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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27화 (227/621)

227화. 흑막 (4)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허겁지겁 접시를 비우고 있는 청화밖에는 없었다.

설화는 청화를 챙기라는 건가 싶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청화에게 다가간 설화는 입을 탁 벌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턱관절이 삐걱거릴 정도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며 청화가 접시를 비우고 있는 것을 얼핏 보긴 했었다.

하지만, 단시간 내에 접시가 이렇게 깨끗하게 비워질 줄은 몰랐었다.

설화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청화야, 혹시 저 요리들을 벌써 해치운 거니?”

“네, 맞아요. 혹시 제가 잘못을…….”

청화가 마치 죄지은 듯 말끝을 흐리며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는 한빈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공독지체가 되면 기억부터 신체까지, 갓 태어난 아이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때부터 완벽한 공독지체로 성장해 나간다고 했다.

완벽한 성장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시간은 대략 삼 년.

거기에 더해 부작용도 모른다고 했다.

무림 역사상 공독지체를 이룬 독인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게 한빈이 전한 말이었다.

청화의 폭식이 부작용이라 생각하니 설화는 왠지 서글퍼졌다.

“그게 아니라…….”

설화가 슬쩍 말끝을 흐렸다.

그때 한빈이 뒤에서 나타났다.

“설화야, 빨리 챙기라니까.”

“그러지 않아도 지금 막 청화를 챙기려고 했어요.”

“청화를 왜 챙겨?”

“공자님이 청화를 챙기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두 다리 멀쩡한 청화를 왜 챙겨?”

“그럼 말씀하신 게…….”

“됐다. 내가 알아서 챙기는 게 좋겠다.”

한빈은 사천당가 무사들이 앉았던 뒤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동작이 어찌나 민첩한지 설화의 눈으로는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한빈이 짐을 앞에 두고는 쓱 훑어봤다.

그러다가 짐 꾸러미 하나를 집더니 설화에게 던졌다.

“설화야, 받아라.”

휙, 탁.

설화가 짐을 공중에서 낚아채며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이거 사천당가 물건이잖아요.”

“그래, 사천당가 거 맞아.”

“그런데 왜…….”

“강호에 네 거 내 것이 어디 있어? 집는 놈이 임자지.”

“아무리 그래도…….”

설화가 놀란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설화가 지금 황당해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그 누구도 사천당가의 짐은 안 건드린다는 것이 무림의 암묵적인 규율.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닌,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는 강호의 정설이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천당가의 뒤끝과 짐 속에 들어 있을 독을 겁내기에 건들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 규율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지켜져 왔다.

그런데 한빈이 그 규율을 깨뜨리려 하니, 설화는 당황스러웠다.

설화가 살짝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눈을 가늘게 뜬 한빈이 짐 하나를 더 집었다.

이번에는 청화를 바라봤다.

“청화야, 다 먹었으면 힘 좀 써야지.”

획!

한빈이 던진 짐 꾸러미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하지만, 청화는 아무렇지 않게 잡았다.

탁.

그 모습에 설화가 눈을 크게 떴다.

청화가 웬만큼 무공을 회복한 것 같아서였다.

한빈은 남은 짐을 쓱 훑어보더니 그중 하나를 어깨에 걸쳐 멨다.

그때 일 층에서는 다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그 소리에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다시 시작했는데요. 더 구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확인해야 할 건 다 확인했으니, 어서 가자.”

창가 쪽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 한빈은 설화가 사 온 당과가 담긴 판을 집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탁, 탁, 탁!

세 명이 동시에 객잔 밖으로 뛰어내렸다.

힐끔 주위를 살펴보니, 객잔 밖에는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안쪽의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에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객잔의 문 앞에 모여 있던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갈 사람은 없었다.

강호인의 싸움에 끼어든다는 것은 자살 행위임을 아는 것.

게다가 안쪽에서 싸우는 무리 중 하나가 사천당가라는 것을 몇몇이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안쪽 상황이 궁금해도 고개를 들이밀 수가 없었다.

괜히 얼굴이라도 내밀었다가 독이 든 암기에 당한다면?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무림인끼리 벌어진 싸움을 구경하다가 다친다면, 관아에 하소연해도 구제받을 길은 없었다.

“누가 문 좀 열어 보지?”

“괜히 열었다가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아, 궁금한데…….”

그때 마을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답이라도 하듯, 병장기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챙, 챙.

그때마다 객잔 앞에 모인 사람들의 어깨가 움찔댔다.

공포와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 * *

한빈은 그들을 뒤로한 채 조용히 돌아섰다.

사람들이 객잔에 진을 치고 있는 덕분에, 한빈은 눈에 띄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빈이 앞장서 걷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어디 가세요?”

“일단 이거 받아라, 설화야.”

한빈은 씩 웃으며 당과가 담긴 판을 건넸다.

아무 말 없이 걸어가던 한빈이 멈춘 곳은 마차의 앞이었다.

설화가 마차를 살피다가 눈을 크게 떴다.

사천당가라고 쓰여 있는 깃발이 너무 선명했던 것이다.

한빈은 설화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를 살폈다.

누가 보면 마차의 주인인 줄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에 청화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차를 한참 살피던 한빈이 마차 문고리를 잡았다.

뒷문을 연 한빈이 말했다.

“짐은 일단 여기에 넣어 둬.”

한빈의 말에 설화가 반사적으로 마차 안에 짐을 넣었다.

설화는 짐을 넣고 나서야 의문을 뭉실뭉실 피워 올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뒤이어 청화도 짐을 던졌다.

청화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설화의 의문은 간단했다.

사천당가의 짐을 홈쳤는데 사천당가의 마차에 짐을 다시 넣어 두라고?

설화는 한빈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고민도 잠시, 설화는 일단 마음을 놓았다.

‘그래, 사천당가와 분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설화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설화야, 마차는 몰 줄 알지?”

“…….”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차라?

주위를 둘러봤다.

물론 마차는 몰 줄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는 사천당가의 마차밖에 없지 않은가?

설화가 마차에 꽂힌 사천당가의 깃발을 바라보자,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깃발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

탁.

그러고는 설화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이러면 사천당가의 마차라는 것이 표시가 안 날 거 아니야.”

“아, 네…….”

설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청화가 말했다.

“저도 마차 몰 줄 알아요, 공자님.”

“잘됐네, 덕분에 일거리가 줄어들겠어.”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설화를 바라봤다.

한빈의 눈빛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설화는 지필묵이 든 보따리를 구해 왔다.

종이를 펼친 한빈은 종이에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똑같은 지도를 두 장 그린 한빈은 그중 하나를 설화에게 전했다.

“이 마차는 여기에 가져다 놓도록.”

“네, 알았어요. 공자님.”

“그래, 그럼 수고하고.”

“혹시 마차 갖다 놓고 저는 어디로……?”

“어디긴, 마차 지켜야지.”

“지키다니요?”

“나 말고 다른 놈이 마차로 접근하면…….”

한빈이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설화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할게요.”

말을 마친 설화가 지도를 다시 확인하더니 말 고삐를 움켜잡았다.

“이럇!”

따가닥, 따가닥.

말발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 잔잔해지자, 한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한빈이 멈춘 곳은 신창양가의 깃발이 꽂힌 곳이다.

깃발이 꽂힌 마차를 본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천당가의 마차와는 달리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천당가의 마차가 편하게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신창양가의 마차는 마치 짐수레 같았다.

마치 전쟁 물자를 나르는 듯한 큼직한 수레처럼.

지붕만 없다면 뭐, 수레라고 불러도 되었다.

거기에 걸맞게 두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있었다.

한빈은 주저 없이 지도를 청화에게 건넸다.

“찾아갈 수 있겠어?”

“이거 아까 지도하고 같은 곳이죠?”

“그래, 그런데 이쪽 지리도 잘 모르고…….”

한빈은 뒷말을 삼켰다.

청화의 정신 상태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기에 살짝 의문을 가지고 청화를 바라봤다.

“걱정 마세요, 공자님.”

청화가 담담하게 답하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다고?”

“아니요, 냄새를 맡고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설화 언니가 간 곳이 저쪽 맞죠?”

청화가 설화가 향하고 있을 지점을 가리켰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이것도 부작용인 것 같았다.

후각만을 본다면 한빈을 넘어서는 능력이었다.

의문도 잠시, 한빈은 청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다.”

“그럼 빨리 언니 따라갈게요.”

청화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는 말 고삐를 틀어쥐었다.

한빈은 그녀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제지했다.

“잠시만 기다려.”

“공자님, 왜요?”

“이건 뽑고 가야지.”

한빈은 사천당가의 마차와 마찬가지로 신창양가의 깃발도 뽑았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던졌다.

툭.

청화가 물었다.

“이제는 가도 되나요?”

“그래, 가도 된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삐를 잡은 청화의 표정은 왠지 즐거워 보였다.

입꼬리를 실룩이는 것이 야생마 같았다.

마차를 모는 야생마라?

한빈은 청화를 보며 웃었다.

뭐, 조금 표정이 이상하기는 해도, 말 고삐를 잡는 모습은 꽤 믿음직스러웠기에 한빈은 마음 놓고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다음 모습에 한빈은 입을 벌려야 했다.

평소와는 다른 청화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랴-잇!”

청화의 손이 억척스럽게 말 고삐를 잡아당겼다.

휘-잉.

말이 투레질하며 앞발을 치켜들었다.

그것도 잠시 쏜살같이 말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드드륵.

마차 바퀴가 굉음을 내며 관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힐끔 주변을 보니, 사람들은 모두 객잔 쪽에 모여 있어서 청화가 모는 신창양가의 마차를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한빈은 다시 객잔으로 돌아갔다.

물론 붉은색 무복 그대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행낭에 들어 있던 옷으로 갈아입고 수염을 붙였다.

그 수염은 이무명이 붙인 수염과 비슷한 수염이었다.

이무명이 변장용으로 사용하는 수염도 한빈이 구해 준 것이니 같을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허름한 청색 무복을 입고 수염을 붙인 채 어슬렁어슬렁 객잔 입구로 걸어갔다.

객잔의 입구는 철옹성처럼 닫혀 있었다.

빗장이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누구도 그 문을 열 생각을 못 했다.

뭐, 한빈이 아까 떠나오던 상황 그대로였다.

한빈은 수염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객잔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 모습에 마을 사람 중 하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 하십니까? 문을 열었다가 암기라도 튀어나오면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나무라듯 한빈을 말리는 중년 사내.

중년 사내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림인처럼 보일 정도로 건장했다.

짙은 눈썹에 건장한 체구.

거기에 팔뚝에는 힘줄이 돋아나 있는 것이, 힘깨나 쓸 법한 인물이었다.

딱 보니 무림인은 아니지만, 삼재검법 정도는 익힌 듯 보였다.

한마디로 강호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는 것.

그가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문을 열어 놓고 구경했다면, 사천당가와 신창양가의 대결 특성상 구경하던 사람 중 몇은 의원으로 실려 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둘의 대결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었다.

챙. 챙.

아직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치열하게 들린다.

한빈은 둘 중 누구도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빈의 계획대로 그들을 이끌 수 있었다.

그때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눈썹을 꿈틀대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보슈, 말이 안 들립니까?”

“…….”

한빈은 대답 대신에 잔잔한 웃음을 피우며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

중년 사내는 더는 재촉하지 않고 한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빈에게서 묘한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한빈이 반박귀진을 풀었기에 느낄 수 있던 것이었다.

사내의 표정을 본 한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안의 상황이 궁금한가?”

한빈의 말투가 바뀌었다.

“…….”

사내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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