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물과 기름 (3)
청아한 소리는 마치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남들은 전쟁을 바라보는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전쟁에 참여해야 할 병사인 가기군의 입장에서는 공포의 소리일 수밖에 없었다.
가기군은 더욱 울상이 되었다.
다른 각주들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시선이 마주치면 가기군과 함께 가주의 수련실로 딸려 들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일대일 비무라는 것은 합법적으로 패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가기군은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봤다.
하지만, 가기군은 가주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씩 웃었다.
한빈은 가기군의 실수를 알고 있었다.
가기군이 정화 부인의 이야기를 언급한 것에 대해 가주는 허허거리면서 넘어갔지만, 사실 그 뒤끝이 마지막에 터진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팽가의 사람들은 큰 덩치와 호탕한 성격의 가주 팽강위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주 팽강위는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에는 빚지고는 못 산다는 팽가 특유의 성격이 한몫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팽강위가 물었다.
“표정을 보니 다른 의견이 있는 것 같구나.”
“의견이라기보다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별건 아니고 저 철 봉투를 제가 연구해 봤으면 합니다.”
“사천당문에서 보내온 독이 든 철 봉투를 뭐에 쓰려고 하느냐? 호기심에 만져 봤자 몸만 상할 터다.”
“아닙니다. 꼭 제가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거라. 대신!”
“말씀하시지요.”
“조심해서 다루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이 철 봉투는 사천당가에서 사신첩(死神牒)이라 부르는 물건일 겁니다.”
“사신첩이라? 불길한 이름의 물건이군.”
“불길하다기보다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물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한빈은 사신첩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물론 사신첩의 가치에 대해서는 빼고 말이다.
한빈이 사신첩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가기군이 말했던 도전장이나 도발이란 단어는 쏙 들어가 버렸다.
한빈의 설명은 간단했다.
사신첩은 상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사신첩의 용도는 비밀 유지.
억지로 열려고 하면 독을 배출한다. 열 때는 홈을 눌러서 열어야 하지만, 봉투에 홈은 정확히 네 개였다.
그 순서를 어기면 얕은 면에서 암기가 튀어나온다.
사신첩의 주인만이 이것을 열도록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위험하기는 해도 서찰을 정상적으로 전달받은 자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물건은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한빈의 설명이었다.
한빈의 설명을 듣고 난 팽강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사신첩을 우리에게 보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저도 처음에는 사천당가가 보내는 도발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다릅니다. 서찰에 적혀 있는 내용은 사천당가치고는 꽤 정중한 편입니다.”
“그건 인정하지. 내가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난 네 생각을 듣고 싶구나.”
“제가 생각한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계속 이야기해 보거라.”
“첫째는 단순한 실수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전한 자는 깜빡 잊고 사신첩을 통째로 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신첩을 통째로 전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알기로는 이 서찰을 전달한 자의 임무는 사신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신첩에서 서찰을 빼서 전달하고 이것은 가져갔어야 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럼 다른 가능성은?”
“사천당가에서 온 자가 사신첩을 여는 방법이 적힌 문서를 빼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둘 다 실수라는 것이군.”
“제 의견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천당가의 물건에 대해서 어찌 그리 잘 알고 있지?”
팽강위가 눈매를 좁혔다.
이것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뭐, 한빈이 아는 것은 당연했다.
십 년 정도가 지나면 사신첩은 다른 문파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물건이다.
뭐, 중요한 점은 이 사신첩이 지금은 부르는 것이 값일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빈이 준비한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였다.
팽혁빈이 다급하게 팽강위 쪽으로 다가갔다.
팽강위는 팽혁빈의 표정을 보고 말없이 기다렸다.
그의 표정은 다급했으며, 한편으로는 비밀을 털어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팽혁빈은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팽강위에게 속삭였다.
그 말에 팽강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 모습에 각주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팽강위는 각주들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탕하게 외쳤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이만 해산하고 주작각주는 남도록!”
그 말에 나머지 각주들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으며 주작각주 가기군은 울상이 된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 * *
한빈을 비롯한 몇몇만이 가주전에 남아 있는 상태.
팽강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론을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 말에 모두는 눈을 크게 떴다.
가기군을 남긴 것은 비무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모두는 그렇게 생각하고 가주전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팽강위는 본론이 있다고 했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은 두 명의 소가주 후보와 팽가의 셋째 호랑이인 집법당주, 그리고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각의 각주인 가기군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는 조금 심각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팽강위가 입을 열었다.
“한빈의 말대로 사천당가치고는 꽤 정중한 서신이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형님.”
집법당주 팽대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말없이 팽강위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
팽강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것이야.”
말을 마친 팽강위는 모두를 바라봤다.
팽강위의 시선을 받은 이들이 동시에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가주님.”
그들이 모두 약속하자, 팽강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한빈이 사신첩에 대해서 풀어놓은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강호에 떠도는 몇 가지 소문에 대해서 생각이 나서 상의를 하려고 한다.”
“떠도는 소문이라니요?”
“당가의 가주에 관해 이야기부터 해야겠구나.”
옆에서 듣던 팽혁빈이 놀란 듯 끼어들었다.
“사천당가의 가주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소문인데 사천당가의 가주가 중독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리더구나.”
가주 팽강위의 말에 집법당주 팽대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 형님, 천하의 당가주가 중독되었다고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랍니까?”
“그래서 나도 소문으로만 치부했지. 하지만, 당가의 서신을 보니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구나.”
“허, 그게 사실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이 아닙니까?”
“이 소식을 전한 천리 표국은 이것을 소문이 아닌 사실로 믿고 있다.”
“천리 표국이 준 정보였습니까?”
“그러니 꽤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지.”
“그런데, 사천당가의 가주가 상태가 안 좋은 것과 무가지회가 무슨 관계입니까? 가주의 상태가 안 좋다면 도리어 무가지회를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한다.”
“반대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세가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지.”
“십대세가가 무슨 의원도 아니고, 왜 우리의 도움을 바란답니까?”
“아마 하남정가를 구한 의원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싶구나.”
“하남정가를 구한 의원이라면…….”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의원을 찾는 것이겠지. 그 의원이 청운사신이라는 이름의 은둔 기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 하북팽가와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소문은 무성했지만, 밝혀진 바는 없지.”
말을 마친 팽강위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팽강위는 하남정가를 구한 의원이 한빈과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심증만 있을 뿐 자세한 정황은 아직도 모르는 상태.
시선을 받은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그때 하남정가의 가주 어르신이 기운을 차리신 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강호의 기사 중 하나로 기록될 일이죠.”
한빈은 남의 말을 하듯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은 자신이 한 일이라 밝히는 것은 시기상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팽강위는 마치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한빈에게 보냈다.
한빈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하남정가에 있었던 일의 대부분이 비밀이었다.
하지만, 실제 있었던 사실보다 조금 더 부풀려져서 강호에 소문이 돌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홍칠개는 한빈이 청운사신의 제자라는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하남을 넘어 하북까지는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아직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하남정가의 가주를 치료한 의원과 한빈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팽대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서찰을 잘 전달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왜 위험하게 저런 사신첩을 우리에게 던져 놓고 가는 겁니까?”
따지는 듯 묻는 팽대위.
대답한 것은 한빈이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서신을 전달한 자의 마음이 급해서일 겁니다. 강북 오대세가를 다 돌아야 하며, 그 와중에 하남정가의 가주를 구한 의원도 찾아야 하니까요. 사천당가의 가주는 점점 상태가 악화되고 있고요.”
“그게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급하면 하남정가로 찾아가서 부탁을 해야지,”
“아마, 다른 이가 찾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하남정가에서는 그 의원이 누군지 절대 가르쳐 주지 않을 겁니다.”
“오호, 네가 어찌 그리 하남정가의 속까지 아느냐?”
“저는 청명환을 건네며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남정가와의 거래 권한을 제게 준 것이겠지요.”
물 흘러가듯 술술 답하는 한빈의 말에, 팽대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것도 같구나.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구나.”
“청명환을 건넨 공로치고는 하남정가에서 네게 쏟아붓는 정성을 보면…….”
팽대위에 말에 한빈이 살며시 웃었다.
난독증에 걸린 사람치고는 눈치가 백 단이기 때문이었다.
“집법당주님의 혜안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그럼 하남정가와 다른 거래가 있단 말이구나?”
“그건 제 영업 비밀입니다.”
한빈이 활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팽대위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그들은 사천당가의 사정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고, 사천당가의 사정이 그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팽대위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형님.”
“어디를 그리 가려고…….”
“잠시만요!”
팽대위는 뒷간이 급한 사람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팽대위는 다시 나타났다.
눈 몇 번 깜짝일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집만 한 통을 짊어지고 왔다.
팽대위는 그 통을 모두의 앞에 내려놨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자, 팽대위가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담가 놓은 매실주입니다. 이번 건 매실 향이 제법 좋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그러자꾸나.”
팽강위의 허락이 떨어지고 취중 회의가 이루어졌다.
술잔이 한 바퀴 돌자, 팽대위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그럼 또 다른 소문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아까 몇 가지 소문이라고 하셨잖습니까, 형님?”
“아, 그랬지.”
팽강위가 기분 좋게 웃으며 술잔을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사파의 결집에 관한 이야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