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20화 (220/621)

220화. 물과 기름 (2)

한빈의 말에 가주 팽강위가 서찰을 들고 온 경비 무사를 바라봤다.

한빈이 한 서찰을 가져온 이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라는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팽강위의 기세에 대기하고 있던 경비 무사가 움찔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시간이 없다며 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일단, 알았다.”

팽강위가 손짓하자, 경비 무사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미간을 좁힌 팽강위가 한빈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그렇다는군…….”

“제가 그자의 행방을 물어본 것은 간단한 이유입니다.”

“이유라……. 어서 말해 보거라.”

“그것은 사천당가의 의도입니다. 지금, 묘한 장치가 된 서찰을 전한 의도를 말씀드리려는 거죠.”

“묘한 장치라 했느냐? ……그러고 보니 묘하긴 하구나.”

팽강위가 검은색 철 봉투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철 봉투에서 서찰을 꺼내 팽혁빈에게 넘긴 후 말을 이었다.

“깨끗한 종이가 있으면 제게 주시겠습니까?”

한빈의 말에 팽강위가 옆에 있는 탁자에서 종이를 하나 집어 던졌다.

획!

종이가 마치 암기처럼 한빈에게 날아왔다.

한빈은 내공이 실린 종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냈다.

탁.

한빈을 보는 팽강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것은 일종의 자식 자랑.

모두가 있는 앞에서 한빈의 경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누가 이 의도를 안다면 팔불출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팽강위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모두의 관심은 한빈의 무위가 아닌 철 봉투에 쏠렸기 때문이었다.

평상시라면 이 광경을 본 모두는 탄성을 내질러야 정상이었다.

뭐, 한빈도 감흥은 없었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종이를 철 봉투에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얇은 덮개를 원래 위치로 돌려놨다.

한빈은 철 봉투를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제가 사천당가에서 온 봉투를 원래대로 돌려놨습니다! 일단 이 봉투를 강제로 열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부터 보여 드리죠.”

한빈의 말에 모두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경극의 절정을 보는 듯 숨도 쉬지 않았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적당히 힘을 주어 봉투를 찢으려 시도했다.

물론 열리지는 않았다.

뜨득.

묘한 소리만 낸 뒤 봉투는 잠시 휘어졌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한빈은 다시 홈을 눌러 봉투를 열었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한빈의 행동을 보면 모두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빈은 씩 웃으며 철 봉투를 털어 냈다.

순간 철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종이가 빠져나갔다.

종이가 펄럭이며 이를 지켜 보고 있던 각주들의 앞에 떨어졌다.

각주 중 하나가 종이를 잡으려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제가 서찰을 가져온 이의 행방을 물어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한빈은 종이를 주우려는 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종이의 한 치 앞에서 동작을 멈추고 한빈을 바라봤다.

뭔가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한빈은 그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장서각의 각주님이시죠?”

“그렇네만…….”

“장서각을 담당하고 계신다면 종이의 변화를 가장 잘 알아보시겠군요. 앞에 있는 종이의 가장자리를 잘 보시겠습니까?”

“가장자리라? 아무리 봐도…….”

장서각주는 말끝을 흐리며 눈을 크게 떴다.

종이의 가장자리에는 푸른색 염료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염료라고 하기도 뭐한 게, 꼭 먼지처럼 보였다.

장서각주는 종이를 철 봉투에 넣었을 때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나 빈 종이가 아닌 중요한 서류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것은 가문 내에 서류와 서책을 관리하는 장서각주로서의 본능이었다.

철 봉투에 넣기 전에 종이는 분명히 깨끗했다.

그런데 지금은 곰팡이가 핀 것처럼 불길한 푸른색 먼지가 종이에 묻어 있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사 공자.”

“독입니다, 각주님.”

한빈이 짧게 답했다.

놀란 장서각주는 재빨리 뒷걸음쳤다.

“앗.”

순간 가주전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천당가에서 암습하려 했다는 말인가?”

“사천당가가 우리에게 독을 뿌리고 도망쳤다고?”

“설마, 그럴 리가…….”

“그래, 사 공자가 잘못 안 거지.”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네. 사 공자가 잘못 안 게 분명해.”

“하북팽가를 그리 우습게 볼 리가 없지.”

“지금 사 공자가 독이라잖아. 자네들은 그걸 못 믿겠다는 것인가?”

그때 가주 팽강위가 오른쪽 발을 굴렀다.

내공을 실어 진각을 밟은 것이다.

쿵.

가주전이 흔들릴 정도로 내공을 담은 한 수였다.

순간 모두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팽강위는 아무렇지 않게 한빈에게 물었다.

“사천당가에서 우리에게 독을 보낸 이유가 뭐라 생각하는지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모였다.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자,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단 서찰을 보고 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팽혁빈이 들고 있는 서찰을 가리켰다.

팽혁빈은 서찰을 손끝으로 잡고 언제라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독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형님, 그 서찰은 괜찮습니다. 억지로 열려고 하면 내부에 있는 서찰에 독을 뿌리는 장치입니다. 처음 서찰은 정상적인 경로로 열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 널 믿고 서찰을 펼치겠다.”

팽혁빈은 서찰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몇 문장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읽을까 말까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가주 팽강위가 말했다.

“큰 소리로 읽도록 해라.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팽가의 식구. 그 서찰의 내용을 볼 자격이 있다.”

“네, 그럼 읽겠습니다.”

팽혁빈은 서찰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천하 십대세가와 중원의 모든 세가에게 전할 게 있어 이렇게…….”

제법 긴 내용의 서찰이었다.

팽혁빈이 서찰을 읽어 나가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찰의 내용은 정중했다.

무가지회(武家之會)를 열 테니 사천당가로 방문하라는 내용이었다.

무가지회는 보통 사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중원 무림세가들의 행사였다.

모두가 술렁이는 가운데, 한빈은 서찰의 내용을 중심으로 의문을 정리해 보았다.

세가지회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이었다.

하나, 정중한 내용에 비해 전달하는 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에 몇 가지 의문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무가지회에 참석해야 할 무림세가는 둘로 나뉜다.

첫째는 가가지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천하 십대세가였다.

둘째는 초청을 받아야 참석할 수 있는 나머지 세가였다.

초청할 세가를 정하는 것은 주최자의 마음.

무가지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강호에서 무림세가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기에, 주최자에게 뇌물까지 쓰는 가문도 있었다.

이번 행사는 사천당가가 주최할 차례였다.

사천당가가 한몫 잡을 기회라는 것이다.

다만 예상을 빗나간 것은, 본래대로 치면 세가지회가 열리는 것은 내년이었다.

그다지 중요한 행사는 아니기에 전생의 기억에서도 가물가물하지만, 특이 사항이 없었다.

전생에 한빈은 정의맹의 비밀 집단이었던 귀검대의 대주.

무림의 음지에서 활동하면서 과거 있었던 사건은 모두 머릿속에 넣어 뒀었다.

용린검법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그 사건이 전생보다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언뜻 떠오르는 사건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이번 무가지회는 원래 열려야 할 때인, 일 년 뒤에 열렸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전생과 사건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과연 세가지회를 앞당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마교?

정체불명의 집단?

그것도 아니라면…….

한빈은 아무 말 없이 팽혁빈이 읊는 무가지회의 초대장을 듣고 있었다.

서찰에는 무림의 중대사를 상의하기 위해서라는 짤막한 문장을 제외하고는 행사를 일 년 앞당기는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때 팽혁빈이 서찰을 내려놨다.

“서찰의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순간 각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문을 제기한 것은 장서각의 각주였다.

“무가지회에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 전부 아닙니까? 그런데 왜 독을 묻혀서 전달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가문 간의 예의에서도 벗어나는 일인데, 어쩌자고 사천당가에서는……. 험.”

접객당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눈빛으로 봐서 욕이라도 뱉고 싶은데 가주와 다른 이들의 눈 때문에 험한 말은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주작각주 가기군이 조심스럽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주작각주.”

“흔히 강북과 강남의 무림을 가리켜 물과 기름이라 하지 않습니까? 물론 혼인으로 맺어진 하남정가와 하북팽가를 제외……. 험, 죄송합니다.”

주작각주 가기군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자신이 아직 아물지 않은 팽강위의 상처를 들춰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주 팽강위는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괜찮네. 어차피 지난 일이 아니던가? 가문을 경영하자면 때때로 과오가 따르는 법, 과오는 부끄러워하되, 감출 필요는 없는 법이지. 계속하게.”

“네,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런 계속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천당가가 강남 무림세가를 대표해서 강북 무림세가에 내미는 도전장이라 생각합니다.”

“도전장이라? 근거는?”

팽강위의 짧은 질문이 연달아 이어지자 가기군이 재빨리 답했다.

“현 무림에는 경쟁이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 투쟁심을 깨우려는…….”

주작각주 가기군은 자신이 분석한 상황에 대해서 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가기군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기에 바빴다.

한빈이 보기에는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아무 내용이 없었다면, 한빈도 도발이라 생각할 터였다.

그런데 무가지회에 참석해 달라는 정중한 내용이 있었다.

콧대 높은 사천당가에서 저 정도로 참석을 종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저 철 봉투는 사신첩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사신첩은 사천당가의 기술이 집약된 작품이다.

도발을 하기 위해서 사신첩을 던져 주고 간다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빈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것도 잠시 한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한빈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작각주 가기군은 열변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한빈의 시선은 주작각주 가기군이 아닌 철 봉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주작각주 가기군의 설명이 끝났다.

“……제 생각은 여기까지입니다.”

“자네의 생각은 잘 들었네. 한마디로 강남 무림세가가 강북 무림세가에게 걸어온 도발이라 보면 되겠군.”

“네, 그렇습니다.”

“자네의 좋은 의견에 대한 상을 내리겠네.”

“제가 상을 바라고 말씀드린 것은…….”

“아닐세, 자네에게 최고의 상을 내리고 싶네.”

“가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 회의가 끝나면 내 수련실로 오게.”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수련실이라니요?”

“올 때는 꼭 자네의 병기를 지참하게나.”

“그게 무슨…….”

“내가 내리는 상은 나와의 일대일 비무일세.”

“일대일 비무라니요, 저는 됐…….”

“어허!”

마치 사자후와도 같은 외침에 주작각주 가기군은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가주 팽강위는 옆자리에 있는 자신의 거도를 틀어쥐었다.

그러고는 검지로 검신을 튕겼다.

챙!

오래된 절의 종이 울리는 듯한 청아한 소리가 가주전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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