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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30화 (230/621)
  • 230화. 천수장 (2)

    수하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푸른 무복의 도인, 즉 한빈의 뒤를 쫓던 양예신은 힐끔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당기명이 입술을 깨문 채 걷고 있었다.

    당기명의 결연한 눈빛은, 자신만큼이나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똑같은 처지는 묘하게 동료애를 만들어 냈다.

    지금만큼은 당기명이 동료처럼 느껴졌다.

    이전의 일을 떠올린 양예신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 냈다.

    “휴…….”

    옆에서 양예신의 눈을 믿고 쫓아오던 당기명이 물었다.

    “왜 한숨을 쉽니까? 혹시 흔적이 잘 보이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미안해서 그렇습니다. 아까 일은 미안합니다.”

    “아까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계집애 같다고 한…….”

    양예신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당기명은 검집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위협인 줄 알았는데, 검 손잡이가 살짝 들리더니 검신이 딸려 나온다.

    스릉.

    깜짝 놀란 양예신이 펄쩍 뛰어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등에 묶어 놨던 창을 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뒤따르던 수하들도 뒤로 물러나 대치했다.

    창을 겨누며 방어 자세를 취한 양예신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검을 뽑은 겁니까?”

    “…….”

    당기명은 양예신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거친 호흡을 토해 냈다.

    계집애란 말은 당기명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 일은 십오 년 전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른 세가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지만, 십오 년 전 당가에서는 가문의 기둥뿌리가 뽑혔다고 표현할 만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당가는 가문을 이어 나갈 직계에게 작은 시험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문의 숙원인 공독지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사천당문의 오백 년 역사상 한 명도 만들지 못했던 꿈의 공독지체.

    그것을 이루면 천하제일 세가라는 칭호를 넘어 군림천하를 입에 올릴 수도 있었다.

    사실 공독지체의 완성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것은 독인으로서의 순수한 열망이었다.

    사천당문은 직계들에게 그들이 오십 년간 연단한 영약을 먹였다.

    영약을 먹은 이는 열에 가까웠지만, 반응한 이는 없었다.

    그렇게 가문에서 포기하고 있을 때, 직계 중 둘이 희망을 보였다.

    하나는 자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섯 살 차이 나는 동생이었다.

    공독지체로서 더욱 가능성을 보인 것은 다섯 살 차이가 나는 동생이라 들었다.

    당기명은 동생을 경쟁자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동생은 그저 동생일 뿐, 적수는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가족이었다.

    그날도 수련을 마치고 동생과 뒤뜰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우물에서 녹색 손이 나오더니 동생을 낚아챈 것이었다.

    어른들에게 알리고 우물을 수색해 봤지만, 나온 단서는 없었다.

    당기명의 아비인 가주를 비롯한 가문의 어른들은 그의 말을 믿었다.

    납치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당가에 필적할 만한 독공을 가진 고수가 당기명을 동생을 납치해 갔다고 판단했다.

    당가에 필적할 독공의 고수가 세상에 있을까?

    백독곡이라면 가능했지만, 그들과의 친분상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었다.

    그때부터 사천당가는 모든 무림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공독지체의 가능성을 가진 아이를 납치했다는 것은 사천당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사천당가 내의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점이었다.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고서는 공독지체의 가능성을 가진 아이를 딱 집어 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사천당가는 가주를 중심으로 공독지체를 완성하려 했다는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당기명은 그때 이름을 바꾸었다.

    당시 당기명의 이름은 당세령.

    열 살 난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흔적을 지우고 십오 년째 남자아이로 살아가고 있었다.

    당기명이 남자로 변장을 하며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사천당가에 특별 대우를 해 준 덕분에 별채를 썼고 남들과 목욕도 따로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공독지체의 가능성이 꽃을 피우면 원래 이름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문제는 그 가능성이 십오 년째 봉오리를 굳게 닫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 이 생활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처럼 계집애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십오 년 전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이 떠올랐다.

    그는 그럴 때면 상대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상대에 대한 화가 아닌 자신에 대한 분노.

    그것이 지금 당기명이 내뿜고 있는 감정의 정체였다.

    씩씩대는 당기명을 본 신창양가의 양예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한숨 속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푸른 무복의 도인이 남긴 흔적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천당가의 무인 중 독공을 수련한 몇몇은 가끔씩 광기를 보인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당기명이 그런 자였다.

    그런데 이렇게 싸울 시간이 없었다.

    한숨을 뱉어 낸 양예신이 말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소중하다면 힘을 합칩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

    당기명이 아무 말 없이 양예신을 바라봤다.

    조금씩 표정이 풀린다.

    표정과 비례해서 당기명이 든 검 끝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다.

    당기명이 검을 검집에 넣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빨리 흔적을 쫓도록 합시다.”

    말을 마친 당기명은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는 검지로 나무 위를 가리켰다.

    “저쪽에 무명 끈이 보이네요.”

    당기명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빨리 무명 끈이 달린 나무로 뛰어갔다.

    * * *

    적당하게 흔적을 남긴 한빈은 자신이 남긴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봤다.

    그러고는 눈썹 위에 오른손을 갖다 대 챙을 만든 채 주변을 살폈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도착한 것이었다.

    한빈은 지목한 곳은 넓은 산길에 비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뭐, 인적이 드문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산적 때문이었다.

    산적도 산채를 가지고 있는 산적이 아닌 뜨내기 산적.

    사실 토벌하기 가장 힘든 상대가 바로 정처 없이 이 산 저 산 떠돌아다니며 산적질을 하는 무리였다.

    차라리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녹림 세력의 산하라면 타협이라도 되지만, 이들은 대화 자체가 힘들었다.

    그것이 이곳을 지목한 이유였다.

    모든 약탈을 산적에게 넘긴다면?

    아마 한빈이 만들어 놓은 계획은 물 흐르듯 흘러갈 것이다.

    두리번거리던 한빈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산자락 옆에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뒤쪽으로는 마차가 팽개쳐져 있었다.

    말과 마차는 분리된 상태.

    아무래도 말을 쉬게 해 주려는 설화와 청화의 배려인 것 같았다.

    한빈이 조용히 마차로 다가가, 막 마차의 문을 열려 할 때였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바닥에는 늑대 가죽으로 상의를 덮은 한 무리의 사내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신분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허리에 찬 박도와 늑대 가죽으로 만든 상의가 그들의 직업을 말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일 잘하네.”

    설화의 작품이 분명했다.

    마차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더니, 물건을 노리고 달려든 산적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자세히 보니 아직 숨은 쉬고 있는 것이, 일말의 자비는 남겨 둔 듯싶었다.

    한빈이 산적들에게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대규모의 기척이 느껴졌다.

    한빈이 남겨 놓은 흔적을 따라온 사천당가와 신창양가의 무사들이 분명했다.

    이어서 들리는 발소리.

    터벅터벅.

    그때였다.

    뒤쪽에서 기세가 느껴졌다.

    슝!

    이것은 분명 암기.

    한빈은 옆으로 한 걸음 피하며 돌아서는 동시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한빈의 손에 조그마한 돌멩이가 잡혔다.

    탁.

    한빈은 돌멩이를 손 위에 올려놓고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이것은 분명 설화가 날린 것이 분명했다.

    거리는 백 보 밖.

    초특급 살수의 기술이 아니면 적중시키기 어려운 거리였다.

    다시 돌멩이가 날아왔다.

    슝.

    한빈이 다시 낚아챘다.

    설화가 왜?

    의문도 잠시, 한빈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의 모습은 설화와 헤어졌을 때와는 분명 달랐다.

    게다가 지금 입은 옷은 설화도 모르는 변복.

    설화가 오해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수염까지 붙이고 허름한 푸른색 무복을 입고 있으니, 자신이 동경을 봐도 어색할 것이었다.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내공을 실어서 남겼기에 그 소리는 산중으로 퍼져 나갔다.

    한빈이 낸 소리 덕분인지 더는 돌멩이가 날아오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양예신의 목소리였다.

    한빈이 돌아서서 그들을 바라봤다.

    양예신과 당기명이 떨리는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이 마차를 가리켰다.

    “저기 있네.”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양예신이 잃어버린 마차가 있었다.

    하지만, 양예신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방금 한빈이 보여 준 한 수가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양예신이 본 것은 눈앞에 푸른 무복의 도인이 손가락 하나 튕긴 장면뿐이었다.

    손가락을 튕겨 적을 쓰러뜨린다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푸른 무복의 도인은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을 뿐 어떤 물체도 손으로 쏘아 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음공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음공이란 소리로 상대를 공경하는 수법이었다.

    중요한 것은 양예신과 다른 이들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런 음공을 쓰는 이가 있다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이가 있다면, 원래 중원에 존재했던 신비 문파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거나 천축에서 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은 양예신의 오해였다. 이전의 혜광심어도 그렇고 한빈에 대한 양예신의 오해는 점점 깊어졌다.

    결국 양예신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어르신,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뭐가 말인가?”

    “마차 옆에 쓰러진 자들 말입니다.”

    “쓰러진 자들이라······.”

    “저 산적들을 손가락만 튕겨서 쓰러뜨리다니…….”

    양예신이 눈을 크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다소 부담스러운 시선에 한빈이 답했다.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네. 이 마차를 찾은 것 이외에는…….”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돌아섰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뭔가 생각난 듯 품속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은 하북팽가에서 찾은 가죽 주머니였다.

    가죽 주머니를 확인한 한빈은 그것을 당기명에게 날렸다.

    휙!

    날아오는 가죽 주머니를 확인한 당기명이 수하들에게 외쳤다.

    “내 말 맞지?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고! 도둑맞은 걸 어르신이 찾아 주신 거야.”

    “그러게요. 저는 공자님이 어디에다 두고 오신 줄 알았는데…….”

    수하들도 웅성거렸다.

    그들은 당기명이 분명히 가죽 주머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오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뭐, 오해가 아니라 사실이었지만, 당기명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든 당기명이 깊숙이 포권하면 외쳤다.

    “청······. 아닙니다.”

    당기명을 하려던 말을 끊고 손을 흔들었다.

    청운사신이라 말하려 했지만,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상대의 별호를 말하는 것은 실례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한빈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갸웃하자, 당기명이 재빨리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어서 없어진 물건이 있나 찾아보게. 없어진 물건이 있다 해도 나를 책망하지는 말고.”

    한빈의 말에 양예신과 당기명이 자신들의 마차로 달려갔다.

    마차를 살피는 그들의 모습을 보던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양예신의 마차에서 말도 안 되는 물건을 확인한 것이었다.

    바로 한쪽에 가득 쌓은 금괴였다.

    저 정도의 금괴라면 가문 하나를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데 저 금괴를 가지고 어디론가 간다?

    스멀스멀 의문이 피어났지만, 한빈은 일단 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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