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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24화 (224/621)
  • 224화. 흑막 (1)

    가주전에서 나온 팽혁빈과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파를 결집시키고 있다는 마공서의 정체가 궁금했던 것이다.

    한빈이 물었다.

    “형님, 그 서책의 이름이 뭐죠?”

    “흠, 어디 보자. 아까 보니 제목도 없던데…….”

    팽혁빈은 품속에서 서책을 꺼냈다. 그러고는 책장을 넘기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잠시, 팽혁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제목은 나와 있지 않군. 네가 직접 찾아보겠느냐?”

    “그럼 그 책 제가 며칠 빌려도 되겠습니까?”

    한빈은 팽혁빈이 서책을 당연히 넘겨줄 것이라 생각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팽혁빈은 서책을 건네려다 손을 멈췄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시죠? 형님.”

    “공짜로 달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당연하죠, 내일 비무 한 판 어떻습니까?”

    “쩝, 한 번은 아쉬우니 두 번은 어떻겠느냐?”

    “저는 좋습니다.”

    한빈이 씩 웃자, 팽혁빈도 마저 웃었다.

    협상을 마친 팽혁빈은 서책을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이 서책을 품속에 넣고 말했다.

    “읽는 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늦게 줘도 된다.”

    “네, 형님. 그럼 저는 이만…….”

    한빈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혀를 찼다.

    “다 좋은데 성격이 너무 급하군.”

    그 말에 뒤따라오던 팽대위가 같이 혀를 찼다.

    “쯧쯧, 성격이 급한 건 가문의 기질이지.”

    “가문의 기질이라니요? 숙부님이 보시기에 저도 성격이 급해 보입니까??”

    “당연히 급해 보이지.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비무에 미친 것도 그렇고 말이다. 내 말이 틀리더냐?”

    “잘못 아셨군요. 제가 가문에서 제일 침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장 온순하기도 합니다, 숙부님.”

    “뭐, 인정해 주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 귓속말로 뭐라고 했기에 우리 가주 형님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각주들을 해산시킨 것이냐?”

    팽대위는 못 말리겠다는 듯 손을 흔들며 화제를 돌렸다.

    팽대위가 물은 것은, 이전에 한빈이 모든 상황을 아는 듯하자 팽혁빈이 끼어든 일이었다.

    팽혁빈은 잠시 그때 일을 떠올리더니 말했다.

    “천재라 했습니다.”

    “천재라고?”

    “한빈이가 제갈량에 버금가는 천재라 했습니다. 뭐, 정확히는 그 이상 가는 천재가 맞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왜 표정이 그러십니까?”

    “과연 네 말이 맞는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살짝 말끝을 흐리는 팽대위의 모습에 팽혁빈은 고개를 힐끔 돌렸다.

    그곳에는 팽대위가 들고나온 술통이 있었다.

    보기에도 제법 많은 술이 남아 있었다.

    팽혁빈이 말했다.

    “그거 마저 치워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래, 한잔하면서 남은 얘기 좀 끝내자꾸나.”

    말을 마친 팽대위는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집법당이 있는 쪽으로 말이다.

    * * *

    한빈은 탁자에 앉아 서책을 펼쳤다.

    그때 설화가 청화를 데리고 들어왔다.

    청화의 혈색은 점점 정상이 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 깨어났을 때만 해도 너무 생기가 없어서 귀신으로 착각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제법 사람답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병자 같은 느낌.

    문제는 체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독지체의 부작용일까?

    아직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공독지체라는 특이 체질은 전생의 한빈도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청화는 조금만 더 있으면 설화와 비슷해질 것 같았다.

    이제는 청화가 설화에게 언니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한빈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한 설화가 조용히 차를 따랐다.

    조르륵.

    한빈이 씩 웃었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공자님.”

    “찻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제법 정갈한 것이, 마치 도인 같아서 그런다.”

    “도인은 무슨 도인이요, 칫.”

    설화가 어이없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설화가 자신의 변화를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화에게는 더 이상 살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천수장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미소 뒤에 살기를 한 아름 품고 있는 아이였다.

    한빈은 차로 입술을 적신 뒤 책장을 넘겼다.

    하북팽가 내에서 사파의 움직임을 가장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한빈이었다.

    사파가 처음 만들어 낸 영웅은 바로 적룡대협, 즉 한빈이기 때문.

    문제는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인물의 정체다.

    아마 책 속의 인물은 한빈이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흑막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도련에 대항해 십대세가가 하나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나올 수는 없었다.

    거기에 더해 무가지회가 열리는 곳이 다름 아닌 사천.

    그렇다면 사파를 뒤에서 움직인 흑막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서책으로 분위기에 불을 지핀 것도 그들일 것이고 말이다.

    아마 이 책은 시중에 그리 많이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눈에 봐도 찍어 낸 책이 아닌, 필사한 책.

    누군가가 써 놓은 이야기를 옮겨 적었다는 이야기였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책에는 중간중간 빠진 문장들이 많았다.

    이렇게 필사를 해서 전해지는 책들은 옮겨 적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변하기도 하고, 기존에 있던 부분이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빠진 이야기들은 이야기꾼들이 채워 넣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말이다.

    그 능력에 따라 그들의 수입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할 일이었다.

    한빈이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책을 누가 썼느냐는 점이었다.

    책을 읽어 나가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공자님.”

    “이 책의 내용이 조금 이상해서 그러지.”

    “왜요?”

    “왜 배경이 영단산이지?”

    “어? 영단산이면 하남정가로 가던 길에 난리 났던 거기잖아요? 공자님이 죽을 뻔했던……. 사파가 무슨 무림 학관 세운다고 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설화는 조금 흥분했는지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한빈은 설화를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왠지 주인공이 쓰는 초식이 눈에 익어서…….”

    “줘 보세요.”

    설화는 낚아채듯 서책을 들었다.

    한참을 보던 설화도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공자님이잖아요? 와, 공자님, 드디어 성공하셨네요. 이야기꾼들의 책에도 나오고…….”

    “뭐라고?”

    설화는 평소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옆에 있던 청화도 끼어들었다.

    “저도 보여 주세요, 언니.”

    “여기 봐 봐. 이거 공자님이 잘 쓰시는 초식이잖아.”

    “어, 맞아요. 저도 이 초식에 뚜드려 맞았잖아요.”

    “맞은 데는 괜찮고?”

    “지금은 괜찮아요, 언니.”

    “그래, 공자님하고 만나면 원래 맞고 시작하는 게 순서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원망은 하지 마.”

    “원망 안 해요. 저를 살려 주신 게 언니랑 공자님인데요, 뭐. 그런데 언니도 맞고 시작하셨어요?”

    “그게 좀, 헤헤.”

    설화가 웃자 청화가 한빈을 바라봤다.

    뭔가 오묘한 눈빛이었다.

    한빈은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는 것 같자, 재빨리 손을 저었다.

    “잡담은 그만하고 일단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잡담 아닌데……. 그런데 뭐가 궁금하신 거예요? 딱 봐도 공자님과 친한 분이 쓴 것 같은데요?”

    “나랑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여기 묘사된 초식들은 옆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해요.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호감도 가지고 있고요. 그럼 측근이라는 이야긴데, 이상한 건요…….”

    “이상한 건 뭐지?”

    “제가 공자님 오른팔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쓴 적이 없거든요.”

    “아.”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설화를 바라봤다.

    그때 청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야기꾼들이 쓰는 책이라면 분명히 책을 쓴 사람 이름이 나와 있을 텐데요.”

    “이름이 나와 있다고?”

    한빈이 놀란 듯 묻자, 청화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촤르륵.

    책을 넘기던 청화의 손이 멈춘 건 마지막 장이었다.

    청화는 마지막 장을 검지로 가리켰다.

    한빈과 설화가 고개를 내밀고 마지막 장을 확인했다.

    한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안 나와 있구나, 청화야.”

    “여기를 보셔야 해요.”

    청화는 세로로 쓰인 서책의 마지막 장 중 아래쪽을 쭉 손가락으로 그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보통 이런 책을 쓸 때는 이런 식으로 이름을 넣어요. 그러니까…….”

    청화가 가리킨 것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아닌, 아래쪽을 가로로 읽다 보면 마지막에 저자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야기책을 저술하는 방식이고 말이다.

    청화는 최고의 독인이 되기 위해 수련할 때, 유일한 친구가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이런 책들이었다는 것까지 덧붙였다.

    청화의 말에 설화가 손뼉을 쳤다.

    짝!

    “와, 청화 너 천재구나. 우리 공자님도 몰랐던 걸 청화 네가 알아내다니!”

    탄성을 흘리며 청화의 머리를 쓰다듬는 설화.

    한빈은 그들의 모습은 신경 쓰지 않고 가로로 쭉 글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가로로 글자를 조합해 보니 익숙한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바로 진세미였다.

    아무래도 흑막이 아니라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장운현에서 진세미와 만났을 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도 같았다.

    적룡대협에 대한 존경심을 담아 쓴 글이 있다고 했다.

    진짜 이 책일까?

    그렇다면 흑막이라는 것이…….

    한빈이 눈매를 좁힐 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한빈이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한빈의 말에 설화가 달려 나갔다.

    덜컹.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정문의 경비 무사였다.

    경비 무사가 얼굴이 파래져서는 한빈에게 다가왔다.

    “사 공자님께 온 물건이 있어,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리 줘 봐라.”

    “여기 있습니다.”

    경비 무사는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한빈은 경비 무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이유를 알았다.

    그 경비 무사는 사천당문에서 온 사신첩을 전한 무사였다.

    가주 팽강위 앞에서 간이 콩알만 해진 상태로 다시 일을 나갔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물건이 그의 간을 더욱 쪼그라들게 만든 것이다.

    이 물건은 백사문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즉 천하 십대세가와 사파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되는 이런 상황에서, 사파에서 하북팽가의 직계에게 보내온 물건이라는 뜻.

    자칫 혀를 잘못 놀린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 생각했을 것이다.

    새파랗게 질려 도망간 경비 무사와는 달리,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영약이 들어 있는 듯한 조그마한 상자와 서책 한 권, 그리고 서찰이 들어 있었다.

    한빈은 먼저 서찰을 집었다.

    한빈이 서찰의 봉인을 뜯으려 하자, 설화가 다급히 말했다.

    “이거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제가 뜯을게요.”

    “설화야.”

    “네, 공자님.”

    “예민하게 굴지 말아라.”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서찰을 뜯었다.

    지금 보낸 영약은 약속한 이익금이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리고 전에 말했던 서책을 같이 넣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서찰을 확인한 한빈은 서책을 들었다.

    촤르륵.

    서책을 넘기던 한빈의 표정이 변했다.

    역시 이야기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좋다는 책의 저자는 진세미가 맞았다.

    진세미가 보낸 책에는 이야기꾼들로부터 입수한 책에 없는 내용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조금 전 본 이야기책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한빈이 보기에도 오글거릴 정도로 책 속의 인물을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존경심을 넘은 경외를 담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의도는 없었다.

    아는 사람 몇 명에게만 나눠 줬다고도 적혀 있었다.

    이것이 이야기꾼들의 손에 흘러들어 간 것은 우연일 것이었다.

    사파의 결집 뒤에 숨겨진 흑막이라 한다면?

    바로 한빈 자신일 것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영약이 담겨 있을 상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셨다.

    강북과 강남 무림이 술렁이는 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한빈 자신이었다.

    한빈은 부지런히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겼다.

    눈을 빛낸 한빈이 혼잣말을 뱉었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이제 문제는 사천당가의 당주가 누구에게 당했는지를 찾아내면 되었다.

    뭐, 사천당가를 그렇게 만든 배후를 못 알아낸다 해도, 사파를 적절히 이용한다면 이번 무가지회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것이었다.

    한빈의 진득한 웃음에 설화는 청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만 나가자.”

    “왜요, 언니?”

    “지금 표정 잘 기억해 둬.”

    “지금 표정이라니요?”

    “딱 보기에도 뭔가 사악, 아니 순수해 보이시잖아.”

    설화는 특정 단어는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한빈의 표정을 본 청화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침.

    한빈 일행은 하북팽가를 나왔다.

    몇 걸음 가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문 옆에 걸린 가죽 주머니가 한빈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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