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23화 (223/621)
  • 223화. 물과 기름 (5)

    “그 책이 사파인을 결집시키고 있으니 문제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깟 이야기책이 강호에 영향을 끼친다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가주님.”

    주작각주 가기군은 못 믿겠다는 듯 책을 눈앞에 가까이 댔다가 멀리 뗐다가를 반복하며 살폈다.

    그 모습에 가주 팽강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파인들은 이 책에 나온 주인공을 실존 인물이라 믿고 있네.”

    “이 책에 나와 있는 주인공이 실존 인물이라고요?”

    주작각주 가기군은 다시 물어보며 책장을 다시 펼쳐 봤다.

    다시 읽어 보니 이건 사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주인공이 마교를 처단하는 권선징악이 담긴 내용이었다.

    마교를 처단하고 무림의 정의를 세우는 것은 정파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이 책이 사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가기군의 머릿속에는 계속 의문이 쌓였다.

    그때 팽강위가 설명을 이었다.

    “그 인물이 정파이지 사파인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저잣거리 이야기꾼들은 그 주인공을 사파로 묘사한다네. 붉은 옷을 입은 사파의 영웅으로 말일세. 그 책과 입담이 겹쳐지면서 요즘 철전을 쓸어 담는 이야기꾼이 제법 많다고 하네.”

    “아, 이게 그 책이었습니까? 하남에서부터 퍼졌다는 건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남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하북과 산동까지 널리 퍼진 이야기책이지,”

    “저도 알고는 있지만, 저 책에 나와 있는 인물은 누가 봐도 정파의 인물이 아닙니까?”

    “그게 더 문제일세. 사파의 인물이 정파보다 더 자혜롭고 용맹하다……. 자네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흠.”

    “자네는 왜 이런 책이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분명 강남 사도련을 중심으로 한 술책이 분명하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강남과 강북의 사파를 통일하려는 것이지. 그것도 상상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말일세.”

    “전형적인 영웅 만들기 정책이군요.”

    “그렇지. 상상 속 인물을 바탕으로 강북과 강남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사도련의 술책이라니,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지. 여기까지가 내가 수집한 소문일세.”

    말을 마친 가주 팽강위는 검지로 서책을 가리켰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가주 팽강위가 말한 소문을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소위 회의라는 것이 그렇다.

    생각할 틈 없이 생각을 쏟아 낼 때도 있지만, 지금처럼 명상을 하듯 여유를 가지고 주제에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이것은 팽대위가 가져온 술 때문일 수도 있었다.

    주변을 보면 심각한 주제에 비해 다들 표정을 밝았다.

    물론 불그레한 얼굴을 보아하니 술기운은 남아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한빈도 조용히 팽강위가 말한 소문을 떠올려 봤다.

    팽강위는 지금 세가 간의 정치에서 입에 오르내릴 떡밥을 던진 것이다.

    한빈은 가기군이 들고 있는 이야기책을 힐끔 바라봤다.

    정보 수집이라면 한빈 역시 가주 팽강위나 가기군에게 뒤처지지 않을 텐데, 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 장운현에 오랜 시간 묶여 있으면서 정보의 흐름을 놓친 것 같았다.

    문제는 그들이 말한 이야기책 속 인물이 묘하게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혹시…….”

    그 목소리가 좀 컸는지 팽강위가 고개를 돌렸다.

    “한빈아,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쏠렸다.

    졸지에 시선을 모은 한빈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저쪽의 영웅 만들기 술책에 대항할 묘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그 묘책이 뭐라 생각하느냐?”

    “정파의 무림세가 쪽에서 취할 방법은 두 가지라 생각합니다.”

    “말해 보아라.”

    “하나는 영웅을 지우는 방법입니다.”

    “영웅을 지운다라…….”

    “이야기꾼을 풀어서 그 영웅을 정파의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보기에 저잣거리에 풀린 이야기꾼들은 사파의 돈줄을 쥐고 있겠죠.”

    “그럼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냐?”

    “다른 하나는 영웅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사파와 똑같은 방법으로 영웅을 만들어 강북과 강남 무림을 결집시키는 방법이죠. 그런데 이것도 의견이 갈릴 것으로 봅니다.”

    “의견이 갈린다라? 어떤 의미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정파의 대표 단체인 정의맹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거대 문파와 무림세가가 아닙니까?”

    “그렇지.”

    “거대 문파로 불리는 구파일방의 경우는 강북과 강남이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유일하게 천하 십대세가만이 강북 오대세가와 강남 오대세가로 나뉘어서 대립하고 있을 뿐이죠.”

    “계속해 보아라.”

    “정의맹에서는 이 일에 자금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똥줄이 타는 것은 천하 십대세가겠죠. 사파가 통일되면 가장 손해를 볼 것도 십대세가고요. 구대문파야 어찌 보면 넘을 수 없는 세력이니까요. 제 생각에는…….”

    한빈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계속해야 할 것이냐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힐끔 눈치를 보니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다.

    한빈은 편안히 말을 이었다.

    “이번 무가지회의 주제가 바로 강북과 강남 무림세가의 결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결집을 위해 무가지회에서 영웅을 만들 것이 분명하고요.”

    “오호.”

    팽강위가 한빈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한빈의 혜안이 대견하다는 탄성이었다.

    탄성을 지운 팽강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무가지회에서는 아마 상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인물을 새로운 무림세가의 영웅으로 내세울 것이다. 또한 그 영웅이 누가 되느냐가, 강북과 강남 무림세가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 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아, 실제 인물이라……. 경쟁이 치열하겠군요.”

    “즉, 이번 무가지회는 천하 십대세가를 중심으로 한 비무 대회가 중심이 될 듯하다. 거기에서 나온 영웅을 중심으로 천하 십대세가는 결집할 것이고 그 뒤에 중소 무림세가는 대통합에 자연스럽게 뒤따라 오리라는 것이 강북 오대세가주의 생각이다.”

    “아, 이제야 사천당문이 왜 그리 마음이 급한지 이해가 되는군요.”

    한빈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무가지회를 통해 다른 가문의 도움을 받아 가주가 회복하더라도 주도권을 넘겨줘야 하고, 다른 가문에서 무림세가를 대표할 영웅이 나오더라도 똑같이 주도권이 넘어가겠죠.”

    “당가는 주도권을 빼앗겨 불이익을 받을 텐데, 왜 서두른다는 말인가?”

    팽강위는 질문을 던진 뒤 한빈을 시험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한빈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가주의 상태일 겁니다. 그 상세가 위중하니 행사는 서둘러 도움을 받아야 하겠고 주도권을 놓치기 싫으니 다른 세가의 도움 없이 의원을 찾아서 해결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건 사천당가의 사정이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무가지회라는 전쟁에서 승리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이 회의의 주제가 맞겠죠?”

    “네 말이 맞다. 이제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 바로 그 문제이다.”

    말을 마친 팽강위는 시선을 돌렸다.

    팽강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팽혁빈과 한빈이었다.

    그는 두 명의 소가주 후보를 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았다.

    둘을 바라보던 팽강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 중 누가 가겠느냐?”

    이번 무가지회에 누가 가겠냐고 묻는 것이다.

    “…….”

    팽혁빈이나 한빈, 둘 다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형님이 대표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양보하는 것이냐?”

    팽강위가 눈매를 좁히며 한빈에게 물었다.

    한빈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문의 이익이 걸린 일에 양보라는 단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양보가 아니라 최선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최선이라…….”

    “네, 맞습니다. 일단 천하 십대세가의 면모를 보게 되면 이미 소가주가 정해져 있는 가문이 태반입니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그 소가주들의 나이와 강호 경력도 무시 못 하죠. 그곳에 제가 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제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 목소리가 무시당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가문이 무시당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상황을 피하겠다는 말이냐?”

    말을 마친 팽강위의 눈썹이 꿈틀댔다.

    눈썹에 입이 달렸다면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던진 한빈의 눈빛이 달라졌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의 눈빛으로 말이다.

    한빈이 눈을 빛내자, 팽강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아라.”

    “그런 상황이 오면 저는 모두의 귀싸대기를 후려칠 자신이 있습니다.”

    순간 모두는 술기운이 달아난 듯 눈을 크게 떴다.

    호탕한 팽가의 기질에 가장 어울리는 답이지만, 이들 중 누구도 귀싸대기라는 표현을 쓸 이는 없었다.

    술잔이 앞에 있지만, 공식적인 회의 자리가 아니던가?

    사람들은 한빈에 말에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팽혁빈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웁.”

    입안의 술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행히도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터트렸기에, 다른 이들에게 피해는 없었다.

    집법당주 팽대위는 놀란 표정에 비해 살짝 입을 씰룩이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가주 팽강위에게 향했다.

    가주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가주 팽강위는 팔짱을 끼고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입에서는 ‘요놈 봐라.’ 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팽강위의 얼굴에 호기심 대신 엄격함이 묻어났다.

    “지금 장난하는 것이더냐?”

    “장난이 아닙니다. 저는 진지하게 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문의 대표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나머지 세가를 모두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군을 만들기에는 형님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살짝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팽강위는 그윽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이제까지의 일을 보면 한빈은 호랑이라고 하기보다는, 적을 끝까지 쫓아서 물어뜯는 늑대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적을 만들 수도 있다는 한빈의 말이 맞았다.

    팽강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구나. 그럼 혁빈이의 생각은 어떠하냐?”

    “저도 한빈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흠.”

    팽강위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강호행 후 가문으로 돌아온 팽혁빈의 가장 큰 변화는 한빈에 대한 태도였다.

    형제간의 우애를 넘어 어떻게 보면 의지하는 모습이었다.

    첫째 팽혁빈이 누구에게 의지한 적이 있었던가?

    아비의 도움조차 거절하는 성격이었다.

    거기에 더해, 조금 전 팽혁빈이 한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고민도 잠시, 팽강위는 결정을 내렸다.

    팽강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기군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들은 대로 준비해 주게, 가기군 각주.”

    “네,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일단 정보부터 착실하게 수집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대공자가 출발하기 전까지 완벽히 자료를 모아 놓겠습니다.”

    “그럼 부탁하겠네. 그리고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니, 모두 돌아가도록.”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기군이 먼저 포권했다.

    그 모습에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는 나랑 일대일 비무를 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게…….”

    팽강위는 대답 대신 자신의 거도를 잡았다.

    거도를 잡은 팽강위의 몸에서 태산과도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에 모두는 자신의 짐을 챙기기 바빴다.

    그들이 자리를 뜨려 할 때, 팽강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책은 혁빈이가 가져가거라.”

    “네, 알겠습니다.”

    팽혁빈은 재빨리 탁자 위의 서책을 집었다.

    자리에 남은 가기군이 도움을 찾을 이를 찾았다.

    “집법당주님.”

    “내가 서류를 검토할 게 있어 이만 가 봐야겠네. 미안하네, 가기군 각주.”

    말을 마친 팽대위는 재빨리 술통을 챙겼다.

    팽대위와 모두는 약속했다는 듯 자리를 비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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