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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19화 (219/621)
  • 219화. 물과 기름 (1)

    한빈의 말에 심미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경계 태세를 푸는 건 늦추시는 게…….”

    한빈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풀어도 돼. 저쪽도 이제 신경 껐으니까.”

    “뭐 주군이 확인하셨다고 하니, 저도 마음 놓을게요.”

    “이제부터는 팔짱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편하게 있어도 돼.”

    심미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 건너 불구경이라고요?”

    “오늘부로 우리 손을 떠났으니까. 우린 강 건너 불구경하다가 불구덩이에 물을 뿌릴까, 기름을 뿌릴까만 고민하면 돼.”

    한빈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누가 봐도 편해 보이는 자세였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저는 기름에 한 표요!”

    “기름이라? 좋은 생각이야, 심 부대주. 그런데 그 이유는 뭘까?”

    “기름을 부어야 불구경을 오래 할 수 있잖아요, 주군.”

    심미호가 씩 웃으며 돌아섰다.

    한빈은 심미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떠나려던 심미호가 고개를 흔들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 돌아선 심미호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래? 심 부대주.”

    “생각해 보니까 제 성격이 변한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이지? 심 부대주.”

    “왠지 꼭 주군을 닮아 가는 것 같아서요.”

    “날 닮아?”

    “요즘 들어 소 대주나 조호가 저보고 주군하고 너무 비슷한 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주군의 질문에 답을 하고 나니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나네요. 주군을 닮았다고 하는 게 칭찬일까요?”

    한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그거, 칭찬 맞아. 의심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불충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심 부대주.”

    “앗, 거기까지는……. 어쨌든 항상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해요, 호호.”

    심미호가 도망치듯 뒷걸음치며 사라졌다.

    움찔하며 다급히 사라지는 심미호의 모습을 보던 한빈이 작게 웃었다.

    한참 동안 의자에 몸을 맡긴 채 휴식을 취하던 한빈이 혼잣말을 뱉었다.

    “사천이라? 그럼 사천당가? 아니면 아미파인가? 거기도 아니면 청성?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사천은 그만큼 문파가 많았다.

    문파가 밀집해 있는 지역을 꼽으라면 누구나 사천과 섬서를 꼽을 것이었다.

    한빈은 눈을 감았다.

    심화편 중 일신우일신 덕분에 계속 운기의 효과를 보는 중이지만, 벌써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상태였다.

    사람의 몸이 강철이 아닌 이상, 약간의 휴식이라도 취해야 할 터였다.

    눈을 감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은 슬쩍 실눈을 떴다.

    자신의 주변으로 보이는 투명한 진기.

    그것들은 마치 지렁이처럼 일렁거렸다.

    자세히 보니 마치 글자의 획처럼 보였다.

    한빈은 대수롭지 않게 눈을 감았다.

    이것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용린검법의 운기법일 터였다.

    획처럼 보이는 진기는 한빈의 몸을 휘돌다가 백회혈로 들어갔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 쌓인 탁기를 몰고 나와 대자연의 기로 씻어 내어 다시 받아들이는 과정.

    한빈의 시야에 다시 한번 글귀가 나타났다.

    [용혈지체에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물론 한빈은 보지 못했다.

    대신 쌔근쌔근 숨소리를 낼 뿐이었다.

    적이 물러간 것을 확인하고 이제야 편히 휴식을 취하는 한빈이었다.

    * * *

    며칠 후.

    한빈은 연무장에서 팽혁빈과 수련용 목도를 맞대고 있었다.

    연무장 곳곳에 깨진 나뭇조각이 나뒹굴고 있고 둘의 상의는 여기저기 잘려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옅은 상처가 드러났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지만, 그 주변으로 핏물이 번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모든 모습이 그들의 비무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한빈과 팽혁빈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주변 상황과는 반대의 표정.

    한빈은 웃음을 띤 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에는 반 토막 난 수련용 목도가 쥐어져 있었다.

    벌써 스무 번째 바꾼 수련용 목도였다.

    앞에 쓴 열아홉 개의 목도 역시 조각이 난 채 연무장에 뒹굴고 있고 말이다.

    한빈은 검이 아닌 도법으로 팽혁빈과 승부를 한 것이다.

    도법으로 팽혁빈과 비무를 벌인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오호단문도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팽혁빈은 오호단문도의 기본 형태를 가르쳐 주고는 바로 실전 비무를 권했다.

    오호단문도는 수련이 아닌 실전으로 익혀야 한다는 것이 팽혁빈의 설명이었다.

    팽혁빈은 한빈의 수준에 맞춰 점점 수준을 높여 나갔다.

    그러다가 이렇게 비무가 치열해진 것이었다.

    한빈이 깨달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팽혁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대단하구나. 대단해.”

    그 웃음에 한빈이 고개를 들어 팽혁빈을 바라봤다.

    “대단하다니요?”

    “혼원보와 혼원장을 익히는 데 걸린 시간이 이틀이다.”

    “…….”

    “하늘이 내린 인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설명하겠느냐?”

    “과찬이십니다.”

    “이건 우리 가문의 경사다, 경사야. 거기에 오호단문도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익히다니”

    그때였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오호단문도를 익혔습니다.]

    [불완전한 기본 무공 – 오호단문도]

    [불완전한 무공을 펼치는 것은 시전자의 발전을 방해합니다. 또한 주화입마를 불러옵니다.]

    [심화편에 잠들어 있는 주화입마 방지 심법이 실행됩니다.]

    주화입마라고?

    눈을 크게 떴다. 때마침 한빈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글귀가 이어졌다.

    [주화입마 방지책으로 하루 동안 실력편의 구결이 이 분의 일로 줄어듭니다.]

    한빈은 실력편을 바라봤다.

    [실력편]

    [속(速) : 이십(二十)]

    [……]

    실제로 모든 구결이 사십 개에서 이십 개로 줄어 있었다.

    아무래도 신체의 대사 속도를 줄이는 듯 보였다.

    뭐, 구결이야 하루가 지나면 회복될 테지만, 문제는…….

    바로 오호단문도가 불완전하다는 데에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융합편을 확인했다.

    혼원벽력도라고 적힌 글자가 경고하듯 반짝이고 있었다.

    한빈은 대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혼원벽력도뿐 아니라 기본 무공인 오호단문도도 훼손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혼원벽력도의 기본 무공 중 혼원보는 걸음걸이.

    혼원장은 도의 파지법.

    오호단문도는 초식과 기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호단문도를 잘못 익힌 상태에서 혼원벽력도를 익힌다면?

    그것은 주화입마의 지름길이 될 수밖에 없을 터.

    한빈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어떻게 제대로 된 무공이 없어, 제길!”

    낮은 목소리였지만, 팽혁빈이 못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웃고 있던 팽혁빈이 눈매를 좁히며 달려왔다.

    “아우야, 그것이 무슨 말이냐?”

    “…….”

    “다 들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형님이 가르쳐 주신 오호단문도가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예를 들어 이 부분 말입니다.”

    한빈이 반쪽 남은 수련용 칼을 들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한 발 물러났다.

    순간 한빈의 수련용 칼끝에서 미세한 바람이 일더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물었다.

    “그것은 호혈출도(虎穴出道)가 아니더냐? 내가 보기에는 완벽한데…….”

    “호랑이 굴에서 나온 호랑이가 하늘로 날아오르겠습니까? 아니면 숲을 누비겠습니까? 기의 흐름도 그렇습니다…….”

    한빈은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물론 비급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솔직히 털어놓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한빈의 말에 팽혁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다른 이가 똑같은 말을 했다면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빈이 누구던가?

    백 년, 아니 천 년 만에 나올 가문의 천재였다.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초식을 수정하면 되겠느냐?”

    “그건 저도 모르죠. 오늘 오호단문도를 배운 제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럼 확실하지는 않겠구나.”

    “네, 그렇죠. 형님.”

    그때였다.

    한빈의 눈앞에 다시 글귀가 나타났다.

    [가문 밖에서 오호단문도의 흔적을 찾기를 권합니다. 단서 – 구파일방과 천하 십대세가.]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천하 십대세가 중 황보세가, 산동악가, 서문세가 그리고 하남정가와는 이미 연을 맺어 놓은 상태.

    이 네 가문 모두 한빈이 원하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여섯 개의 가문.

    거기에 사부인 홍칠개가 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의 원로가 아니던가?

    어떻게 보면 수월할 수도…….

    생각을 이어 나가던 한빈은 혀를 찼다.

    구파일방과 천하 십대세가에서 흔적을 찾는다라?

    범위가 좁혀졌다고는 해도, 이건 모래밭 위에서 바늘 찾기나 똑같았다.

    한빈이 허탈하게 글귀를 보고 있을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누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힐끔 돌려 보니, 정문의 경비 무사 중 하나였다.

    그는 대공자 팽혁빈의 앞에 도착해서는 숨을 헐떡였다.

    “헉헉.”

    그 모습에 팽혁빈은 그의 등을 토닥였다.

    탁탁.

    가벼운 동작처럼 보여도 그의 등을 통해 진기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팽혁빈의 수법으로 경비 무사는 단숨에 정상적인 호흡을 찾았다.

    혈색이 돌아온 것을 본 팽혁빈이 물었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구나.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보아라.”

    “사천당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천당가라? 무슨 일이더냐?”

    “저는 이곳으로 바로 달려왔고, 다른 경비 무사는 서찰을 가지고 가주전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니까…… 서찰을 전하는 모습이 어찌나 흉흉한지 불안해서 대공자님을 찾아온 것입죠.”

    즉, 경비 무사의 말은 간단했다.

    대공자 팽혁빈과 한빈이 가주전으로 빨리 가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한빈과 팽혁빈은 재빨리 가주전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가주와 집법당주 그리고 나머지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웅성대고 있었다.

    한빈은 힐끔 대공자 팽혁빈의 눈치를 봤다.

    한빈과 눈이 마주친 팽혁빈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팽혁빈은 재빨리 가주 팽강위에게 달려갔다.

    “아버님, 무슨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천당가에서 온 서찰을 막 펴 보려 했다. 네가 보겠느냐?”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보겠습니다.”

    “그럼 네가 대표로 확인하거라.”

    가주 팽강위는 아무렇지 않게 서찰을 건넸다.

    서찰은 검은색 봉투에 들어 있었다.

    한빈은 검은색 봉투를 유심히 봤다.

    살짝 번들거리는 봉투의 질감.

    팽혁빈이 막 서찰을 봉투에서 꺼내려 할 때였다.

    한빈이 팽혁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형님.”

    “왜 그러느냐?”

    “제가 봐도 되겠습니까?”

    “흠, 네 마음대로 해라.”

    팽혁빈은 서찰을 한빈에게 건넸다.

    서찰을 건네받은 한빈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러게 말일세. 겉봉투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궁금한데 빨리 봉투를 뜯지 뭐 하고 있나?”

    그들은 아직도 한빈이 못 미더운지 입을 내밀고 있었다.

    하지만, 팽혁빈은 한빈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봉투를 쓱 살피던 한빈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봉투를 몇 번 돌리다가 동작을 멈췄다.

    한빈은 조용히 봉투의 한 곳을 눌렀다.

    그때 묘한 일이 일어났다.

    봉투가 저절로 열린 것이다.

    그 모습은 흡사, 나비가 날개를 펼친 것과 같았다.

    봉투를 연 한빈은 속을 혀를 찼다.

    역시 사천당가였다.

    독과 암기는 사천당가를 지탱하는 기둥.

    사람들은 사천당가 하면 독을 떠올리지만, 진짜 사천당가를 받치고 있는 것은 암기였다.

    저 봉투가 사천당가의 암기술로 만든 작품이었다.

    풀을 입힌 색지로 만든 것 같지만, 저것은 쇠를 두드려 종이처럼 납작하게 만든 봉투였다.

    한마디로 겉봉투의 장치를 통해 자신들의 암기 제조 기술을 자랑하겠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봉투에 들어 있는 서찰을 팽혁빈에게 전한 후, 가주 팽강위에게 물었다.

    “이 서찰을 전한 이는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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