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천수장 (9)
그 모습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이익을 나누자는 것은 단순히 비급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
황보만청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한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급만이 아니라 이후 파생될 모든 이익을 공유하자는 것이지요.”
파생될 이익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추상적인 의미였다.
한빈이 해맑게 웃자, 황보만청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문의 보물을 찾은 것까지는 좋지만, 뭔가 미끼를 물었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이제 완벽하게 어둠이 산자락에 깔린 상태.
오늘따라 유난히 별이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황보만청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의 시선은 흩어진 천궁의 조각을 향했다.
남은 상자 하나만 빼고는 이제 현철 조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빈은 침을 삼켰다.
용의 무복을 입은 이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만, 등에는 천궁을 짊어지고 있었다.
천궁의 쓰임새는 남은 상자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하늘을 보던 황보만청이 시선을 돌리자 한빈이 마지막 상자를 들었다.
그 상자는 이전의 상자 두 개를 합쳐 놓은 듯한 크기였다.
한빈은 윗부분을 잡고 살짝 힘을 주었다.
툭.
그때 묘한 소리가 상자 사이에서 들렸다.
뭐지?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를 바라봤다.
이전과는 다르게 상자가 굳게 닫혀 있었다.
거기에 묘한 냄새까지 흘러나왔다.
뭐, 익숙한 냄새였다.
한빈은 재빨리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는 후각에 집중하며 상자를 살폈다.
한빈은 조용히 상자를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지금 상자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다름 아닌 황산의 냄새였다.
거기에 살짝 가죽 타는 냄새에 종이 타는 냄새까지 겹쳐서 흘러나왔다.
힘으로 열려 하면 황산이 쏟아져 내용물을 손상시키는 장치가 분명했다.
더는 내용물을 훼손시킬 수 없었다.
한빈은 저 안에 든 물건이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빈은 팔짱을 풀고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한빈의 눈에 조그마한 상자 위쪽에 있는 구멍이 들어왔다.
열쇠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작은 구멍이었다.
그러나 한빈에게는 왠지 그 구멍의 크기가 익숙했다.
저 정도의 작은 구멍에 들어갈 열쇠라면…….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목걸이를 만졌다.
한빈이 만지는 목걸이의 끝에는 금구슬이 달려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빈은 결심한 듯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황보만청이 물었다.
“내가 도울 것은 없겠는가?”
“괜찮습니다. 다만, 마지막 상자는 억지로 열려 하면 내용물이 훼손될 것 같습니다, 어르신.”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아무래도 여기에서 명확하게 정리를 해야 할 듯싶습니다.”
“정리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까 말한 그 계약서 말입니다.”
“흠, 앞으로 파생될 이익을 모두 나누자고 하지 않았나?”
황보만청은 표정을 숨기며 물었다.
그 표정 뒤에는 당연히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한빈이 말한 내용은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한빈은 그가 숨긴 감정을 다 안다는 듯 사람 좋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건 없이 여기서 딱 둘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두 개의 상자는 어르신이 가지고 가시고, 남은 상자는 제가 취하겠습니다.”
“흠, 그래도 되겠나?”
황보만청은 한빈이 들고 있는 상자를 다시 확인했다.
분명 황산의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열다가 훼손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벌써 상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누가 봐도 한빈이 손해 보는 장사였다.
“뭐, 어르신만 양해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이 은혜는 꼭 보답하겠네.”
“은혜라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한빈은 손을 내저었다. 한빈은 입가에 염화미소를 머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손해 보는 일을 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하루아침에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식보다도 비현실적인 일이 한빈이 손해 본다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의 이익은 없었다.
옆을 힐끔 보니 청화도 설화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동행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청화 역시 한빈의 성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뭐, 은혜라고 생각하시면 못 쓰게 된 천궁의 조각을 제게 주시면 됩니다.”
“아, 천궁의 조각이라…….”
“뭐, 싫으시면 할 수 없고요. 이렇게 산산조각 난 바둑판까지 욕심나신다면 저도 다시 생각…….”
한빈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황보만청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네. 그리하도록 하지.”
황보만청의 대답에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누가 보면 당연히 줘야 할 용돈을 받은 아이의 표정이었다.
뭐, 표정을 보면 이익을 본 것은 황보만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이 준 두 개의 상자에는 전설로만 내려오던 가문의 비기가 담겨 있었다.
진짜 가문의 비기와 보검인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이걸 손에 넣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상자에 든 비급과 도면을 수습하고 난 황보만청이 뭔가 생각났는지 눈빛을 바꿨다.
“그런데 말이네.”
“말씀하시지요,”
“이 도면에 있는 구지검을 구현할 대장장이가 강북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답했다.
“있습니다.”
“그런 대장장이가 있다고? 대체 어디에 있는가?”
황보만청이 다급히 묻자 한빈이 답했다.
“대대로 명장의 칭호를 받는 대장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빈은 제법 자세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한빈이 설명한 곳은 정철민의 대장간이었다.
월아를 만든 명장이자, 물심양면으로 한빈을 돕는 조력자였다.
구지검의 도면이라면 흔쾌히 받아 줄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작업보다는 창의적인 물건을 만들고 싶어 하는 그였으니 말이다.
거기에 정철민을 추천한 것에는 한 가지 계산이 더 깔려 있었다.
한빈은 구지검을 조금 간소화해서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에게 보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미리 구지검을 만들어 보면 한빈의 의뢰는 더욱 수월할 테니 일석이조였다.
한빈에게 설명을 듣고 난 황보만청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지금 가 봐야겠네.”
“어르신, 늦었는데 쉬고 가시죠.”
“아닐세. 하루라도 빨리 구지검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네.”
말을 마친 황보만청은 다급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팡!
어찌나 급한지 파공성을 내며 달려가는 그 때문에, 놀란 산새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퍼드득.
황보만청이 떠나자 한빈은 일렁이는 모닥불에 비친 주변을 살폈다.
한바탕 폭풍이 쓸고 지나간 것처럼 주변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과 황보만청이 비무를 펼친 자리였다.
그냥 비무가 아니라 바닥을 지나는 수맥까지 터뜨린 격렬한 대결이었다.
거기에 현철로 만든 천궁까지 분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옆을 보면 한빈이 내놓은 구멍으로 물줄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조르륵.
한빈이 만든 흔적은 하나의 작은 물줄기가 되어 산자락에 졸졸 흘렀다.
힐끔 옆을 보니 잠에서 깬 청살모가 새로 만든 개울에 목을 축이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빈은 두 팔을 머리 뒤로 깍지 끼며 자리에 누웠다.
한참 동안 밤하늘을 바라보던 한빈이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겠네요, 공자님.”
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한빈의 말을 받았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청화가 눈치껏 모닥불 주변에 자리를 마련했다.
한빈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천궁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아무렇게나 쓸어 담아도 될 것을, 순서대로 천천히 나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왜 그렇게 힘들게 진열하세요? 그냥 주머니에 넣으시면…….”
“원래대로 맞춰야 하니까, 순서대로 놔야지.”
“원래대로 맞추다니요?”
“이렇게 말이야.”
한빈이 토막 난 천궁의 조각을 맞췄다.
철컥.
상쾌한 소리와 함께 언제 반 토막 났느냐는 듯 천궁 조각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입을 벌렸다.
“그거 원래대로 복구가 가능한 거였나요? 그런데 그런 방법을 공자님은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그래, 대장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무슨 말이요?”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라고 말이야.”
“아.”
설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놀란 표정에 옆에 있던 청화가 재빨리 당과 꼬치 하나를 꺼냈다.
“이거 제가 숨겨 둔 거예요. 드세요, 언니.”
“앗, 고마워.”
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천궁을 원래 상태로 돌려놓으며 비급과 도면을 떠올렸다.
사실 황보만청에게 줬다고는 하지만, 한빈에게는 조금도 필요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 도면과 황룡사십팔수는 이미 한빈의 머릿속에 모두 들어 있으니 말이다.
설화와 청화는 모닥불이 피워 내는 온기 때문인지 일찍 잠이 들었다.
한빈은 재빨리 마지막 상자를 꺼냈다.
그러고는 목에 걸린 금 구슬을 열었다.
안에는 조그만 열쇠, 황금시(黃金匙)가 있었다.
한빈은 황금시를 마지막 상자의 위쪽에 꽂았다,
순간 상자의 윗부분이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끼익.
마지막 상자는 아래에서 위로 여는 것이 아닌, 돌려서 열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딱 맞는 열쇠가 있어야만 열 수 있는 구조였다.
한빈은 재미있다는 듯 혼잣말을 뱉었다.
“운명인가…….”
이것은 진심이었다.
어디에 쓸지 모르는 황금시로 황보세가의 보물을 연다라?
운명이 아니라면 운이 좋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상자가 완벽하게 열리자 그제야 안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쪽에는 가죽이 둘둘 말려 있었다.
얼핏 보니 위쪽에서 떨어진 황산 덕분에 두루마리는 구멍이 나 있었다.
한빈은 가죽을 펴 보았다.
가죽 위에는 여러 개의 선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것은 중원을 그린 지도였다.
군사용 지도는 아니었지만, 일반 지도라고 하기보다는 너무 상세했다.
하지만, 지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왜 이 상자에 지도를 남겨 두었을까?
한빈은 지도가 있다는 것은 특정 장소를 알려 주기 위함일 것이라 생각했다.
한빈은 지도에 더욱 집중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입을 벌렸다.
지도에는 구멍이 두 개 나 있었다.
그것은 상자에서 떨어진 황산 때문에 훼손된 부분인 듯 보였다.
아마도 훼손된 두 부분 중에 하나가 지도가 가리키는 부분일 것이었다.
한빈은 구멍이 난 부분이 어디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모닥불에 비춰 봤다.
지도를 확인한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뜻 모를 탄성에 설화가 눈을 비볐다.
“공자님, 저 부르셨어요?”
“아니다.”
한빈은 손을 내저으며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한빈이 바라보는 곳에는 각각 하북팽가와 사천당가가 있었다.
바로 둘이 지도에서 훼손된 부분이었다.
한빈은 추측을 바꿔야 했다.
지도에서 가리키는 부분이 하북팽가와 사천당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북팽가의 맹호비고의 지하에서 한빈은 꽤 많은 기연을 얻었으니 말이다.
* * *
다음 날 점심이 되어서야 한빈 일행은 천수장이 보이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천수장으로 향하는 길을 보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천수장으로 가는 일이 맞나?”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해요, 공자님.”
설화도 고개를 갸웃하며 천수장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봤다.
그들이 있는 곳은 천수장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
초입에서부터 천수장이 있는 곳은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전에는 못 보던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극양지기 때문에 모두 떠난 것이 몇 년 전.
아직은 이곳으로 이사 오는 이는 없었다.
한빈이 임무를 위해 장운현으로 떠날 때에도 텅텅 비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묘하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