”
“나와 악비광을 따라 사천으로 향할 건지, 아니면 여기 남을 건지를 말이다.”
“흠.”
악비광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헛기침했다.
헛기침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악비광이 말을 이었다.
“이제까지는 저와 함께 뜻을 같이하기 위해 저를 따르던 자들이지만, 제가 강요는 못 하겠군요. 형님.”
“비광아.”
“네, 형님.”
“저 사람들이 어딜 봐서 너와 뜻을 같이했다는 것이냐?”
“그럼 이런 꼴이 될 때까지 제 곁을 지켰는데, 진심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아무리 형님이라도 저들의 진심까지 이렇게…….”
“쉿, 조용하고 내 말 들어.”
“네?”
“네가 무서워서 할 수 없이 따른 것이지. 네가 좋아서 네 곁을 지켰다고 보는 거면 네 상태가 좀 심각하다고 느껴지는구나.”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악비광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무림 삼광 중 하나로 불릴 날이 앞당겨지는 듯했다.
여자와 싸움에 미친 악비광의 위명이 머지않아 강호에 퍼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악비광은 한빈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활짝 펴며 말했다.
“그럼 물어보시죠.”
“…….”
한빈은 대꾸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아우 덕에 그동안 힘들었죠?”
“…….”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입술은 달싹이고 있었다.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뭐, 기분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악비광이라는 마수에서 벗어나셨으니, 선택을 해야 합니다.”
“…….”
“저와 갈 건지, 아니면 여기 남을 것인지를요. 참, 무씨검가의 식솔은 가문으로 돌아가서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가, 감사해요.”
무씨검가의 식솔로 보이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무씨검가의 식솔은 이쪽으로 오시죠.”
한빈의 말에 무씨검가 식솔이 모였다.
한빈은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는 움찔하면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물러나려던 그는 바로 동작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앞에는 제법 묵직한 전낭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 꼴로 어찌 가문까지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건 여비입니다. 그리고…….”
한빈은 말끝을 흐리다 서찰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건 무씨검가의 가주님께 보내는 서찰이니 돌아가는 대로 보여 드리세요.”
“아.”
그는 입을 딱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대협,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은혜랄 것이 뭐 있습니까? 다 오고 가는 정이죠.”
한빈은 단숨에 무씨검가 식솔을 정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기명의 눈이 빛났다.
“살짝 오해하기도 했는데 팽 공자님은 현세에 다시 없을 진짜 대협이십니다. 다른 가문의 식솔까지 챙기시다니! 저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당 공자는 저게 챙기는 것으로 보입니까?”
악비광은 당기명만이 들을 수 있도록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기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요? 지금 여비를 건네는 것도 모자라 서찰까지 전했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시죠. 서찰은 언제 썼다고 보십니까?”
“그야…….”
“다 미리 준비된 겁니다.”
“네? 미리 준비하다니요? 대체 언제?”
당기명은 질문을 쏟아 냈다.
악비광은 어깨를 으쓱한 채 말을 이었다.
“중요한 건 언제 준비했는가가 아니라 서찰의 내용이지요. 당 공자는 서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다고 보십니까?”
“흠, 그러니까 그건 저도 잘…….”
“네, 그렇죠. 저도 잘 모릅니다. 저 서찰에는 전낭에 든 돈의 백 배를 받는다고 적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악비광은 한빈이 있는 쪽을 힐끔 돌아봤다.
당기명도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서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적대시했던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뭐, 그도 그럴 것이 당기명과 악비광은 한빈에게 계약으로 묶인 상황이니 당연했다.
악비광은 신이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마 저기에는 노예 계약서가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기명은 이번 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후, 천수장의 장주님이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우리 사천당가가 외부에서는 악독하다는 소리를 좀 듣기는 하지만, 우리 가문에서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정파의 기준에서 우리 형님을 판단하시면…….”
악비광은 말끝을 흐렸다.
탁자 위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문밖에서 들어온 햇살이 누군가의 그림자를 탁자 위에 만들어 낸 것이었다.
악비광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한참을 기분 좋게 웃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악비광, 너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헉, 형님.”
“아무래도…….”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탁자 위에 좌혈랑검을 어루만지다가 틀어쥐었다.
“헉.”
악비광이 손바닥을 보이며 뒤로 물러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왜 그리 놀라? 내가 하려던 말이 뭔지 알고?”
“저를 죽이시려는 거 아닙니까?”
“내가 널 왜 죽여?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다.”
“그럼 왜 단검을 잡으신 겁니까?”
“쓸 데가 있으니 놀라지 말고 잠시만 이리 와라. 네가 도와줄 것이 있다.”
한빈의 말에 악비광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같은 시각 하북팽가 가주전.
가주전에는 가주 팽강위와 집법당주 팽대위 그리고 대공자 팽혁빈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입술 사이로 연신 한숨을 내뿜고 있었다.
“후.”
“대체 이걸…….”
“휴,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의 가운데에는 서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활짝 펼쳐져 있는 서찰에 고정되어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팽강위가 대공자 팽혁빈을 바라봤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저는 일단 한빈이를 믿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한빈이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 어떤 걱정을 하고 계신지요?”
“혹여나 혼자 나서다가 다칠까 봐 그러는 게지.”
“흠.”
“네 생각은 어떠하냐. 모든 무림인의 시선이 무가지회에 몰려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서찰 하나만 남기고 떠났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겠느냐?”
“아버님, 제가 강호행을 떠날 때는 그리 걱정하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한빈이는 막내가 아니더냐…….”
말끝을 얼버무린 팽강위는 서찰을 바라봤다.
서찰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 내용은 가문을 위해 무가지회로 향하는 길을 닦아 놓겠다고 한 것.
두 번째는 개방을 통해 서찰을 하나 전달할 테니 잘 받으라는 내용.
세 번째는 사람을 한 명 보낼 테니 무가지회로 가는 행렬에 같이하라는 내용이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 떠난 건지도 서찰에는 밝히지 않았다.
전이라면 이런 걱정도 하지 않았을 팽강위였다.
하지만, 요즘은 여러 일을 겪고 나서 한빈에 대한 감정이 많이 바뀐 그였다.
팽강위의 표정을 본 팽혁빈이 말했다.
“아버님, 그거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빈이의 옆에는 적혈맹호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얼핏 보니 그들 하나하나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흠.”
팽강위가 턱수염을 쓸며 헛기침을 하자, 집법당주 팽대위가 끼어들었다.
“제가 보고받기로는 적혈맹호대의 대부분은 한빈이와 떨어져 다른 곳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시녀 둘과 호위 셋만 데리고 천수장을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허허, 지금이라도 찾아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팽강위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한빈에 대한 걱정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팽강위의 표정을 본 팽혁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으니 수하들을 두고 가지 않았겠습니까?”
“이유가 있다라…….”
“남들의 주목을 받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팽혁빈의 말에 팽강위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잠시 서찰을 바라보던 팽강위가 입을 열었다.
“너는 무가지회로 언제 출발하기로 했느냐?”
“저는 오 일 후입니다.”
“그럼 일정을 조금 앞당기거라.”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때였다.
가주전의 문이 열렸다.
덜컹.
열린 문으로 태양을 등진 이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처음에는 햇볕 때문에 보이지 않던 이가 점점 다가오자 팽혁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이 네가 어떻게…….”
하지만, 말을 맺지 못했다.
가까이 온 막내의 모습에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 * *
장하 나루터의 객잔 안.
한빈은 잠시 멈춰 귀를 만졌다.
“누가 내 얘기라도 하고 있나?”
“형님 얘기를 할 사람이 한둘입니까?”
“뭐, 그건 그렇지. 그런데 우리 무명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한빈이 혼잣말을 흘리고는 고개를 힐끔 돌려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악비광이 옆에 붙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무명 무사는 왜 안 데려오셨습니까?”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우리도 지금부터 할 일을 마치자고.”
말을 마친 한빈은 악비광과 함께 수적 무리가 있는 탁자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