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범인은 바로 이곳에 (2)
천수장으로 향하던 한빈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한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서재오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내가 실수라도 했는가?”
“아닙니다. 검협이 아니라 상협으로 불리셔도 될 듯합니다.”
“흠, 농이 지나치군.”
“편한 대로 생각하시지요.”
한빈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서재오를 바라봤다.
“흠, 칭찬으로 알겠네.”
서재오가 어색하게 웃자 한빈도 미소를 지었다.
강호행 기간 동안 천수장에서 지내기로 한 서재오였다.
그가 만금 전장의 출신인 만큼, 한빈은 자금과 토지에 대한 계약 부분을 맡겼다.
그도 그럴 것이 만금 전장은 서안 제일을 넘어 강남 무림 전체를 놓고 봐도 최고의 전장 중 하나였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행정 업무도 아니요.
정직함은 더욱 아니다.
바로 돈 냄새를 맡는 후각이었다.
자신은 실제로 냄새를 맡지만, 서재오는 돈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빈은 생각했다.
지금 계약을 한 방법이 그랬다.
처음에는 상인을 위해 아무 대가 없이 점포를 내주었지만, 이곳의 상권이 정상화되는 순간 적정한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상인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귀신이 살 듯한 이곳을 일으키기에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검보다는 장사에 재능이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서재오도 한빈의 미소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따라오던 소대섭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사내 셋이 기분 좋게 천수장을 향해 올라갈 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저분이 장주님이신 것 같은데!”
구경꾼 중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그의 외침을 누군가가 재빨리 받는다.
“어, 방금까지 나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정말인가?”
“그래, 나랑 얘기하고 있었어. 옷이 달라서 못 알아봤는데 이런…….”
“에이, 이 사람아! 생불님이 어찌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나겠는가?”
“장운현에서는 같은 옷만 입고 계셨는데…….”
“그게 아니지, 생불, 아니 장주님이 어떤 분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지. 관음보살은 아기로도, 여자로도 나타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자네 말이 맞네.”
그들의 대화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누가 왔다고?”
“장주님이 오셨다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한빈이 소대섭을 힐끔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는 뜻이었다.
눈빛을 본 소대섭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생불이라는 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장주님이라고 정정해 줬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북팽가의 막내 공자가 아닌 장주님이라고 해야 알아듣습니다, 주군.”
“그럼 천수 도협은?”
한빈이 묻자 소대섭이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주군을 돕는 저희가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신선처럼 보였나 봅니다.”
“신선이라?”
“그래서 그냥 협객의 도리라 했는데, 그 뒤로 천수장의 천수를 따서 천수 도협이라고 부르네요.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대섭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잘했어.”
“네?”
“잘했다고, 소 대주.”
“휴…….”
“왜 그렇게 한숨을 쉬어?”
“저는 주군이 뭐라 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 뭐라 해? 잘 생각해 봐. 내 수하가 벌써 도협이라는 별호를 얻었는데, 당연히 내가 기뻐해야지. 안 그래?”
“…….”
“어디 도협을 부리는 주인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말을 마친 한빈은 경쾌한 걸음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대섭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서재오를 바라봤다.
“주군이 나를 놀리는 거 맞죠?”
“놀리는 게 아닐세. 눈빛을 보면 진짜 좋아하고 있네.”
“대협 말씀은 주군의 말이 진심이라는 말씀입니까?”
“눈빛을 보면 진심인 것 같네만…….”
“아.”
소대섭은 앞서 나가는 한빈의 뒷모습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사실 분에 넘치는 별호를 받은 자신에게 벌을 내릴 줄 알았다.
천수 도협이라?
어찌 보면 주군인 한빈을 넘어선, 과하디과한 별호였다.
주군을 넘어서는 별호를 가진 수하에게 저리 축하해 줄 자가 강호에 있던가?
소대섭은 없다는 데에 자신의 한 달 급여를 걸 수 있었다.
소대섭의 표정을 본 서재오가 헛기침을 했다.
“흠.”
“왜 그러십니까? 대협.”
“자네의 표정을 보니 착각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해 주려고 하네.”
“착각이라니요?”
“생각해 보게. 검협이니 도협이니 하는 별호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것이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주군의 배포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입니까?”
“사람을 가리키는 별호가 어찌 생불이란 별호를 따라가겠냐는 말일세.”
서재오는 피식 웃자 소대섭이 앞서 나가는 한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 모습에 서재오가 물었다.
“또 무슨 일인가?”
“주군이 등에 메고 있는 게 뭘까요? 평소보다 조금 커 보이는데요.”
“그러게 말일세. 먼저 가 보겠네.”
말을 마친 서재오는 다급히 한빈을 따랐다.
* * *
다음 날 아침, 한빈은 의자에 기댄 채 검은 바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바둑판은 황보만청에게 받은 천궁이었다.
천궁에 들어 있던 비급과 지도는 모두 찾았다.
한 번 분해하는 바람에 천궁의 안쪽에 있던 장치는 모두 망가진 상태.
한빈이 천궁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본능이었다.
천궁에는 아직 비밀이 남아 있다는 것이 한빈의 생각이었다.
한빈이 천궁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주군.”
목소리를 확인한 한빈이 답했다.
“들어와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덜컹.
조호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주군, 정문에 손님이 찾아왔어요.”
손님이라는 말에 한빈은 천궁에서 눈을 떼고 조호를 바라봤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구지?”
“산서의 양가라고 합니다.”
“산서의 양가라면……. 신창양가?”
“네, 깃발을 보니 신창양가가 맞는 것 같아요.”
조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신창양가라면 사천당가와 함께 양을 쳐 놓은 가문이 아니던가?
모든 것은 무가지회를 위한 일이었다.
하나 그것은 변장한 한빈과 있었던 일.
실제 한빈과 신창양가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당시 신창양가는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하북 땅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신창양가가 왜 이곳이 왔단 말인가?
의문도 잠시, 한빈이 말했다.
“신창양가의 대공자는 지금 어디 있지?”
“주군,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조호.”
“제가 대공자라는 걸 막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알고 계셨잖아요.”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 들어 조호의 촉이 많이 날카로워진 것 같아서였다.
한빈이 표정을 바꾸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한 조직의 수장이 되려면 보고를 받기 전에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지.”
말을 마친 한빈은 휘적휘적 앞서 나갔다.
그 모습에 조호가 다급히 외쳤다.
“주군 어디 가십니까? 신창양가의 대공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요!”
“우리가 손님 모시는 곳이 접객실 말고 또 어디 있어?”
“아, 그렇겠군요.”
조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앞서가던 한빈이 힐끔 돌아봤다.
“안내는 필요 없으니 돌아가서 하던 일 마저 해.”
말을 마친 한빈은 옷깃 스치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사사-삭.
* * *
천수장의 접객실.
본래대로 붉은 무복을 차려입은 한빈은 접객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전에 봤던 신창양가의 대공자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꽉 말아 쥔 주먹은 표정을 감추려는 듯 보였지만, 눈빛만은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한빈은 모른 척 포권했다.
“신창양가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창양가의 양예신입니다. 그런데 하북팽가라니요?”
양예신은 마주 포권했지만,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물로 한빈도 이 상황이 의아할 뿐이었다.
“혹시 제가 하북팽가 사람인 걸 모르셨습니까?”
“저는 천수장의 장주라고만 듣고 찾아왔습니다.”
말을 마친 양예신은 한빈을 쓱 훑어봤다.
하북팽가 사 공자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이전부터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최근의 평가가 아닌, 이전에 겁쟁이라는 소문이었다.
양예신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한빈은 양예신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한빈은 헛기침하며 양예신을 바라봤다.
“흠.”
기침 소리에 놀란 양예신이 다급하게 품속을 뒤졌다.
그는 서찰을 꺼내 잽싸게 한빈에게 건넸다.
“이걸 먼저 보시지요.”
“일단 읽어 보겠습니다.”
반사적으로 서찰을 건네받은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서찰을 읽어 나갔다.
서찰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광개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양예신을 도와주라는 내용이었다. 물론 맨입은 아니라는 단서가 서찰의 말미에 붙어 있었다.
맨입이 아니라면?
서찰을 탁자에 내려놓은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개방 하남 분타주, 광개의 서찰이군요.”
“네, 광개는 제 오랜 벗입니다.”
“광개의 벗이라면 양 공자님은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편하게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초면에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양예신은 아직 못 미더운 듯 머뭇거리며 한빈을 다시 훑어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딱 잘라 말했다.
“본론을 말씀드리지 않으면 저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용건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용한 의원을 찾아 이곳까지 왔습니다.”
“용한 의원이라니요?”
“그러니까…….”
양예신의 설명은 간단했다.
신창양가의 가주인 양대한이 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병세가 하남정가의 가주가 걸렸던 병과 같다고 했다.
한빈은 이 부분에서 몇 명 의심 가는 인물을 떠올렸다.
“여기까지는 우리 가문의 사정이고 아버님의 병세를 말씀드리면…….”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병세를 말씀드려야 대책을 말씀해 주실 수가…….”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한빈의 말에 양예신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의원이 아니시라니요? 광개나 이곳 주민들의 말로는, 이곳 장주님이 뛰어난 의원이라고 하여 불원천리 이곳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의원이 아니라니요!”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한빈에 대한 불신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양예신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탁자를 쳤다.
쾅.
내공이 실리지는 않았지만, 탁자가 철렁하고 흔들렸다.
제법 큰 움직임이었다.
순간 양예신의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찻잔에 담겼던 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순간 한빈은 전광석화를 운용하며 재빨리 그의 찻잔을 잡았다.
마치 노름꾼의 손놀림처럼, 양예신 앞에 있던 찻잔을 잡은 한빈의 손이 허공을 수놓았다.
사삭.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찻잔에서 떨어져 나간 물방울을 다시 찻잔에 담았다.
그 모습에 양예신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의 한 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수법이었다.
사천당가와 대결을 펼치던 객잔에서 푸른 무복의 도인이 보여 줬던 한 수.
양예신은 자리에 일어선 채 넋을 잃고 한빈을 바라봤다.
저게 하북제일의 겁쟁이라고?
자신이 이제까지 알던 한빈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챈 양예신은 눈도 깜빡일 수 없었다.
눈은 깜빡이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만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가슴속에 싹튼 희망 때문이었다.
그때 한빈은 찻잔을 그의 앞에 내려놨다.
탁.
힘껏 내려놨는데도 찻잔의 물은 전혀 튀지 않았다.
한빈은 찻잔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경지를 살짝 보여 준 것이었다.
한빈이 이렇게 무공을 보여 준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일은 자신과 양예신 간의 거래여야 했다.
거래라는 것은 신뢰가 기본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보내온 미온적인 태도에서는 신뢰를 느낄 수 없었다.
한빈은 지금 거래의 초석을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하남정가와 비슷한 수법에 당했다면?
이번 일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한빈이 물었다.
“이제 준비되셨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