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범인은 바로 이곳에 (3)
멍하니 있던 양예신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네, 준비됐습니다.”
“그럼 차 한잔 하고 이어서 대화를 나누시지요.”
“제가 성급했습니다, 팽 공…….”
양예신을 말을 맺지 못했다.
누군가가 한빈의 옆에 차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조르륵.
일정하게 흘러내리는 찻물에, 양예신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양예신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한빈에게 눈이 팔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척도 없이 한빈의 옆에 다가와 차를 따르는 시녀라?
그런 고수가 일개 시녀일 리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시녀의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앳된 모습에,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외모였다.
양예신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이곳이 보통 장원 같지 않아서였다.
이곳에 오면서 천수장에 대한 온갖 이야기를 들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왠지 그들의 말 중 몇 가지는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예신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한빈이 옆을 보며 말했다.
“설화야, 장 의원 좀 모셔 와라.”
“네, 공자님.”
말을 마친 설화는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설화를 넋을 잃고 보던 양예신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를 깨달은 것이었다.
“팽 공자님, 의원이라니요?”
이제는 말투까지 살짝 바뀐 양예신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용한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 의원은 아니지만, 제 밑에 병을 제법 잘 보는 의원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천수장의 장주님이 신의라 하던데, 그건 무슨 까닭입니까?”
“뭐,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팽 공자님.”
“수하는 저의 수족이니 어찌 구분이 있겠습니까?”
“허, 제가 한 방 맞았군요.”
양예신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천수장 아래에 있는 상인들과 마을 사람 중 몇은 천수장의 장주가 신의라고 했다.
이전에는 앉은뱅이 거지를 일으키기도 했다 들었다.
어떤 이는 천수장의 장주가 생불이라고도 했다.
사실 지나가던 이들이 듣는다면 코웃음 칠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면하고 나니 한빈에 대해서 믿음이 생긴 양예신이었다.
그런데 의원이 따로 있다니?
양예신은 한빈이 자신의 능력을 감추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양예신은 집안 이야기는 잠시 접어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빈도 그의 말에 맞장구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양예신의 입이 마를 즈음, 문이 열렸다.
덜컹.
의원 복장의 사내가 들어오더니 한빈의 옆에 섰다.
사내를 본 한빈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 의원, 자리에 앉아요.”
한빈의 말에 장자명이 자리에 앉았다.
장자명은 앞에 있는 낯선 손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한빈을 바라봤다.
“사 공자님.”
“왜 그러세요? 장 의원.”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아무래도 며칠 안 가서 쓰러질 것 같습니다.”
그는 장자명이었다.
장자명은 제발 살려 달라는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장자명은 마을 재건 사업에 희생양이 된 상태였다.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치안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치안이 필요 없었다.
얼마 전까지 귀신 들린 마을로 불렸던 이곳에 누가 약탈을 하러 오겠는가?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을 꼽는다면 바로 의원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주해 오자, 천수장 근처에 의원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 의원은 서재오의 생각이었다.
거기에서 밤낮없이 환자들과 씨름하는 것이 장자명이고 말이다.
장자명은 제법 말이 통하던 서재오가 지금처럼 원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지금 서재오를 말릴 사람은 한빈밖에 없으니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양예신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한빈은 의술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의원이 한빈에게 살려 달라고 부탁을 하겠는가?
양예신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한빈은 아무 표정 없이 장자명을 바라봤다.
“일단 이 일부터 해결하고 상의하시고, 지금은 양 공자님 말에 집중하시죠, 장 의원.”
“네, 집중하겠습니다. 사 공자.”
장자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그에게 장자명을 소개한 뒤 말을 이었다.
“이제 증세에 대해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양예신은 비교적 자세히 양대한의 병세를 털어놓았다.
한빈은 양예신의 말을 듣는 대신 장자명의 표정을 살폈다.
양예신이 설명을 늘어놓자 장자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장자명.
설명이 끝나자 한빈은 알 듯 말 듯 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양예신의 설명이 끝나자, 찻잔 위에 모락모락 나는 김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양예신은 장자명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장자명은 고민에 빠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의외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한빈이 물었다.
“혹시 병에 걸리기 전에 잘못 드신 거라도 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값비싼 영약이나, 구하기 힘든 영약이나, 남들에게는 말 못 할 영약 같은…….”
한빈이 슬쩍 말끝을 흐리며 양예신을 바라봤다.
양예신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을 이었다.
“휴. 역시 사 공자님의 눈을 못 속이겠군요. 사실은……. 있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영약이었습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가…….”
“그럼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그것도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그것도…….”
“그럼 치료비가 꽤 올라가는데도요?”
“…….”
양예신은 멍하니 한빈을 바라봤다.
잠시 머뭇거리던 양예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처방전을 준비하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장 의원과 몇 가지 상의만 하고 바로 처방전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
양예신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양예신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자명에게 물었다.
“여덟 번째 증상이 맞죠?”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럼 처방전을 써 주시죠.”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설화가 나타났다.
물론 손에는 지필묵이 든 보따리가 있었다.
설화는 정성스럽게 보따리를 풀고는 장자명과 한빈의 앞에 종이를 펼쳐 놓았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한빈과 장자명은 동시에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사사-삭, 사사-삭.
두 개의 붓이 종이 위를 누볐다.
양예신은 넋이 빠진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붓놀림에 넋이 나간 것은 아니었다.
한빈이 손가락을 튕긴 소리가 푸른 무복의 도인과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신선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도인의 제자라니!
한빈에 대한 믿음이 점점 단단해졌다.
그때 한빈과 장자명의 붓이 멈췄다.
양예신은 한빈의 앞에 있는 종이와 장자명의 앞에 있는 종이를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방전이 두 장입니까?”
“아닙니다.”
한빈이 답하자 양예신이 물었다.
“그런데 왜 종이가 두 장입니까? 팽 공자님.”
“한 장은 당연히 계약서죠.”
“아, 그렇군요.”
양예신은 입을 턱 벌렸고,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설화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설화의 눈에는 양예신이 등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보였던 것이다.
* * *
천수장의 정문.
교대를 마친 조호가 막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눈에 익은 누군가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눈매를 좁히던 조호는 상대를 알아보고는 재빨리 달려갔다.
“무제자 어르신.”
“어이쿠, 조호 아니냐?”
“그런데, 뒤에는 누구신지…….”
조호가 말끝을 흐리자 무제자가 턱짓하며 그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이번에 개방도로 첫걸음을 막 뗀 녀석들이다.”
“아, 그렇군요.”
“똘망똘망하게 생긴 여기 이놈은 현개라고 하지.”
이름 없는 어린 거지는 이름을 받았다.
그것도 거지에게는 드문 이름으로 말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현개라고 해요.”
어린 거지가 인사를 하자, 조호가 답했다.
“현명한 거지라, 좋은 이름이구나.”
조호가 입에 침을 발라 가며 칭찬하자, 어린 거지 현개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현개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홍칠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뒤쪽에 있는 덩치 좋은 사내를 쓱 바라봤다.
“이쪽 뺀질뺀질한 놈은 장오라고 한다. 속세에 찌든 때를 아직도 못 벗은 놈이지.”
홍칠개의 소개에 장오가 쭈뼛대다가 마지못해 포권했다.
“안녕하슈, 개방의 장오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천수장의 조호라고 해요.”
조호가 마주 포권했다.
인사를 나눈 조호는 홍칠개에게 물었다.
“무제자 어르신, 침소는 어떻게 할까요?”
“평소대로 마구간에 짚이나 깔아.”
“우리 공자님이 어르신 오시면 극진히…….”
“거지가 무슨 침상이야? 마구간도 호사야, 호사. 안 그런가?”
되묻는 홍칠개의 말에 조호는 눈만 끔뻑거렸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라고 했다가는 괜히 한 소리 들을 것 같아서였다.
조호가 당황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함성이 들렸다.
-와아!
그 소리에 조호가 손뼉을 쳤다.
짝!
홍칠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더냐?”
“신창양가가 방문했는데, 적혈맹호대와 친선 비무를 하기로 대주끼리 약속을 했나 봅니다. 저도 지금 들렀다가 가려고요.”
“오호, 간만에 싸움 구경 좀 하겠구나.”
“우리 공자님이 어르신을 닮았나 보네요.”
“하하, 그럼 제자가 사부를 닮아야지.”
홍칠개는 턱짓으로 조호를 재촉했다.
조호는 홍칠개의 표정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만 보면 홍칠개는 묘한 곳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사실 싸움 구경 좋아한다라는 말이 칭찬이던가?
제자가 사부를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은, 조호가 봤을 때는 팔불출에 가까웠다.
-와아!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조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사실 조호의 가슴도 살짝 뛰었다.
신창양가가 어디던가?
강북 오대세가에는 속하지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저력을 가지고 있는 무가였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방문한 무력대는 신창양가 최고의 무사들이라는 점이었다.
조호는 항상 자신의 위치가 궁금했다.
장운현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지만, 실제로는 적과 싸워 본 것도 아니었다.
하남정가에서도 실력을 보이긴 했지만, 상대와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조호에게는 항상 대결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물론 나머지 적혈맹호대 대원들도 조호와 마찬가지였다.
연무장까지 한걸음에 달려간 조호는 입을 벌렸다.
지금 막 나온 적혈맹호대 대원이 다름 아닌 장삼이었기 때문이다.
조호가 대결을 앞둔 장삼을 보고 놀라고 있을 때였다. 조호와는 다른 심정으로 대결을 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장오였다.
신창양가라는 무림세가를 상대하는 비무라 들었는데, 느닷없이 자신의 형이 서 있는 것이었다.
나이 든 삼류 무인.
그것이 장오가 내린 형에 대한 평가였다.
그런데 신창양가의 최고 무력대와 비무를 벌이려고하다니!
사실 한숨만 나왔다.
모자른 줄 알면서 얼굴을 세우기 위해 삼류의 실력으로 일류 무인들 앞에 선다라?
그것은 무인의 자존심이 아닌 객기에 가까웠다.
장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늙으면 곱게 죽든가…….”
그 말에 조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봐도 장오가 한 말은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는 장삼을 두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조호는 욕이라도 던져야 시원해질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조호는 장오의 이름을 떠올렸다.
혹시?
고개를 갸웃한 조호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장삼에게는 동생이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아주 못된 동생이 말이다.
조호는 머리를 짜내었다.
주군인 한빈이라면 장오를 어떻게 할지 하며 말이다.
고민을 끝낸 조호가 장오에게 물었다.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내기라니, 무슨 내기를 말이오?”
“저 두 무사 중 누가 이길 것 같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