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천수장 (8)
옆에서 지켜보던 황보만청이 말했다.
“이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어르신, 알아보시는군요.”
한빈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은 황보만청과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천궁은 껍데기를 다 벗어 내고 보통 바둑판의 크기로 변해 있었다.
그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반 바둑판과는 묘하게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것이 아니라 선이 살짝 틀어져 있던 것.
한빈과 황보만청은 이 바둑판 모양을 어디에서 봤을까?
바로 한빈과 황보만청이 같이 문제를 풀어낸 비밀 동굴이었다.
바닥 전체가 바둑판이었던 그곳.
시선을 교환한 황보만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나, 둘, 셋!”
셋을 외친 한빈이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눌렀다.
황보만청도 같이 바둑판을 눌렀다.
한빈이 눌렀던 곳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탁, 탁.
이전에 비동에서 문제를 풀 때처럼 그들의 손가락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직였다.
그 당시에는 돌을 사용했다면, 지금은 손가락으로 직접 바둑판을 찍는 것이 차이였다.
탁, 탁.
계속된 소리가 어느 순간 멈췄다. 이어서 바둑판이 소리를 냈다.
끼익!
하지만, 더는 갈라지지는 않았다.
궤짝이 열리듯 바둑판이 열렸다.
한빈과 황보만청은 열린 뚜껑의 위쪽을 봤다.
그곳에는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불계(不計)!
바둑판에서 계산할 필요 없이 한쪽이 우세할 때 불계승이라는 말을 쓴다.
그 단어에서 승만 빠진 단어였다.
이번 대국에서 흑과 백은 없었지만, 분명 승자는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승자는 아마도…….
한빈은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황보만청도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한빈에게 손짓했다.
마저 진행하라는 신호였다.
황보만청의 신호를 받은 한빈은 뚜껑이 열린 바둑판의 안쪽을 살폈다.
그곳에는 네모난 모양의 상자 세 개가 있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기다란 상자 한 개와 정사각형의 작은 상자 두 개였다.
한빈은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한빈은 먼저 작은 상자를 열었다.
손가락을 튕기듯 상자의 윗부분에 힘을 주자,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
스르륵.
열린 상자에는 조그마한 책자가 들어 있었다.
한빈은 그 제목을 나지막이 읽었다.
“구지검(九枝劍)이라…….”
말끝을 흐린 한빈이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황보만청이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한빈이 물었다.
“구지검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바가 있습니까?”
“내 조부에게 들었던 이름이네. 아마 백 년도 더 된 일인 것 같네만……. 가문의 누군가가 뒤뜰을 거닐다가 신선을 만났다고 하네. 그때 받은 것이 구지검이라고 들었네.”
“구지라면, 아홉 개의 가지가 아닙니까? 저도 비슷한 검법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변화가 무쌍해서 검날이 아홉 개로 보인다는 검이죠. 구화구검이라는 이름으로 강호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검 말입니다.”
“자네가 말한 그것이 구지검이라네.”
“그것이 황보세가의 검법이었습니까?”
“뭐, 변화가 무쌍해서 여러 개의 검날이 상대의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구지검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검법이 아니라네.”
“검법이 아니라고요? 그럼…….”
“검법이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검 자체가 보검이라 들었네.”
“아무리 보검이라도 초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황보만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초식이 없이 검으로만 그런 변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상대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과도 같았다.
가문의 일은 가문의 사람이 제일 많이 아는 법.
다른 가문 사람이 그 가문의 검과 초식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검의 신통력으로 그런 변화를 만들어 냈다고 조부께서 말씀하셨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전설일 뿐이라는 거지.”
“그럼 신선에게 받은 검은 가문에 남아 있을 것이 아닙니까?”
“남아 있지 않고 말로만 전해 내려오니 전설이지. 어서 확인해 보게.”
“이 책자는 어르신께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한빈은 조심스럽게 구지검이라 적힌 책자를 들어 황보만청에게 건넸다.
책자를 받은 황보만청은 감회에 젖은 듯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야 황보만청은 책자를 넘겼다.
조심스럽게 낡은 책장을 넘기던 황보만청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대체…….”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이걸 잘 보게.”
황보만청이 책을 펴서 한빈에게 건넸다.
책을 받은 한빈은 재빨리 내용을 확인했다.
고개를 갸웃한 한빈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모든 내용을 확인했다.
한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황보만청에게 말했다.
“이건 비급이 아니라 도면인데요.”
분명 도면이었다.
하지만, 일반 도면과는 달랐다.
글자와 숫자가 적혀 있긴 했지만, 손상된 것인지 암호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황보만청이 황당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보만청이 한숨을 쉬었다.
“휴……. 그러게 말일세. 도면이긴 하지. 그런데 마치 암호 같아서 나는 알아볼 수 없겠군.”
황보만청은 아쉬운 듯 고개를 저었다.
한빈이 그를 위로하듯 말했다.
“다른 상자에 구지검의 비밀을 풀 단서가 남아 있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럼 나머지도 열어 보세.”
“네, 마저 열겠습니다.”
한빈이 빙긋 웃으며 다른 상자를 꺼냈다.
이번 상자도 힘을 들이지 않고 열 수 있었다.
스르륵.
열린 상자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책자가 놓여 있었다.
황룡사십팔수(黃龍四十八手).
책자를 본 황보만청의 눈이 커졌다.
그는 이번에는 한빈에게 묻지도 않고 덥석 책자를 잡았다.
한빈도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았다.
황룡사십팔수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황보세가 최고의 검법은 황룡이십사수였다.
예전에는 황룡사십팔수였다는 것은 온 강호가 다 아는 것이었다.
본래 황룡사십팔수였던 초식이 대대로 내려오며 다듬어져, 현재의 황룡이십사수가 탄생했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다듬고 다듬은 검법이 원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원본은 사라진 지 오래이기에, 복원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한참을 보던 황보만청이 한빈에게 책자를 건넸다.
“자네도 한번 보게나.”
“네, 알겠습니다.”
한빈은 활짝 웃으며 책자를 받았다.
그때였다.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용안으로 용린검법의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오호단문도의 깨달음까지 구 할 남았습니다.]
뭐지?
한빈은 황당함에 시선을 돌려 책자를 확인했다.
황룡사십팔수에 용린검법의 흔적이 남은 것은 맞았다.
진기를 빨리 돌려 동작의 민첩함을 키우는 기본 초식은 전광석화를 닮아 있었으며, 기를 피워 내는 동작은 일촉즉발을 닮아 있었다.
한빈에게는 필요 없는 비급이었지만, 일단 끝까지 정독했다.
곧 한빈은 왜 이 책자를 잡자 오호단문도의 깨달음이라는 문구가 떴는지를 알 수 있었다.
비급 속의 황룡검법이 상대하는 가상의 상대는 과연 무엇일까?
바로 오호단문도였다.
십대세가끼리 어울리며 서로 교류를 해 왔기에 이곳에서 오호단문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던 것이었다.
한빈은 눈을 감고 황룡사십팔수의 움직임을 그려 봤다.
용과 호랑이가 뛰놀고 있었다.
황룡사십팔수 속의 움직임에서는 분명 용이 호랑이를 꺾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상상으로 그리던 그림이 묘하게 구체화되었다.
상상 속의 용과 호랑이가 아닌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용의 무늬가 새겨진 무복을 입은 무사와 호랑이의 무늬가 새겨진 무복을 입은 무사가 대결하고 있었다.
날렵하게 잘빠진 검과 거도가 맞붙는다.
분명 팽가의 도였다.
그리고 용의 무복을 입은 자가 쓰는 검은…….
바로 구지검이었다.
한빈은 조금 더 눈을 크게 떴다.
실제 눈을 크게 뜬 것은 아니지만, 상상 속의 검이 확대되어 보였다.
한빈은 구지검의 모양을 머릿속에 자세하게 그려 보았다.
‘아, 그랬구나.’
한빈은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구지검의 도면이 품은 비밀을 푼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오호단문도의 본래 움직임을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한 것도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한빈이 눈을 떴을 때는 황룡사십팔수의 끝부분이었다.
비급을 모두 확인한 것이다.
그때 다시 문구가 떴다.
[오호단문도의 깨달음까지 육 할 남았습니다.]
[필요한 초식의 깨달음은 책자뿐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실마리를 끝으로 떠오르던 글귀는 멈췄다.
한빈의 표정을 본 황보만청이 물었다.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초식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하하.”
“어르신, 이것을 다 읽고 나니 앞의 도면도 어떻게 해독해야 할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
한빈은 대답 대신 작게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물었다.
“왜 그러는가? 계약서가 필요한 것인가?”
“아닙니다.”
한빈이 막 고개를 흔들었을 때 설화는 벌써 앞에 와서 보따리를 풀었다.
설화가 꺼낸 것은 작은 부싯돌이었다.
설화는 주변의 잔가지와 나뭇잎을 모아 불을 피웠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물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네, 그러시지요.”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도 구분이 있는 건가? 어찌 그 소리를 구분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군.”
“하하, 이 정도의 소리는 당연히 구분이 되죠, 어르신. 예를 들어…….”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딱!
“이건 지필묵을 가져오라는 것이고요.”
딱!
“이건 식사 준비를 하라는 것이고…….”
한빈의 설명이 이어지자 황보만청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설화를 힐끔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제 시녀입니다.”
“하하, 누가 뭐랬나?”
“지금 탐내시지 않았습니까?”
“아니네, 신기해서 그러지. 소리를 구분해서 내는 자네도 그렇고, 그걸 알아듣는 저 아이도 신기하고……. 어쨌든 좋은 구경 했네. 그럼 도면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 주게.”
“뭐 별거 없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로 책자를 가져갔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외쳤다.
“대체 지금 무엇을……!”
“자세히 보십시오.”
한빈이 모닥불에 비친 구지검의 책자를 가리켰다.
황보만청은 고개를 갸웃했다.
뒤쪽에 일렁이는 모닥불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알아볼 수 없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책자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불꽃을 보지 마시고 그림과 글자를 자세히 보시죠.”
황보만청도 그제야 한빈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한참을 보던 황보만청이 입을 벌렸다.
한빈이 무엇을 자세히 보라고 하는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모닥불이 내는 불빛 때문에 뒤에 있던 내용이 겹쳐 보였다.
뒤쪽의 내용이 겹쳐지자 하나의 온전한 도면이 완성된 것이었다.
한빈은 책장을 넘기며 구지검의 도면을 하나하나 확인시켜 줬다.
모든 내용을 확인한 황보만청은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책자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구지검의 도면과 황룡사십팔수의 비급은 어르신이 보관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원하는 게 뭔가? 계약서에는 분명히 공평하게 나누자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걸 나에게 다 준다는 것인가?”
“아직 하나가 남지 않았습니까?”
“하나가 남긴 했지…….”
황보만청은 말끝을 흐리며 남은 상자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