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천수장 (7)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청화가 설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설화는 말없이 한빈과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둘의 모습만 보면 특이한 점은 없었다.
한빈과 황보만청은 정지한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가운데로 드리운 석양은 한 폭의 수묵화에 붉은 인장을 찍어 놓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묘했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황보만청의 바둑판.
황보만청도 역시 자신의 병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병기는 반쪽으로 분리된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애병을 바라보는 황보만청의 눈에는 습기가 차올랐다.
그들의 표정을 살피던 설화가 청화를 보며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조용히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청화야, 우리 공자님이 항상 말씀하셨지.”
“뭐라고요?”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불구경이요?”
“저 정도면 언제든 불이 나도 이상하지 않지. 안 그러니?”
“아.”
청화가 입을 벌렸다.
설화와 청화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탕.
묵직한 소리가 황보만청 쪽에서 울렸다.
덜렁거리던 바둑판의 반쪽이 땅에 떨어진 것이다.
그 소리에 한빈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
황보만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한빈은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바둑판의 이름이 뭐였습니까?”
“천궁(天宮)이었다네, 조금 전까지는 말이야.”
“아, 천궁이었군요.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래, 좋은 이름이었지…….”
“그리고 좋은 무기였습니다.”
“내 애병과 작별을 고하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네만은…….”
말끝을 흐린 황보만청이 자리에 쪼그려 앉아 반쪽만 남은 바둑판을 살폈다.
사실 황보만청은 지금의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월아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기에, 이전처럼 난공불락의 초식으로 맞섰다.
그런데 자신의 천궁이 반 토막이 난 것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쳐 부러졌다면 이해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과 검이 아닌 거대한 바둑판과 검이 부딪친 상황.
검이 반 토막이 나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의 바둑판, 즉 천궁이 반 토막이 났다.
문제는 천궁이 보통 무기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천궁과 천운이 만나면 황보세가의 무학이 꽃을 피우리라는 것이 비급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황보만청은 떨어진 반쪽을 붙이기 위해 이리저리 맞춰 봤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한빈도 상황이 이리될 줄은 몰랐었다.
융합편, 그중에서도 진룡파혼검의 선(線)의 초식을 사용해서 천궁에 맞섰다.
그런데 이 초식은 진룡파혼검의 기운을 말 그대로 선에 집중시켰다.
더 놀라운 것은 무지막지한 크기의 천궁을 베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다는 점이었다.
베었다는 느낌보다는 부딪치는 동시에 천궁이 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파혼의 힘으로 상대를 눌렀다기보다는 천궁이 알아서 굴복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사실 한빈도 지금의 상황이 얼떨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쁨도 잠시, 지금은 수습이 먼저였다.
황보만청에게 천궁이 어떤 의미인지, 한빈은 이번 비무를 통해서 알아냈다.
천궁은 황보만청의 희망 그 자체.
한빈은 황보만청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뭔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전생의 기억이었다.
황보세가에서 특이한 검법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일파만파 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검법의 실체를 확인한 이는 없었다.
설마…….
의문을 떠올린 한빈이 반쪽 난 천궁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천궁의 재질은 현철.
현철은 은색과 묵색이 섞인 듯한 묘한 색을 띠고 있었다.
천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현철과는 다른 것이 천궁의 내부에서 언뜻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한빈이 입 모양으로 외쳤다.
“지필묵!”
상황을 주시하던 설화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상황에서 지필묵이라는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빈의 지시.
설화는 짐 속에서 재빨리 지필묵을 챙겼다.
지필묵을 꺼내자마자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려와 붓을 낚아챘다.
묵을 갈아 넣은 대나무 통에 살짝 붓끝을 담근 뒤 일필휘지로 적어 나갔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어느새 사라졌다.
한빈이 다시 나타난 곳은 망연자실 천궁을 바라보고 있는 황보만청의 옆.
한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르신, 그래도 다행입니다.”
“다행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잘 보십시오. 옆면으로 쪼개지는 바람에 선들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한빈이 천궁의 위쪽을 가리켰다.
한빈의 말대로 청궁의 위쪽에 있는 선들은 멀쩡했다.
바둑판의 형태는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위로가 될 수는 없었다.
“자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인가?”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뭘 생각하란 말인가?”
“천궁은 저도 처음 보는 형태의 병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형태를 가진 병기의 재질이 현철입니다.”
“그렇지. 현철이 이렇게 쪼개질 줄은…….”
“쪼개진 걸까요? 아니면 열린 것일까요?”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
황보만청은 쪼개진 천궁과 한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망가진 천궁을 한빈에게 맡길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뭐, 잘만 하면 제가 고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흠.”
황보만청은 한빈을 바라보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고민도 잠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네가 책임지게나.”
“어르신의 말씀대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황보만청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웃음으로 시선을 받았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책임에는 힘이 따르는 법이라 배웠습니다.”
“그거 반대 아닌가?”
“뭐, 그게 그거죠.”
“그런데 어떻게 책임을 질 텐가?”
“뭐, 제가 책임지는 방식은 아시지 않습니까?”
“자네의 방식이라?”
“여기 있습니다.”
한빈은 미리 적어 놓은 계약서를 황보만청에게 건넸다.
황보만청은 반사적으로 계약서를 받았다.
그는 단숨에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계약서에는 책임을 어떻게 질지에 대한 내용보다는, 이익을 어떻게 나눌지가 적혀 있었다.
반쪽으로 갈라진 천궁에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황보만청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할 때, 한빈은 쓱 붓을 건넸다.
“여기 서명하시면 됩니다. 제 서명은 미리 해 놨습니다.”
“…….”
“뭐, 싫으시면 말고요. 솔직히 비무하다가 무기가 상했다고 상대 탓을 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계약서를 내민 것은 어르신을 도와드리기 위함입니다.”
한빈은 건네려는 붓을 도로 챙기고는 황보만청이 들고 있는 계약서마저 뺏으려 했다.
순간 황보만청이 재빨리 계약서를 숨기는 동시에 한빈이 다시 가져간 붓을 낚아챘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그냥 가져간 것이 아닌, 황보세가 특유의 금나수인 황룡조오의 수법까지 쓰면서 말이다.
한빈은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일단 표정을 보니 넘어온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보만청은 계약서 두 장에 바로 서명을 하더니 그중 하나를 한빈에게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한빈을 바라봤다.
“이제 서명이 끝났으니 이 반쪽 난 천궁으로 무엇을 할지 설명해 보게.”
“뭐, 설명보다는 보여 드리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뭘 보여 준다는 것인가?”
“천궁을 맡기기로 하셨으니 잠시만 물러나 계시죠.”
“…….”
황보만청은 아무 말 없이 뒤로 물러났다.
팔짱을 낀 채 바라보는 그는, 어찌 보면 자포자기한 것 같았다.
한빈은 매의 눈으로 반 토막 난 천궁의 조각 중 윗부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쿵.
한빈이 천궁을 돌렸다.
쿵.
다시 다른 면이 위쪽으로 올라오게 돌렸다.
한빈은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한 후에야 멈췄다.
한빈은 천궁을 바닥에 세운 채 자리에서 일어나 반보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월아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장작을 패기 위해 준비하는 나무꾼의 모습과도 같았다.
한빈은 이번에도 똑같이 진룡파혼검 중 선의 초식을 담아 내리쳤다.
황보만청은 한빈의 동작에 입을 크게 벌렸다.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한빈을 믿기로 했다.
자신의 둘째 아들과 자신의 가문을 구한 것이 한빈이 아니던가?
그 덕분에 가문의 보물인 천궁도 얻게 되었다.
그때 황보만청의 눈이 커졌다.
일도양단의 기세로 천궁의 반쪽을 내리칠 것 같았던 한빈의 월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물론 이것은 황보만청의 착각이었다.
한빈은 내려 긋던 월아의 속도를 조절했다.
진룡파혼검 중 선의 초식은 천궁을 파괴했던 것이 아니었다.
천궁을 연 것이었다.
왜 궁(宮)이란 표현을 썼겠는가?
그것은 이 바둑판 자체가 집이라는 이야기였다.
집이란 누군가 살거나, 어떤 물건이 보관되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룡파혼검의 초식은 바로 천궁을 여는 열쇠.
물론 열쇠 구멍과 정확히 맞아야 발동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현철과 다른 재질을 보고는 그것이 바로 열쇠 구멍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한빈의 월아가 점점 천궁의 반쪽과 가까워졌다.
월아가 향한 곳은 천궁에서 붉은 선이 보이는 곳이었다.
지금 한빈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정확도였다.
한빈은 최대한 정확하게 붉은 선에 진룡파혼검의 기운을 불어 넣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둘.
셋.
툭!
한빈의 월아가 천궁의 반쪽에 닿았다.
순간 반쪽짜리 천궁이 다시 반으로 갈라졌다.
황보만청이 입을 벌렸다.
“아.”
그것은 안타까움의 탄성이 아니었다.
황보만청은 진정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 천궁이 반 토막이 날 때는 못 봤지만, 지금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천궁은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때가 되면 들어오고 나가는 밀물과 썰물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열리고 있던 것이다.
황보만청은 재빨리 한빈에게 다가갔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그럼 자네가 열쇠라는 뜻인가?”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아까 천궁이 반 토막으로 갈라질 때, 저는 베었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
“그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 적절히 섞인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만큼 이 상황을 설명하기 쉬운 비유는 없었다.
한빈은 월아를 바라봤다.
“그럼 이제 다 연 것인가?”
“아직입니다.”
“흠.”
“다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어르신.”
“내가 해 보면 안 되겠나?”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잘 열던 열쇠를 놔두고 다른 열쇠를 사용하는 것은…….”
“알았네, 알았어.”
황보만청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비급의 마지막 대목을 다시 떠올렸다.
‘천궁과 천운이 만나면 황보세가가 만개하리니…….’
비급에 적힌 알 수 없는 문구가 이제야 해석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천운은?
생각할 것도 없이 한빈이었다.
한빈이 다시 월아로 사 분의 일 토막짜리 천궁을 내리쳤다.
쿵.
다시 천궁이 갈라졌다.
쿵, 쿵.
그 후에도 한빈은 같은 동작을 몇 번씩 반복했다.
한빈은 슬쩍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심(心)의 구결은?
뭐, 텅텅 비어 있었다.
이제는 심의 구결을 보충하기 위해 잠시 쉬어 가야 할 때였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에 열어야 할 부분을 살피고 있는데 그 부분이 보이지가 않았다.
한빈은 다급하게 남은 천궁의 조각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더 얇은 붉은 선이 바둑판의 선을 만들고 있었다.
큰 바둑판을 잘라 내니 작은 바둑판이 나타나는 모양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