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천수장 (4)
홍칠개의 말에 어린 거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할아버지 제자 없잖아요. 그래서 무림 사람들이 무제자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요?”
“아니란다. 최근에 제자가 생겼단다, 얘야.”
홍칠개는 어린 거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 거지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제가 개방도가 아니라서 소문에 어두워서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괜찮단다, 얘야…….”
홍칠개를 흐뭇한 눈빛으로 어린 거지를 바라봤다.
개방도는 아니지만, 어린 거지 중에는 가장 눈이 맑은 아이였다.
아직은 이름도 물어보지 않은 아이.
홍칠개는 거지의 아이에게 말했다.
“개방에 들어오는 건 어떻겠느냐?”
“개방이요?”
“그래, 언제까지 다리 밑에서 또래 아이들과 지낼 수는 없는 게 아니더냐?”
“그래도 지금이 편한걸요.”
“무릇 거지란 꿈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꿈이요?”
“이제는 개방에 들어와 중원을 호령할 꿈을 키우는 게 맞다고 본다.”
“그럼 할아버지기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아니란다. 사부로 모실 사람은 따로 정해 주겠다.”
홍칠개는 머릿속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생각을 마친 홍칠개는 쓰러져 있는 장오의 허리 부근을 잡았다.
쓰윽.
그 모습에 홍칠개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했다.
“와, 저거 봐. 마치 종이를 들듯 저 큰 덩치를 드네.”
“저 사람도 고수인가 봐.”
“그냥 고수가 아니라 개방도야.”
“개방이라고?”
“저기 허리에 매듭 봐 봐.”
“와, 매듭이 셀 수도 없네.”
홍칠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객잔 앞을 빠져나왔다.
거지 아이가 물었다.
“그 아저씨는 왜 데려가요?”
“아저씨가 아니라 네 사제란다.”
“사제요?”
“뭐, 동생하고 비슷한 거다.”
“헉, 저 아저씨가 제 동생이라고요?”
“그래, 앞으로 그렇게 될 거란다.”
씩 웃은 홍칠개는 장오를 들쳐 멨다.
휙.
그러지 않아도 점혈을 당해 움직일 수 없는 장오는 눈을 까뒤집고 홍칠개의 어깨 위에서 기절했다.
장오를 어깨에 들쳐 멘 홍칠개는 아무렇지 않게 휘적휘적 앞장서기 시작했다.
어린 거지는 문득 장오의 등 뒤에 꽂혀 있던 쪽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기세를 뿜어내며 걷는 홍칠개의 뒷모습에 주눅이 들어 물을 수가 없었다.
앞서 나가는 홍칠개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맺혔다.
제자의 부탁은 항상 홍칠개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장오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라는 것이 한빈이 덧붙인 조건이었다.
사람을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개방에 입방시키면 그걸로 끝이었다.
그러고는 적당한 놈에게 사람 구실 하도록 만들라고 하면 만사형통.
뭐, 누구한테까지 맡길지도 정했다.
그놈은 펄펄 뛰겠지만 말이다.
홍칠개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홍칠개는 한빈이 이렇게 쉬운 부탁을 했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저잣거리를 빠져나온 홍칠개는 아무렇지 않게 개울에 장오를 던졌다.
첨벙.
거지 아이가 물었다.
“죽지 않을까요?”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얘야.”
홍칠개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 * *
신창양가와 사천당가를 뒤로한 채 천수장으로 향하는 한빈의 옆에서, 설화가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뭔가 미안한 표정의 설화를 본 한빈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설화야.”
“아니에요, 공자님.”
“혹시 나한테 짱돌 날린 것 때문에 그래?”
“아, 그게…….”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아니라…….”
“그럼 뭐 때문에 표정이 그런데?”
“공자님이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혹시 산적 얘기하는 거야?”
“네, 공자님이 죽이라고 하셨는데, 이상하게 죽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뒀어요. 그런데, 그게 공자님의 명을 어긴 것 같기도 하고…….”
설화는 어물거리며 미안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설화야.”
“네, 공자님.”
“이제 안 죽여도 돼.”
“네?”
“나하고 있을 때는 사람 안 죽여도 된다고. 내가 명령을 내려도 상대의 목숨은 설화 네가 판단해서 결정하면 된다. 그게 앞으로의 규칙이다.”
“헤헤, 정말로요?”
“그래,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건 청화한테도 해당되니 그렇게 알고 있어.”
“…….”
청화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너희들은 출신과는 관계없이 나와 있을 때까지는 내 시녀니까 그렇게 알아.”
“공자님, 감사해요. 저도 죄송해요.”
청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설화와 마찬가지로 청화 역시 정말 미안한 표정이다.
그 모습에 설화가 청화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뭐가 죄송해, 청화야?”
“그게 조금 설명하기가…….”
청화가 말을 얼버무리자 설화가 물었다.
“혹시 너도 공자님 지시를 어긴 거야? 죽이라고 했는데 반만 죽이고 그랬던 거야?”
“그게 아니고…….”
청화가 다시 얼버무리자 한빈이 나섰다.
“설화야.”
“네, 공자님.”
“남들이 들으면 내가 살수의 수장인 줄 알겠다. 뭐가 죽이라고 했는데 반만 죽여?”
“헤헤, 그게 아니고요. 청화가 자꾸 말을 안 해서요. 무슨 죄송할 짓을 했는지는 저도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설화가 너스레를 떨자,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아까 음식 홈쳐 먹은 거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딱 그건데.”
“네, 맞아요.”
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자신의 죄를 정확히 짚어 내자, 청화는 마치 면죄부를 얻은 것처럼 얼굴색이 돌아왔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그것도 괜찮아. 어차피 그 보상은 다 하고 왔으니까?”
“보상이요?”
“사천당가의 물건도 찾아 줬고 가게 주인이 입은 피해도 다 보상해 줬으니 청화가 미안해할 일은 없다.”
“정말로요? 설마 공자님이…….”
말끝을 흐리는 설화의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우리 설화 많이 컸네.”
“아, 아니에요. 공자님.”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설화를 보며 웃던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청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청화야, 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해야겠다.”
“말씀하세요, 공자님.”
“남들이 있을 때는 가능하면 독은 먹지 말아라. 오해받는다.”
“독이라니요?”
“사천당가의 탁자에 양념 통이 있었지?”
“네, 저 그거 음식에 뿌려서 먹었어요. 진짜 맛있었어요.”
“그 양념 통에 들어 있는 게 독이었다.”
“앗.”
청화는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직까지는 그녀에게 공독지체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한빈이 평생 청화를 돌볼 수도 없는 일이니, 시간이 날 때 공독지체에 관해 아는 바를 설명해 줘야겠다 생각했다.
한빈은 천수장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괜히 마차를 멀리 놓은 듯싶기도 했다.
천수장이 있는 송화산과 마차가 있는 절호곡은 정반대 방향이었다.
앞장서서 가는 한빈을 뒤따라오면서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 설화와 청화.
한빈은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벗 삼아 천천히 걸어갔다.
한빈이 혼잣말을 뱉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공자님, 무릉도원이라니요?”
“이렇게 보면 세상이 평화롭기만 한 것 같아서 말이다.”
“평화롭다고요?”
“그렇잖아. 너희들이나 나나 지금은 아무 걱정이 없지. 뭐, 우리가 있는 하북도 그렇고.”
“헤헤, 그렇죠. 당과가 있는 세상은 아름다운걸요.”
“그래, 꼭 물 위에 떠 있는 백조 같구나.”
“백조요?”
“백조는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지만, 그 아래를 보면 우아함을 지키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치고 있지.”
“그게 무림 같다는 말씀이시죠?”
“뭐, 그렇지.”
“공자님.”
“왜? 설화야.”
“우리는 발버둥 치지 말아요.”
“하하.”
한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설화가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솔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발버둥을 쳐야 할 때였다.
한빈은 시녀 둘과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던 중 한빈이 외쳤다.
“자, 지금부터는 몸 좀 풀자!”
“네?”
설화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설화는 한빈이 몸을 풀자고 하는 뜻을 알았다.
한빈의 발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빈이 외쳤다.
“나를 잡으면 저녁은 너희 마음대로 먹어도 좋다!”
그 말에 설화와 청화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 둘이 떠올린 음식은 각기 달랐다.
설화는 당과, 청화는 독이 발린 토끼구이였다.
토끼구이가 맛있다고 설화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독을 양념 삼아 토끼구이를 뜯는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며, 청화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휙.
한빈은 천천히 달렸다.
천천히라고 하지만, 구걸십팔보라는 걸출한 경신술 덕분인지 벌써 송화산 근처까지 왔다.
아직 소나무가 제 색을 찾지는 않았지만, 송화산의 소나무는 예전처럼 붉은빛은 아니었다.
이제 땅의 기운이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 뒤에서 청화와 설화의 헉헉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공자님. 헉헉.”
“저희 죽을 것 같아요, 헉헉.”
설화와 청화가 오른손을 내밀며 다가왔다.
한빈이 발길을 멈췄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둘은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설화의 얼굴은 그나마 나았지만, 청화는 곧 죽을 것처럼 혈색이 안 좋았다.
한빈이 팔짱을 끼며 그들이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거대한 기가 느껴졌다.
기척을 죽이지 않고 다가오는 것으로 봐서 한빈 일행의 존재도 알고 있는 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기세를 피우고 다가온다라?
설화도 느꼈는지 청화를 뒤로 숨겼다.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정체불명의 고수.
한빈은 상대의 경지를 가늠해 봤다.
그가 피워 낸 기세만 놓고 판단해 보면 화경의 고수가 틀림없었다.
한빈 일행은 멀쩡하지만, 뒤쪽 소나무들은 묘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사각사각.
고수가 내는 기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과연 누굴까?
한빈은 허리에 찬 월아를 확인하고는 다시 전방을 바라봤다.
상대는 이제 점이 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상대는 멈추지 않고 한빈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왔다.
점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사람의 형태임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왔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는 거대한 돌을 짊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살기도 전혀 없었다.
거대한 돌판을 짊어지고 있는 데 비해, 복장은 상당히 화려했다.
돌을 짊어지고 다니는 고수는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거리는 이제 얼굴까지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좁혀졌다.
어라?
한빈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황보…….”
하지만, 한빈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다가온 이의 웃음소리 때문이었다.
“하하하!”
사자후처럼 내지르는 상대의 웃음소리에 설화와 청화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타다닥.
상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한빈의 앞까지 왔다.
그가 몰고 온 흙먼지는 어마어마했다.
그가 멈추자 흙먼지가 앞으로 쏟아졌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흙먼지.
한빈이 씩 웃으며 손바닥을 보였다.
‘진룡파혼장.’
공손세가를 통해 익힌 진룡파혼장을 이렇게 쓸 줄을 몰랐지만, 어쨌든 한빈은 해일처럼 들이닥친 먼지를 걷어 냈다.
먼지가 걷히자 상대의 얼굴이 드러났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그가 한빈에게 말했다.
“잘 지냈는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한빈이 깊숙이 포권했다.
그는 다름 아닌 황보만청이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 알던 황보만청의 기세가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의 눈이 커졌다.
황보만청에게서 진청색 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즉 그냥 구결이 아니라 지급 구결임을 뜻하는 것!
한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