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흑막 (3)
접시가 깨지고 탁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급박하게 들려왔다.
한빈은 팔짱을 낀 채 소란에는 관심이 없는 듯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하소연을 늘어놓던 사천당가의 무사들은 풀어 놨던 검을 허리에 차고 재빨리 계단 쪽으로 모였다.
무사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공자님이 위험하다, 모두 아래로!”
그 외침에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후다닥 계단이 아닌 난간을 넘어 일 층으로 뛰어내렸다.
탁, 탁.
그들이 착지하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객잔 일 층에 울렸다.
그들이 들이닥치자, 문 쪽에서 다시 소리가 울렸다.
“어서 들어가서 대공자를 보호하라!”
“서둘러라!”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아니라 상대편 무사의 목소리였다.
그 외침과 동시에 발소리가 객잔에 울렸다.
양쪽 합쳐 스무 명이 넘는 무사가 이동하자, 이 층이 출렁하고 울릴 정도였다.
한빈은 그제야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제 이 층은 텅텅 빈 상태.
한빈은 여유 있게 난간에 쪼그려 앉아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청화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공자님, 배고픈데 저거 먹어도 돼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막 내온 고급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
밑의 소란에도 점소이는 묵묵히 접시를 올려놓고 있다.
접시를 다 올린 점소이는 재빨리 삼 층으로 피했다.
할 일은 하고 자리를 피한 점소이의 모습에 한빈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의 끝에 한빈이 답했다.
“그래, 마음대로 먹어라.”
“감사합니다, 공자님!”
“뭐, 내 돈도 아닌데…….”
한빈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청화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화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천당가 무사들이 있던 자리에서 나타났다.
어찌나 동작이 빠른지 한빈이 펼치는 구걸십팔보를 생각나게 했다.
한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청화를 바라봤다.
지금 봐서는 딱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다시 밑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한빈은 청화를 보며 씩 웃었다.
지금 대치한 상황으로 봐서는 저 요리를 먹을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뭐, 돈은 사천당가 사람들이 다 치렀을 테니 굳이 청화를 말릴 필요는 없었다.
한빈은 청화에게 시선을 거두고 아래 상황을 살폈다.
사천당가 무사들의 앞에 서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는 자는 서신을 전달하는 책임자로 보였다.
그는 씩씩대며 허리에 찬 검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왜 지나가는 사람을 건든 거지?”
질문을 던진 이는 이번에 사천당가에서 강북 쪽에 서식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당기명이었다.
그 모습에 상대는 입꼬리를 올렸다.
상대가 입꼬리를 올리자 당기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천당가의 깃발을 봤을 텐데도 어찌 저리 태연할 수 있단 말인가?
당기명은 상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상대는 자신보다 머리 두 개 정도가 컸으며, 오른손에 창을 들고 있었다.
창끝에는 날을 보호하는 가죽이 덮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그들의 가문을 나타내는 문양과 한자가 적혀 있었다.
신창(神槍).
당기명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신창이라고?
그 칭호를 쓸 수 있는 가문은 딱 한 곳이었다.
산서에 위치한 신창양가.
국가가 위험할 때는 가장 앞에 나서서 싸우는 충신 가문이었다.
신창양가의 창은 산동악가보다도 조금 더 앞선다는 것이 강호인들의 의견이었다.
그 명성에 비해 신창양가는 강북 오대세가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가능하면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그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위국상창(爲國上槍).
즉, 나라를 위해서만 창을 든다는 것이 신창양가의 가훈이었다.
기존 강북 오대세가를 밀어내고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면서도 산서에 묻혀 수련에만 몰두하는 무림세가.
그것이 신창양가였다.
황제가 하사한 상방보검을 가주전에 쌓아 놓은 가문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기에?
하지만 의문도 잠시, 당기명은 상대의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일단 힘으로 누른 다음 차후 일을 생각한다!
그것이 당기명이 내린 결론이었다.
신창양가의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더 올리며 외쳤다.
“내가 건드렸나? 자네가 와서 내게 부딪힌 거지! 그런데 다짜고짜 날 보고 놈이라고?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구나!”
말을 마친 그는 손에 들고 있는 창을 바닥에 찍었다.
쿵.
내공이 실렸는지 객잔 바닥을 뚫고 창대가 깊숙이 들어갔다.
창을 쓰는 무사는 그 상태에서 창을 잡은 손을 묘하게 뒤틀었다.
그러더니 창대가 회전하며 박혔던 바닥에서 스르륵 뽑혀 나왔다.
그 무사는 상대에게 한 수 보여 줬다는 표정으로 당기명을 노려봤다.
당기명은 힐끗 뒤를 봤다.
힘으로 제압하기에는 상대가 보여 준 한 수가 절묘했기 때문이다.
힘으로 바닥을 찔러 구멍을 낸다?
절정의 고수라면 누구나 가능할 일이었다.
문제는 그가 창으로 낸 구멍이었다.
구멍은 칼로 도려낸 것처럼 깔끔했다.
나무 창대로 저리 구멍을 내었다는 건?
상대는 초절정의 고수라는 소리.
그리고 창을 빼낸 수법도 보통이 아니었다.
창을 잡아 빼낸 게 아니라 창과 손바닥이 맞닿지도 않았다.
조법과 내공의 절묘한 조화.
거기에 무위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이 지금에야 기억났다.
당기명이 서찰을 전할 곳에는 신창양가도 있었다.
‘아, 뭐 됐네.’
당기명은 속마음을 뱉지는 않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들의 입씨름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 층에서 신창양가의 무위를 본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양가조법이군.”
“양가조법이요?”
귓가에 들려온 질문에 한빈이 고개를 쓱 돌렸다.
그곳에는 설화가 앉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빈은 이 층을 쓱 훑어봤다.
한빈이 있던 자리에는 당과가 가득 담긴 좌판이 통째로 놓여 있었다.
당과 장수와의 흥정에서 승리한 것이 분명했다.
설화가 당과 하나를 쓱 내민다.
“이거 드세요.”
“그래, 고맙다, 설화야.”
“별말씀을요, 공자님. 그런데 양가조법이 무슨 말이에요?”
“저 아래 사천당가와 대치한 이들이 아무래도 신창양가 사람처럼 보여서. 신창양가 사람들이 쓰는 조법이 양가조법이거든.”
“창을 쓰는데 왜 조법이 필요하죠?”
“신창양가의 창법은 변초가 워낙 많아 긴 창을 제어하기 위해서 특이한 조법을 사용한다고 들었거든.”
“그럼 이 기회에 신창양가의 창법 좀 구경해야겠어요, 공자님.”
“그래, 이제 곧 한판 붙으려나 보다.”
“청화도 불러올까요?”
“지금 저기서 배 채우고 있으니 그냥 놔둬.”
“그래도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인데…….”
설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냥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저렇게 잘 먹는데 먹는 거 말리다가 너희끼리 싸움 나면 어떻게 하려고…….”
한빈이 막 농담을 던졌을 때였다.
다시 아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같잖은 창법은 뭐에 쓰려고? 바닥을 뚫을 거면 방앗간에서 일하지, 왜 강호에는 나와서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난리야!”
아무리 당기명 자신이 서찰을 전해야 할 신창양가라도 일단은 상대의 기를 꺾기로 한 것이었다.
당기명의 외침에 신창양가 무사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 무사의 이름은 양예신.
신창양가의 대공자였다.
그는 가문에 일어난 일을 해결하기 위해 하북 땅을 밟았다.
그런데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길거리에서 시비를 붙은 것이다.
지도를 보며 가다 살짝 어깨가 부딪혔는데, 상대는 다짜고짜 사과하라고 닦달을 했다.
양예신은 가볍게 사과를 했다.
그는 그 정도 양보했으면 끝날 일이라 안심하고 가던 길을 가려 했다.
사과했지만, 상대는 무릎까지 꿇으라 했다.
하나, 신창양가는 황제의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
신창양가의 대공자인 자신을 모욕하는 것은 가문뿐 아니라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양예신이 외쳤다.
“스멀스멀 기어 나오다니? 보아하니 사천에서 온 당씨 성을 쓰는 양반 같은데 체통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가!”
“내가 사천당가인 줄 알면서 이렇게 나오신다는 거지? 입만 살아서는, 쯧쯧.”
당기명이 다시 도발하자, 양예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입만 살았다고?”
“거기 좋은 창 놔두고 왜 입만 나불거리지?”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계집애 같으니라고…….”
양예신은 말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당기명이 흥문해서는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당기명은 일직선으로 검을 찔러 들어오며 외쳤다.
“계집애라고? 죽어!”
계집애란 말에 흥분한 듯한 당기명.
짧게 외친 당기명은 양예신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챙!
양예신은 당기명의 검을 가볍게 쳐 냈다.
그때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사천당가의 첫수는 허초지. 저 상황이라면 아마도 호접비(胡蝶飛)를 날릴걸…….
그 목소리에 양예신이 재빨리 오른쪽으로 돌았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대로, 자신이 있던 자리로 호접비가 지나갔다.
양예신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호접비는 당문의 기본 암기로 나비를 본뜬 암기.
호접비가 무서운 것은 빨라서가 아니었다.
호접비는 나비가 날듯 펄럭이며 천천히 날아가는 암기였다.
상대를 막았다고 생각하고 반격의 일수를 날리려고 할 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암기를 막을 수 있을까?
물론 상대보다 고수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동수를 이루었을 때는 그 공격에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양예신이 그 짝이 날 뻔했다.
반면, 당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위쪽을 올려다봤지만,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당기명이 호접비를 날린 수법은 편편기무(翩翩起舞)라는 수법이었다.
호접비가 당가의 기본 암기이긴 해도, 나비가 꽃 위에서 펄럭이는 듯 흩날리는 편편기무의 수법은 당가의 상승 암기술이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이번 공격이 적중했다면 승부는 깨끗이 끝났을 것이다.
기분 좋게 양보하는 듯 뒤로 빠지면 모양새도 좋았을 것.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수법을 상대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그때 당기명의 귀에 다시 정체불명의 음성이 들려왔다.
-신창양가라면 저렇게 암기를 피한 후에는 다리를 노릴 거야. 아마도 발초심사(撥草尋蛇)의 수법을 쓸 테지.
그 말을 들은 당기명은 자신도 모르게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붕!
때마침 창이 아래를 쓸고 지나갔다.
그때 들리는 급박한 음성.
-풀을 뽑았으니 뱀의 머리를 치기 위해 위쪽으로 올 테지…….
그 말을 듣자마자 당기명은 재빨리 천근추의 수법으로 무게중심을 아래로 내렸다.
탁!
아래로 착지하자 이번에는 머리 위쪽에서 창대가 파공성을 내며 지나갔다.
붕!
위기를 넘긴 당기명은 재빨리 품속에서 다른 암기를 꺼냈다.
그렇게 첫수를 서로 교환한 당기명과 양예신은 서로를 노려본 채 간격을 좁혔다 넓혔다를 반복했다.
죽일 듯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먼저 공격하지는 못했다.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준 자가 아군인지 적군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자신만 구한 것이 아니라 상대도 구했기에, 저 고수가 아군이라 확신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상대에게 눈을 떼는 즉시 이 대결의 승패는 결정 날 것이 뻔했다.
그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을 때,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설화가 아래에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 왜 저들을 구해 주신 거예요?”
“네가 뭐랬어?”
“뭐가요?”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 다음 싸움 구경이라고 했잖아.”
“그게 왜요?”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리라고…….”
“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쨌든 이번 싸움은 붙여야 돼.”
“저도 도와드릴까요?”
“저 정도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고 일단 챙겨!”
“챙기다니요?”
“저것들 다.”
한빈이 사천당가의 무사들이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