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흑막 (5)
사내는 입술을 달싹일 뿐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갑자기 흘러나오는 기세와 눈빛이 상대가 보통 고수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 한빈이 조용히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안쪽 대결이 보고 싶으면 철전 다섯 닢.”
한빈이 손가락을 펴자 사내는 아무 말도 못 했다.
“…….”
사내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한빈이 씩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란 모양을 말아 보였다.
그 모습에 사내는 반사적으로 품 안에서 철전을 꺼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저었다.
“아니, 자네 말고.”
“그럼요?”
“일단 이거 받아.”
한빈이 건넨 것은 바가지였다.
땟국물이 잘잘 흐르는 것이, 누가 봐도 거지의 물건이었다.
사내는 한빈을 힐끔 봤다.
덥수룩한 수염에 무복이 허름하긴 해도 분명히 거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동냥 바가지를 건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사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면 한 대 쥐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사내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일단 이 비무를 구경할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돌려보내. 그리고 구경값은 거기에 받으면 되고.”
“제가 왜 이걸…….”
“내게 가장 먼저 다가온 자가 자네니까. 이름이 뭐지?”
“아, 그런 이유로……. 장오라고 합니다요.”
“장오라, 좋은 이름이군…….”
한빈은 장오를 보며 살짝 눈매를 좁혔다.
장오란 이름은 이전에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강호에 이름이 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적혈맹호대의 장삼에게서 들었던 것이 전부였다.
장삼이 자신의 속을 썩이는 동생 하나가 있다고 하소연한 일이 있었다.
그 동생의 꿈은 놀고먹는 것이라고 했다.
장삼은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두르는데, 동생은 아직도 노모의 등골을 빨고 있다고 했다.
멀쩡한 허우대와 제법 험악한 인상.
아무래도 그 장오가 눈앞에 있는 녀석이 분명했다.
뭔가 결심한 한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장오를 바라봤다.
“이 일 끝나면 나중에 한번 놀러 오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묻지 말고, 일단 실시.”
한빈의 말에 장오는 구경꾼들 사이를 누볐다.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철천 다섯 닢이요.”
쩔그랑, 쩔그랑.
철전 떨어지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사람들은 한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빈은 객잔의 문고리를 잡고 구경꾼들에게 말했다.
“날아오는 암기는 내가 책임질 테니 안심하고 구경해도 좋소!”
한빈의 외침에 구경꾼들은 술렁였다.
“사천당가의 무공을 보는데 철전 다섯 닢이면 싼 거지.”
“아무렴, 어딜 가서 사천당가의 무공을 보나.”
“그러게 말일세.”
그때 한빈이 문을 열었다.
끼익.
객잔의 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 구경꾼들의 눈이 커졌다.
객잔 문의 안쪽에 빼곡히 박힌 암기들이 구경꾼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그들의 대결이 치열했다는 것이었다.
그 치열했던 흔적들은 본 구경꾼들의 눈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덕분에 술렁임은 동시에 침묵으로 바뀌었다.
침묵도 잠시, 사람들은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은 아쉬움을 토해 냈다.
“저거 맞으면 죽는 거 아니야? 목숨 걸고 보느니 자리를 뜨는 게 낫지.”
“자네 말이 맞네. 저 사람을 어떻게 믿고 구경을 해?”
누군가는 상대의 혼잣말에 대꾸를 해 줬다.
“그런데 우리가 돈을 왜 낸 거지?”
“그러게? 홀린 듯 냈지만, 아깝네.”
떠나가는 구경꾼들은 웅성대며 장오를 바라봤다.
돈을 돌려받고는 싶지만, 이쪽 저잣거리에서 힘깨나 쓰는 장정인 장오에게 돈을 돌려달란 용기는 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억울함에 혀를 차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안쪽 문에 박힌 암기를 빼냈다.
장오가 든 동냥 바가지에 암기를 던져 넣은 한빈이 말했다.
“사천당가가 부자라더니 맞는 말이긴 하군.”
한빈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장오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 암기를 봐.”
“암기가 왜요?”
“이 암기가 얼마나 할 것 같나?”
“글쎄요?”
“이 호접비와 그 옆에 은사침만 합쳐도 한 삼 년은 일 안 해도 먹고살 거야.”
“삼 년이라고요?”
그때였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장오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피슝!
힐끔 고개를 돌린 장오의 눈에 암기가 들어왔다.
암기는 뱀처럼 흐물거리며 장오를 향해 날아왔다.
암기를 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제 끝이구나.’
그때였다.
푸른색 천이 눈앞을 가렸다.
이어서 들리는 소리.
탁.
장오는 정신을 차리고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의 손에는 뱀처럼 생긴 은침이 들려 있었다.
바가지 안에 든 은사침과 같은 것이었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하나 더 늘어난 은사침을 바가지에 던져 넣었다.
그때였다.
구경꾼 중 하나가 외쳤다.
“와, 고수다!”
그 외침에 객잔 앞을 떠나려던 구경꾼들이 자리로 돌아왔다.
한빈은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문 옆에 몸을 기댄 채, 눈앞에 벌어지는 비무를 구경했다.
* * *
당기명은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에 호접비가 적중했으면 끝났을 대결이었다.
그런데 정체 모를 고수의 훈수로 대결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고수를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본인도 그의 훈수로 위기를 넘겼다.
문제는 지금 가지고 있는 암기가 동이 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기명은 검집을 잡았다.
당기명을 상대하고 있던 양예신은 눈매를 좁혔다.
검이 아니라 검집을 움켜잡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귓전에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폭우신침(暴雨辛針)이라, 한여름에 맞는 소나기는 시원하나, 한겨울에 맞는 소나기는 어떤 무기보다도 맵기 마련이지…….
양예신은 재빨리 뒤쪽에 있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피해!”
그의 외침에 수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시에 당기명이 들고 있던 검집에서는 조그마한 철침이 쏟아져 나왔다.
파파팍.
벽에 박히는 암기에 자리를 피한 무사들은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사천당가의 무서움은 바로 지금처럼 불특정 다수를 향한 공격이었다.
한 사람만 노린다면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대상이 아닌 공간에 공격을 퍼붓는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
그때 조금 전 객잔의 문이 열렸던 것이 기억났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 훈수를 뒀던 이의 목소리도 문 쪽에서 흘러나왔다.
무심코 문 쪽을 보던 양예신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사천당가의 고수와 겨루고 있다는 것이 이제야 기억난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찾은 양예신의 눈이 커졌다.
검집을 이용해 암기를 쏘아 낸 상대도 더는 공격하지 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예신은 상대가 바라보는 곳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푸른 무복의 사내가 문 옆에 기대어 객잔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천당가의 고수가 놀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양예신은 창을 거두고 사천당가의 당기명이 무엇을 바라보는 것인지를 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숨은그림찾기와도 같았다.
얼룩덜룩한 먹물 위에서 그림을 찾아야 하는 놀이.
그것도 잠시, 양예신의 눈도 커졌다.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의 오른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내는 사천당가의 고수가 폭우신침으로 쏟아 낸 철침들을 한 주먹 쥐고 있었다.
푸른 무복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 들고 있는 동냥 바가지에 철침을 쏟아 냈다.
‘뭐지?’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계속 쌓여 갔다.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정체를 모르는 적이었다.
앞에 있는 푸른 무복의 사내는 사파일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마교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가 자신보다 고수라는 것.
사천당가의 고수가 지금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예신은 팔을 벌려 창을 세웠다.
동시에 수하가 달려와 양예신의 창을 잡았다.
창대를 놓은 양예신이 포권하며 말했다.
“제게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신창양가의 양예신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존성대명을 여쭤도 될는지요?”
정중한 질문이었다.
뒤쪽에서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던 당기명은 입을 떡 벌렸다.
‘가르침이라니?’
그러고 보니 상대와 자신의 수를 훤히 꿰뚫어 보고 훈수를 하던 고수의 존재가 기억났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허름한 푸른 무복의 사내가 바로 훈수를 두던 그 고수라는 것.
당기명도 포권했다.
“저는 사천당가의 당기명이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당기명은 짧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푸른 무복의 사내의 이름을 물으려다가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았다.
양예신이 존성대명을 물었는데, 자신이 똑같이 묻는다면 실례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말을 마친 당기명은 이 층과 푸른 무복의 사내를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짤막하게 혼잣말을 토해 냈다.
“혜광심어?”
당기명의 말에 앞쪽에 있던 양예신도 눈을 크게 떴다.
그도 이제야 기억이 난 것이다.
이 층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어떻게 문 앞에서도 들릴 수 있을까?
화경, 그중에서 십 경 이상에서만 구사할 수 있다는 수법.
상대의 머릿속에 목소리를 각인시킬 수 있다는 바로 그 전설의 전음 수법이 바로 혜광심어였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윽한 미소를 입에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이들을 신창양가와 사천당가라는 무림세가의 직계들.
이들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꽤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한빈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결에 끼어들어 훈수도 늘어놨고 이렇게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생에 귀검대에는 신창양가 출신도 있었고 사천당가 출신도 있었다.
귀검대 내부에서 매일 벌어지는 서열 전쟁 덕분에 웬만한 무가의 초식은 눈 감고도 막을 수 있을 정도다.
여기까지는 운이었고,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의도는 크게 세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의도는 그들의 머릿속에 위기의식을 심어 놓는 것이었다.
그래야 사천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흑막을 깨부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대의명분과 빚이라는 두 개의 올가미로 그들을 잡아 놔야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한빈은 사천당가와 신창양가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전생의 기억으로 위씨세가의 밑으로 가장 먼저 기어 들어가는 것이 두 가문이었다.
사천당가는 위씨세가와 같은 강남 오대세가의 한 축이니 이해하지만, 신창양가는 당시 모두가 고개를 저었었다.
이것은 전생의 기억.
이제부터는 그 원인을 파악해서 막아야 했다.
상대의 전력을 자신의 전력으로 만든다라?
이것은 매력적인 전술이었다.
그러자면 한빈도 흑막의 한 축이 되어야 했다.
사천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일대 격전은 흑막과 흑막의 대결이 되어야 했다.
흑막이 왜 흑막이겠는가?
정체를 모르니 흑막이라 부르는 것이다.
상대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쪽도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천당가에서 벌어질 무가지회에서 성과를 얻고.
사천에서 기다리고 있는 흑막을 깨는 두 가지 일에는 다른 무가들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빈은 지금 그 초석을 다지고 있는 것이었다.
한빈은 무심한 눈길로 객잔 안을 들여다봤다.
객잔 안은 둘의 대결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일 층에는 멀쩡한 탁자와 의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벽도 찢어져 있었다.
한빈의 시선을 따라 양예신과 사천당가의 당기명의 고개도 돌아갔다.
내부를 한 바퀴 훑어본 한빈이 말했다.
“이렇게 아수라장을 만들어 놨으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지.”
신분도 밝히지 않고 책임을 묻는 한빈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신창양가나 사천당가의 어른이라면 응당 이렇게 책망했을 테니 말이다.
눈길조차 안 주는 한빈의 모습은 그들에게 더욱 신뢰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