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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16화 (216/621)
  • 216화. 강 건너 불구경 (6)

    [용린검법의 인연으로 이어진 자입니다.]

    이것은 한빈의 혼원보를 팽혁빈이 배웠기 때문인 것 같았다.

    사실 이제까지 용린검법으로 이어진 자의 혈맥을 관찰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하남정가나 적혈맹호대를 관찰해도 이런 글귀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진기를 흘려보낸 한빈은 이 글귀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팽혁빈의 혈도가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자신 혈맥을 꺼내 자신의 눈앞에 펼쳐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에 이런 상황이라면 한빈이 천하제일 명의라는 헛소문이 진실이 될 판이었다.

    놀람도 잠시, 한빈은 천천히 자신의 진기를 돌렸다.

    소주천의 경로를 따라 자신의 진기를 돌린 것이었다.

    한빈은 완맥에서 손을 떼고 팽혁빈을 바라봤다.

    “혹시, 형님의 상태를 아십니까?”

    “음.”

    살짝 침음을 토하는 팽혁빈의 모습에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시는 게 있으면 모두 말씀해 주시죠, 형님.”

    “솔직히 지금의 병을 알게 된 것은 우리 가문에 돌아오고 나서였다. 그러니까…….”

    팽혁빈의 설명을 이어 나가자 한빈을 눈을 크게 떴다.

    설명은 간단했다.

    강호를 누비다 보니 혈맥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저 몸에 문제가 있겠거니 하다가, 하남정가와 정화 부인을 일을 듣고 나서 몸을 살피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가문에 다시 돌아온 순간, 자신의 몸을 약하게 만든 것이 독이라 확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추측.

    자신의 몸에 은침을 찔러도 색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론은 독은 아니었다.

    의심은 가지만,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이 계속 몸이 약해지고 있던 것이었다.

    팽혁빈은 잠시 숨을 돌리며 심호흡을 했다.

    “휴.”

    그 모습에 한빈이 뭔가 생각난 듯 끼어들었다.

    “오해는 아닐 겁니다. 형님이 강호행을 나가시기 전 음식을 누가 챙겼는지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죠.”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 년 전 강호행을 나가기 전까지 음식을 담당하는 것은 정화 부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네,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정화 부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네 말이 맞다.”

    “네, 지금 적은 정화 부인이 아니라 이 병의 원인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적을 알아야 헛손질이라도 할 수 있는 법. 내 몸을 이렇게 만든 원인조차 알 수가 없구나.”

    “…….”

    “사실 가문에 오기 전에 성수신의 이의명 어르신을 만났단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성수신의 이의명이라면?

    강호에서 신의라는 칭호를 받는 인물은 딱 두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이의명. 다른 한 명은 마교에 있다.

    아무리 마교의 인물이라고 해도 사람을 살리는 데는 물불을 안 가리는 생사신의를 두고 신의의 칭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는 없었다.

    두 명의 신의 중 한 명을 만났는데도 이 상태라는 것은?

    한마디로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라는 것이다.

    한빈이 재빨리 물었다.

    “신의 어르신이 뭐라 하시던가요?”

    “혈맥이 죽어 가고 있다고 했다. 마치 구음절맥과도 같다고.”

    “구음절맥은 아니지 않습니까? 탁기가 혈맥을 막는 데 반해, 형님의 혈맥은 정상입니다.”

    “그건 신의께서도 이야기하셨다. 한 달 뒤에 방도를 알려 준다고 했지.”

    “한 달이라…….”

    “그런데, 갑자기 사라지셨다.”

    “사라지셨다고요?”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약초를 캐러 가셔서 소식이 없다고 하는구나. 그 어르신이야, 약초를 캐러 가시면 가끔 몇 년 동안 소식이 끊기기도 하는 분이 아니더냐?”

    “네, 그건 그렇죠.”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고개만 끄덕이던 한빈이 눈빛을 바꾸었다.

    이제부터 본론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한빈이었다.

    신의까지 만나고 온 팽혁빈이 과연 자신의 말을 믿을까?

    믿는다고 해도 아직 방법은 없었다.

    한빈이 말했다.

    “형님은 독에 당하신 것이 맞습니다.”

    “독이라? 신의조차도 독이라는 판정은 못 내렸는데…….”

    “그건 당연합니다. 피에 섞이는 것이 아니라 혈맥의 외관에 붙어 그 외관을 갉아먹는 독입니다. 그러니 은침으로 피를 검사해 봐도 멀쩡한 것이지요.”

    “그런 독이 있단 말인가?”

    “말하자면 좀 길지만, 남방에서 독초에 그런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독초라고 해서 그냥 독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조그마한 벌레에 가깝습니다. 그 벌레가 혈맥의 외관에 붙어 피에는 섞이지 않으니까요. 오래전에 사라졌다는 혈교에서 쓰던 고독(蠱毒) 중 하나인 혈고처럼요.”

    말을 마친 한빈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실 독에 대한 지식은 지난번 천독과의 대결 이후 더욱 해박해졌다.

    독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독(毒)의 구결을 흡수하며 알 수 없는 지식까지 같이 딸려 왔다고 해야 맞을 것이었다.

    아니면 용린검법에 속한 지식을 독의 구결이 깨웠든가 말이다.

    어쨌든 그 이후 독에 대한 지식이 늘어 신의도 밝혀내지 못한 팽혁빈의 병을 이렇게 밝혀낸 것.

    문제는 아직 한빈도 치료법을 모른다는 점이다.

    혈맥의 안쪽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내공으로 점차 태울 수 있겠지만, 혈맥의 외관이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렇게 밝힌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한빈이 불어 넣은 용린의 기운에 혈고가 반응했기에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만약 혈고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있었다면, 원인조차도 영영 밝히지 못했을 것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팽혁빈이 작게 웃었다.

    “하하.”

    “이제부터라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냥 누워 있다가 떠나는 것보다는…….”

    한빈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혹시 무인의 혈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신 적 있습니까?”

    “…….”

    “그건 마치 장기와도 같습니다. 그냥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순대에 내용물을 계속 쑤셔 넣다 보면 약한 곳은ㅋ 터지겠죠. 형님의 상황이 마치 그것과 같습니다.”

    “하하, 그렇다면 치료 방법은 없겠구나.”

    포기하는 듯한 팽혁빈의 표정에 한빈이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다행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죽기 전에 너 같은 천재에게 가문을 맡길 수 있어서 말이다.”

    “그건 형님의 착각입니다.”

    한빈이 못마땅한 듯 말하자 팽혁빈이 웃었다.

    “그럼 천재가 아니라는 말이냐?”

    “제가 왜 가문을 맡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소가주 후보 중 하나가 없어지면 당연히…….”

    “그게 선입견입니다. 제가 가주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형님.”

    “그야, 우리 가문이 가진 권력과 금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더냐?”

    “아닙니다. 권력까지는 몰라도 금력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원하는 가문은 힘 있는 가문입니다. 그 힘 중 하나가 형님이지 않습니까?”

    “…….”

    “힘없는 가문의 가주가 된다는 것은 힘이 아니라 짐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가볍게 웃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팽혁빈은 한빈이 의외라는 듯 헛기침했다.

    “흠.”

    “가문을 저에게 맡기시려면 형님이 회복하셔야 할 겁니다.”

    “허허.”

    팽혁빈은 어이가 없는 듯 웃었다.

    막냇동생인 한빈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빈의 얘기 중 논리에서 벗어난 점은 없었다.

    거기에 마지막 말에는 팽혁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담겨 있었다.

    팽혁빈은 놀라운 감정과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에 가슴이 저려 왔다.

    하지만, 자신의 병은 희망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한빈에게 무공을 전하려는 것은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었다.

    팽혁빈은 사실 한빈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한빈이 약자로서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자가 아닌 약자의 시각에서 가문을 본다면 위부터 아래까지 고르게 살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짝!

    그 소리에 놀란 팽혁빈이 물었다.

    “왜 그러느냐?”

    “방법이 있습니다. 독을 싹 흩어 낼 방법 말입니다.”

    “…….”

    팽혁빈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신의도 찾지 못한 방법을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낸다고?

    하지만, 괜한 희망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아무리 천재라도 삼 년이 걸려야 한다는 혼원보를 하루 만에 익힌 동생이었다.

    아니, 그냥 익힌 것이 아니라. 혼원보의 불완전한 부분까지 보충한 천재가 바로 동생이었다.

    그가 지금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팽혁빈의 눈빛에 엷은 욕망이 감돌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본능.

    그 표정을 본 한빈이 못을 박듯 말했다.

    “제게 맡기시죠, 형님. 대신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받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팽혁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팽혁빈은 한빈의 처소에 누워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한빈에게 맡겼다.

    완맥을 맡긴 것이 아니라, 수혈을 찍힌 상태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생명을 맡기는 행동.

    팽혁빈은 모든 것을 동생에게 건 것이었다.

    팽혁빈이 쌔근대며 잠들어 있을 때, 한빈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이 가장 먼저 쓴 방법은 기사회생.

    하지만, 팽혁빈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구 할은 회복했지만, 혈맥의 외관에 붙어 있는 혈고(血蠱)는 죽이지 못했다.

    다만 약해질 대로 약해져 너덜거리던 혈맥만을 회복시켰을 뿐이었다.

    이제 두 번째 치료 방법을 써야 했다.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동시에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바로 설화와 청화였다.

    청화는 설화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한빈은 설화에게 말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부탁한다, 설화야.”

    “네, 공자님.”

    설화는 침과 우혈랑검을 한빈의 옆에 두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아마 한빈의 처소를 맴돌고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청화를 바라봤다.

    키는 설화보다 크지만 갓 태어난 것처럼 얼굴은 어려 보였다.

    몸이 공독지체로 변하면서 갖게 된 외모였다.

    옛날 모습 그대로 설화에게 언니라고 했다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지금은 언니라는 호칭이 어느 정도 어울렸다.

    대충 청화를 살핀 한빈이 말했다.

    “이쪽에 앉아 완맥을 잡아라, 청화야.”

    “그냥 잡고만 있으면 되나요? 공자님.”

    “그래,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아라. 너에게는 기연이고 우리 형에게는 천운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청화는 메마른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화가 팽혁빈의 오른쪽 혈맥을 잡은 상태에서, 한빈은 왼쪽 손목을 통해 진기를 흘려보냈다.

    지난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혈고는 용린의 기운에 미친 듯이 반응했다.

    혈고는 원래 진기에 반응하기 마련이지만, 용린의 기운에 반응하는 모습은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

    사실, 이렇게 진기에 반응하는 성질 때문에 팽혁빈이 화경에 이른 것이었다.

    운기의 속도를 혈고가 높여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빈은 이것에 대해서도 파악한 상태.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차후 문제고, 지금은 혈고를 빨리 제거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혈관에 붙어 있는 수백 마리의 혈고를 제거할 수 있을까?

    일단은 해 봐야 했다.

    한빈이 진기를 흘려 넣자, 혈맥을 따라 혈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혈관이 요동치는 미세한 소리가 한빈의 귓가에 울렸다.

    이것은 혈고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한빈은 계속 진기를 돌렸다.

    스르륵.

    어느 정도 혈고가 모이자, 육안으로도 혈고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왼팔과 연결된 혈맥에 모이던 혈고가 오른팔 쪽으로 이동했다.

    피부가 불룩불룩 솟아오르는 모습은 한빈도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노도처럼 오른팔로 몰아치는 혈고.

    한빈은 재빨리 우혈랑검을 잡고 팽혁빈의 오른쪽 손목을 그었다.

    서걱.

    팔목이 잘릴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깊숙한 상처.

    그 상처를 통해 검은색 액체가 튀어나왔다.

    한빈이 외쳤다.

    “청화야, 상처를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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