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천수장 (1)
그때 주인이 뛰쳐나왔다.
삼 층에 피해 있다가 잠잠해지자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 층의 참상을 본 주인은 비명을 터뜨렸다.
“앗, 이게 대체 무슨 일이……!”
비명에 이어진 그의 대성통곡에 양예신이 한 발 앞으로 나와 주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주인장, 이번 일은 죄송합니다. 이건 신창양가의 책임이니, 제가 책임지고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당기명이 질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이건 사천당가의 책임입니다.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신창양가와 사천당가.
그때 한빈이 염화미소를 피우며 둘을 바라봤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로도 싸우는군…….”
한빈은 잠시 말끝을 흐리며 양예신과 당기명을 바라봤다.
둘을 쏘아보는 한빈은 마치 둘의 무게를 재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누구의 동작이 빠른지 한번 확인하지.”
말을 마친 한빈은 둘을 시험하겠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한빈의 말에 양예신이 재빨리 수하에게 외쳤다.
“빨리 다녀오거라!”
양예신의 수하가 숨 쉴 틈도 없이 빠르게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동시에 당기명도 외쳤다.
“빨리 돈을 가져오너라!”
사천당가의 무사 역시 날듯이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곧 이 층에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이리 와 보셔야겠습니다.”
수하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당기명도 재빠르게 몸을 날려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밖으로 나갔던 양예신의 수하가 막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고,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마, 마차가 없어졌습니다.”
“마차가 없어졌다고? 누가 감히 신창양가의 마차를 건든다는 말이냐? 마차를 지키던 보초는 어디에 있고?”
양예신은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냈다.
무사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지목을 받은 다른 무사가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양예신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이곳에서 일이 터지면서 밖에 있던 신창양가의 무사들은 모두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것을 말이다.
양예신은 현기증이 나는지 살짝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에 무사가 말했다.
“대공자님, 혹시 독에 당하신 건…….”
“지금 독이 문제더냐? 마차를 찾아야 한다. 마차를 못 찾으면…….”
양예신은 말끝을 흐렸다.
그때 이 층에서도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짐들은 다 어디 갔느냐?”
“건량만 남고 값나가는 물건은 모두 가져갔습니다.”
“대체 누가 사천당가의 짐을 홈쳐 간다는…….”
당기명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제야 도둑맞은 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기억났던 것이다.
짐 속에는 각 가문에 전해야 할 사신첩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제기랄!”
당기명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거친 숨소리를 뱉으며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일 층으로 내려온 당기명이 한빈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누군가 짐을 홈쳐 갔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급히 그자를 쫓아야…….”
당기명은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싸 놓은 똥은 치우고 가야지. 너는 이 아수라장이 된 책임이 사천당가에 있다 말했다.”
“지금 도둑이…….”
“만약 이것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너도 똑같은 도둑이 되는 법이다.”
“흠.”
침음을 삼킨 당기명은 재빨리 수하에게 턱짓했다.
“마차에서 금은보화를 가져오너라.”
“존명.”
포권한 당기명의 수하가 사라졌다.
그 수하는 눈 깜빡할 사이에 나타났다.
그의 보고를 받은 당기명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당기명.
고개를 푹 숙인 양예신.
둘 다 천하에 위명을 떨치는 무림세가의 후예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의기소침해졌다.
그때 한빈이 주인에게 바가지를 내밀었다.
바가지를 받은 주인이 살짝 떨며 물었다.
“이게 다 무엇인지요?”
“그 아래에는 꽤 많은 철전이 깔려 있소. 그거면 벽에 생긴 흠집은 수리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럼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암기들은…….”
“이건 사천당가의 암기로, 팔면 일 층 전체를 수리하고도 남을 것이니, 주인장은 안심하시구려.”
“아, 감사합니다. 대인.”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소.”
“그런데 존성대명이…….”
“그리 알릴 만한 이름은 아니오.”
한빈은 여운을 남긴 채 돌아섰다.
그때 뒤쪽에서 다급하게 양예신과 당기명이 쫓아왔다.
“어르신!”
양예신은 어찌나 급한지 한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한빈은 문 앞에서 멈췄다.
양예신은 구경꾼들이 자리를 떠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릎을 꿇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양예신이 말했다.
“어르신, 도와주십시오. 가문의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그의 말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는 신창양가의 무인이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거기에 가문의 운명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사천당가라면 모를까, 신창양가의 상황은 머릿속에 넣어 두지 않았다.
한빈은 재빨리 표정을 숨기고 물었다.
“내가 도울 일이 있겠소?”
“마, 마차를 찾아 주십시오.”
“내가 포졸도 아니고 하오문도 아니고 개방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내 허름한 무복을 보고 개방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아닙니다. 어느 정도 경지에 들면 적의 흔적이 백지 위에 먹으로 선을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가르침을 주십시오.”
“흠,”
한빈은 붙여 놓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침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당기명도 달라붙었다.
“어르신, 저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멀뚱멀뚱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승낙을 해도 시기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절실하지 않은 자가 무엇을 걸 수 있을까?
한빈은 그들의 목숨 같은 하찮은 담보는 싫었다.
숫자를 백까지 센 한빈이 말했다.
“내가 너희의 물건을 찾아 준다면 무엇을 주겠느냐?”
“제 목숨…….”
한빈이 손바닥을 보이며 양예신의 말을 막았다.
“그럴 때는 무엇이 필요하냐 물어야 되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내가 필요할 때 너희 가문의 힘을 한 번 쓰겠다.”
“가문의 힘이라면…….”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요구를 하마.”
“…….”
“그 요구는 내 제자에게 전하마.”
마지막 말은 둘만 들리도록 작게 했다.
신창양가의 양예신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어르신의 제자인지 어떻게 알아봅니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빈은 그윽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봤다.
양예신과 당기명은 한빈이 자신의 물건을 찾아 줄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한빈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둘의 표정을 보아하니, 강호에서 뒤통수 몇 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릴 친구들이었다.
물론 한빈이 물건을 찾아 주긴 할 것이었다.
아마 이들은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없을 것이었다.
무림세가 간의 뜻밖의 대결.
정체불명 고수와의 뜻밖의 만남.
그리고 문밖에 깔린 수많은 구경꾼.
모든 게 우연이지만, 이런 상황이 낯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강호를 떠돌다 보면 이런 상황은 비일비재하게 겪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겪어 보지는 못해도, 집안의 어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해 봤을 터였다.
그때였다.
이 층을 살펴보던 당기명의 수하가 헐떡거리며 내려왔다.
“공자님.”
“또 무슨 일이냐?”
당기명이 수하를 쏘아봤다.
수하는 그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상대는 독공의 고수인 것 같습니다.”
“독공의 고수라고?”
“이것 보십시오.”
수하는 조그만 양념 통을 내밀었다.
양념 통을 받은 당기명은 살짝 흔들어 보았다.
안은 텅 비었는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당기명의 눈이 커졌다.
약간 놀란 듯 보였다.
한빈도 그가 왜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수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보십시오.”
수하가 들고 있는 것은 접시였다.
“흠, 거기에 흔적이 남아 있구나.”
“이 독을 양념 삼아 뿌려 놓고 접시를 비운 것 같습니다. 모든 접시에 이 독을 뿌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허, 저 독을 먹는 괴인이라…….”
당기명은 상상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빈은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혔다.
당기명의 수하가 들고 온 것은 양념 통이 아니라 독을 넣어 놓은 통이었다.
저 통의 용도는 무엇일까?
사천당가에서는 독의 내성을 기르기 위해 몇 가지 독을 음식에 살짝 뿌려서 먹는다고 들었다.
저 양념 통이 그런 용도일 것이었다. 보통 삼 년 동안 통에 독을 넣어서 가지고 다닌다 들었다.
삼 년 치를 한꺼번에 뿌려서 먹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닌, 자신의 독공을 과시하는 행위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이 상황에 겨우 웃음을 참았다.
어찌 보면 청화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빈이 말했다.
“정파의 무림세가를 노리는 세력이 있다니…….”
한빈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이제는 그들이 상상하게 만들면 되었다.
살짝 살아났던 양예신의 낯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도 기척을 못 느낀 자다. 저렇게 독공을 과시하는 자인데, 주변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 적이 경고하는 게 누구라 생각하는가?”
“…….”
“신창양가와 사천당가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
“신창양가와 사천당가뿐이겠는가?”
“…….”
“중원의 모든 정파를 향한 도발이거늘……. 급선무는 일단 너희들의 물건을 찾는 것이 먼저 같구나.”
한빈은 품 안에서 특색 없는 무명 끈을 한 다발 꺼냈다.
그러고는 그 끈을 한 가닥 꺼내 양예신에게 주었다.
끈을 받은 양예신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이 끈을 묶어 둘 테니 잘 따라오너라.”
한빈이 돌아서자 양예신이 다급하게 물었다.
“존성대명을 말씀해주시지요”
“내 이름은……. 청운 아무개라 한다.”
한빈은 머뭇하다가 전에 하남정가에서 붙여진 별호인 청운사신의 앞 글자를 밝혔다.
동시에 한빈의 신형이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때였다.
구경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혹시 저분이 지금 청운 뭐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그런데 청운이라는 별호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누구지? 경공술을 보면 천하 십대고수에도 들 것 같은데?”
“허허,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더니 오늘 좋은 구경 했네.”
구경꾼들의 웅성거림은 뒤로한 채, 양예신은 당기명을 바라봤다.
그런데 당기명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보니 짐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놀란 듯 보였다.
당기명은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뱉었다.
“혹시 청운사신?”
당기명이 사천에서 나오며 받은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신첩을 전해 영웅을 모으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찾아야 할 사람은 둘.
그중 하나가 하남정가의 영웅, 청운사신이었다.
당기명은 반사적으로 한빈이 사라진 자리로 달려갔다.
그것이 사선당가와 신창양가에게는 신호가 되었다.
그들은 한빈이 남긴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은 부채를 꺼내 더위를 몰아내며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설화와 청화의 마차를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계획에 어긋난다.
한빈은 흔적을 여기저기 남기며 걷고 있었다.
한빈의 흔적을 그대로 쫓아온다면?
아마도 하루는 꼬박 걸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