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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18화 (218/621)
  • 218화. 강 건너 불구경 (8)

    “내가 무기라면 적은 대체…….”

    팽혁빈은 말끝을 흐리며 눈매를 좁혔다.

    한빈이 준 것은 그냥 가짜 피가 아니었다.

    철저히 남을 속이면서도, 복용한 이의 기력을 높여 줄 수 있는 보약에 가까웠다.

    한눈에 봐도 만드는 방법이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빈이 영약이 섞인 가짜 피를 준 이유는 무엇일까?

    팽혁빈이 완쾌되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누구로부터 숨기냐는 팽혁빈의 질문에, 한빈은 그저 적이라고 했다.

    적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에 적은 없었다.

    외부라면 몰라도 내부에서까지 이런 연극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하북팽가에 적이라니?

    그때 한빈이 답했다.

    “적을 속이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하는 것이 싸움의 기본 아닙니까?”

    “적이라? 적은 이미 가문에서 축출되지 않았느냐?”

    팽혁빈이 말하는 적이란, 정화 부인과 그 일당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물을 벗은 뱀이 도망칠 때 껍질까지 짊어지고 튈까요?”

    “…….”

    팽혁빈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다.

    한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멍청한 뱀은 없습니다.”

    “껍질이라? 그럼 우리 가문에 잔당이 남아 있다는 말이냐?”

    “있겠죠…….”

    “있다 한들 누가 가문에 해를 끼칠 수 있겠느냐?”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형님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흠.”

    “단순히 세가의 후계자 하나를 작살 내기 위함일까요?”

    한빈은 가문이라 안 하고 세가라는 표현을 썼다.

    이것은 이 문제가 하북팽가만의 일이 아님을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팽혁빈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눈매를 좁힌 팽혁빈이 물었다.

    “네 생각은 무엇이냐?”

    “아마도 적은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때를 기다린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은…….”

    “당연히 세가의 몰락이겠죠. 물론 우리 가문만을 노리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귓속말하듯 속삭이는 작은 목소리였지만, 한빈의 목소리에는 신념이 묻어 있었다.

    “…….”

    팽혁빈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일단 네 장단에 맞춰 주마. 하지만, 언제까지 맞춰 줘야 할지 난감하구나.”

    “적이 모습을 보일 때까지만 맞춰 주시면 됩니다.”

    “흠, 적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라…….”

    팽혁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때가 되면 형님께 적의 꼬리가 아닌 목을 썰 기회를 드리지요.”

    “…….”

    팽혁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는 한빈의 행동에 의문을 갖는 한편, 조심성과 치밀함에 놀라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더니 다급하게 속삭였다.

    “일단 피 한 번 더 토하시죠.”

    “…….”

    한빈의 말에 팽혁빈은 대답 없이 재빨리 붉은색 환약을 삼켰다.

    이어지는 기침은 덤이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튀어나오는 선혈.

    팽혁빈이 급하게 소매로 입을 막았다.

    소매에 뿌려진 붉은 선혈은 매우 선명했다.

    팽혁빈의 처소로 들어온 한빈은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방에 머물던 한빈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휴…….”

    “왜 그러느냐? 막내야.”

    “아닙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피곤에 찌들었지만, 표정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분명한 감정의 변화.

    팽혁빈도 마주 웃었다.

    “하하, 그래. 이제는 좀 쉬거라.”

    팽혁빈은 웃음의 끝에 한빈을 바라봤다.

    호의가 넘치는 눈빛이었다.

    지금 팽혁빈은 가문을 위해서는 반드시 소가주의 자리를 막내에게 맡겨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한빈의 말대로 연극에 동참하고 보니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완벽하게 치료되었다는 것이었다.

    신의조차 치료는커녕 원인도 알아내지 못했던 병이었다.

    그런데 막내가, 그것도 며칠 만에 완벽하게 병을 고친 것이다.

    신의를 넘어서는 뛰어난 한빈의 의술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의술뿐이 아니었다. 갑자기 달라진 막내의 모습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달마에게 무예를 배우고.

    화타에게 의술을 배우고.

    제갈량에게 지략을 배워야 했다.

    이대로라면 소가주 경쟁은 무의미했다.

    한빈에게 소가주의 자리를 넘겨주는 게 가문을 위해서는 백번 옳았다.

    다만 한 가지가 걱정되었다.

    그것은 가문이 한빈을 품을 수 있을지 하는 것이었다.

    팽혁빈이 한빈을 뚫어지라 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은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뒷산이 푸르름을 빛내고 있었다.

    물론 산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 얻은 초식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인급 초식 부창부수(夫唱婦隨)를 획득하셨습니다.]

    초식을 확인한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창부수란 춘추시대의 윤희가 한 말로, 서로 잘 도와주는 화목한 관계를 뜻한다.

    용린검법의 초식 이름이 괴이하기는 하지만, 이번 것은 아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창부수(夫唱婦隨) - 용린검법의 초식 중 쌍수(雙手)의 수법에 속합니다.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 합니다. 부부끼리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를 수도 있는 법입니다. 양손으로 각기 다른 초식을 펼칠 수 있습니다. 펼치는 두 개의 초식이 하나의 초식처럼 자연스럽습니다. 단, 용린검법의 흔적이 남은 초식들에 한합니다. 필요 공력 십 년. 지속시간 반 시진.]

    초식을 확인한 한빈은 자신의 양손을 바라봤다.

    두 개의 초식을 한 번에 펼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두 명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것.

    한빈은 새로 얻은 초식을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했다.

    그것도 잠시, 뒷산을 바라보는 한빈의 시선이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바뀌었다.

    한참 동안 뒷산을 살피던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재빨리 반대편 창문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물었다.

    “왜 그쪽으로…….”

    “급해서 그러죠, 형님.”

    한빈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웃었다.

    “막내는 막내야. 귀여운 녀석.”

    * * *

    같은 시각.

    하북팽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뒷산.

    상인 복장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하북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왼쪽 눈에 기다란 원통을 대고 있었다.

    한참을 하북팽가를 바라보던 그는 손에 쥔 기다란 원통을 접었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등짐에 원통을 넣었다.

    그 원통은 서역에서 들여온 천리경이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맑은 유리 몇 개를 원통에 겹쳐 놓은 물건으로, 천 리 밖을 보는 도구라 알려져 있다.

    실제 천 리를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꽤 먼 거리를 관찰할 수 있는 쓸모 있는 도구였다.

    그때, 사내의 뒤에서 황금색 비단옷을 입은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살짝 배가 나온 체구에 왼쪽 팔에는 산반(算盤), 즉 주판을 끼고 있었다.

    철로 된 주판에, 주판알은 황금과 은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자신이 부호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그의 기척을 느낀 사내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포권했다.

    “금선(金仙) 어르신, 여기에는 무슨 일입니까?”

    황금색 비단옷과 금선이라는 이름은 제법 어울렸다.

    그는 강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인 집단인 금와상단의 단주였다.

    별호는 금선, 본명은 현금수였다.

    본명보다는 별호로 불리는 것을 좋아하기에 금선이 이름처럼 불렸다.

    거기에 또 다른 별호를 붙여 금산반(金算盤) 금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금선은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네, 왕 총관.”

    “아, 그러시군요. 그럼 보고부터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왕 총관은 눈을 빛냈다.

    그는 금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말하자면 금선의 오른팔로, 어릴 적 금와상단에 들어와 금선의 오른팔이 되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인물.

    딱 보기에도 서른 중반도 안 되어 보이는 외모에, 눈에는 총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금와상단에서 총관이라?

    그것은 과거에서 급제한 서생 부럽지 않은 위치였다.

    왕 총관의 반짝이는 눈을 본 금선이 고개를 흔들었다.

    “보고는 생략해도 되네.”

    “생략해도 된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의 보고보다는 내 두 눈이 더 정확하지 않겠나?”

    “어르신의 눈이라니요? 혹시…….”

    “그 혹시가 맞네. 팽가의 상황은 내가 모두 파악했네.”

    “그럼 최근 돌아온 대공자의 상태도 아시고 계십니까?”

    “얼마 못 가겠더군.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만 가세.”

    “가다니요? 이제 감시를 안 해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어르신.”

    “병든 닭을 계속 지켜봐서 뭐하겠나?”

    “병든 닭이라면, 대공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대공자뿐 아니라 팽가 전체가 병든 닭이지. 이제는 좀 더 건설적인 일에 힘을 써야지.”

    “건설적인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네.”

    “그럼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어르신.”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준비해도 되네.”

    “그럼 일단 사천 지부에 연락부터 넣어 두겠습니다.”

    “그것도 내가 미리 손을 써 놨으니 왕 총관을 신경 쓸 필요 없네. 대신!”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자네는 먼저 사천으로 내려가 포섭해 놓은 인물들을 좀 신경 써 주게. 다만 관군은 조심하고.”

    “관군이라니요?”

    “오다가 곳곳에서 검문이 이루어지고 보았네. 그러니 괜히 야행복을 입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얘기야.”

    “네, 알겠습니다.”

    왕 총관이라 불리는 사내는 깊숙이 포권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뒤를 돌아 사라졌다.

    금선은 왕 총관이 있던 자리에서 하북팽가를 내려다봤다.

    오늘로써 하북팽가에 신경을 끊기로 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확인하니 소가주로 유력한 대공자는 병든 닭이 되었다.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은 생각보다 병세가 더 심하다는 점이었다.

    금선은 흐뭇한 표정으로 하북팽가를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이제 나도 사천으로 출발해 볼까…….”

    금선을 옆에 끼고 있던 주판알을 탁 튕겼다.

    촤르륵.

    황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주판알이 춤을 추듯 출렁였다.

    중천에 뜬 해 때문인지 그의 주판알은 더욱 반짝였다.

    그는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듯 황금색 옷자락을 펄럭이며 산에서 내려갔다.

    초록빛의 산자락에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은 화려해 보였다.

    하지만, 금선도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 * *

    한빈은 반짝거리는 주판알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누가 보면 저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무모함이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금선의 행동에 대해서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상계와 무가의 암묵적인 규율 때문이었다.

    상인들이 계약하기 전 상대를 철저히 조사하는 것은, 누구든 알고 있는 바였다.

    뒷조사하다가 들키면 계약을 위해서라고 얼버무리면 그만이었다.

    야행복을 입고 돌아다니다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저렇게 대놓고 상대를 조사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하북팽가와 금와상단 사이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거래는 있었다.

    저들이 이렇게 세가를 살피는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한빈이 저들의 대화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금선이라는 이름은 한빈도 알고 있었다.

    황금색 주판알을 튕기는 그는 강남에서는 꽤 유명했다.

    “팔선 중에 금선인가?”

    혼잣말을 뱉은 한빈은 눈을 빛냈다.

    잠시 후 산에서 내려온 한빈의 앞에는 심미호가 있었다.

    한빈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 부대주.”

    “네, 주군.”

    “금와상단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봐. 표면적인 거 말고. 금선을 중심으로 샅샅이, 그리고 은밀하게…….”

    “호호, 그거야 제 전문이죠. 며칠만 기다려 주세요.”

    “알았어. 이 일은 심 부대주만 믿을게! 그리고 경계 태세도 풀어.”

    한빈이 선심 쓰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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