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215화 (215/621)

215화. 강 건너 불구경 (5)

돌다리도 두드려 가면서 가라.

가까운 길도 돌아가라는 속담도 있지만, 지금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돌다리가 의심스러우면 뛰어넘으면 되고.

가까운 길은 함정에 걸리지 않게 눈 깜짝할 사이에 빠져나가면 될 터였다.

지금이 그렇다는 이야기였다.

한빈은 조용히 구걸십팔보를 바라봤다.

[융합편]

[구걸십팔보 – 개방 최고의 경공술. 용린의 기운을 담고 있는 무공입니다. 용린검법의 구결 중 속(速)을 사용하여 효과를 높일 수 있습니다.]

비급에 나와 있는 설명대로 이제까지는 속의 구결만 사용했다.

만약 다른 구결을 사용해서 구걸십팔보를 펼친다면?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빈은 실력편의 다른 구결을 사용해서 구걸 십팔보를 펼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이 내디디는 걸음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팡. 팡.

때마침 도착해 한빈에게 다가가려던 팽혁빈의 눈이 커졌다.

한빈을 바라보던 팽혁빈의 눈빛이 떨렸다.

그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그것은 한빈이 펼치고 있는 혼원보 때문이었다.

혼원보를 혼원벽력도의 기본이라 생각하며 몇 년 동안 수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혼원벽력도의 힘을 온전히 버텨 줄 정도로 하체를 단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하체라 함은 발바닥과 발목 그리고 관절 등 하체의 모든 부분을 뜻한다.

혼원보를 익히면 그 힘을 감당할 하체를 갖게 된다.

그 힘을 온전히 옮길 수 있는 걸음걸이를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최소 삼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천재라도 혼원보를 하루 만에 익히지 못한다.

신체가 변해야만 완벽한 혼원보를 익혔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신체의 변화가 하루 만에 찾아온다고?

환골탈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팽혁빈은 소매로 눈을 비볐다.

쓱쓱.

한참을 비비던 팽혁빈은 다시 한빈이 펼치는 혼원보를 바라봤다.

팡. 팡.

한빈이 디디는 걸음이 만들어 내는 파공성이 귓가에 울린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이 장면을 가주인 팽강위에게 말한다면 믿을 수 있을까?

아마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참을 보던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펼치는 혼원보와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보았을 때와는 조금 동작이 달라졌다.

한빈이 펼치는 혼원보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과 똑같았는데, 점점 달라지는 한빈의 혼원보.

팽혁빈은 잠시 망설였다.

한빈의 혼원보를 바로잡아 주어야 하나를 고민한 것이다.

처음에는 어떤 깨달음 덕분에 자신과 똑같은 동작을 펼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이라 판단했다.

팽혁빈은 조심스럽게 한빈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빈으로부터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힐끔 한빈을 바라본 팽혁빈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대였다.

팡!

한빈이 내디디는 진각이 다시 파공성을 냈다.

태산을 압도할 정도의 기세.

팽혁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의 동작이 자신이 펼치는 혼원보보다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한참을 보던 팽혁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발동된 것이었다.

무공이라는 것은 물 흐르는 대로 가는 것이 이치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무공도 자연의 현상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무 말 없이 한빈이 펼치는 혼원보를 바라보던 팽혁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한빈이 펼치는 혼원보와 자신의 동작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쓰윽.

자연스럽게 팽혁빈의 발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동작이었다.

이제는 변화를 주어야 했다.

움찔.

선입견이 그의 동작을 막았다.

십 년이 넘게 혼원보를 수련해 온 자신이었다.

하루밖에 안 된 한빈의 동작이 과연 무공의 이치에 맞을까?

한빈이 보여 준 자연스러움은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고민도 잠시 다시 팽혁빈의 발이 움직였다.

쓰윽.

혼원보를 수련한 지 하루밖에 안 된 동생이라는 선입견을 잊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을 잊자 다리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팡!

팽혁빈의 진각이 파공성을 냈다.

내디디는 걸음걸이에 전보다 더 힘이 실렸다.

팡!

팽혁빈은 머릿속에 그린 한빈의 동작을 따랐다.

이제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팡!

태산이 울릴 것 같은 기세가 걸음걸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팽혁빈은 무아지경에 빠져 눈을 감고 연무장을 누볐다.

자신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며 연무장을 누비던 팽혁빈이 눈을 뜬 것은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팽혁빈은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동생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혼원보를 가르쳐 준 것인데, 동생은 까마득하게 잊고 연무장을 누빈 것이 기억난 것이었다.

팽혁빈은 멋쩍은 표정으로 한빈을 찾았다.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연무장 가장자리에 멈췄다.

동생, 한빈이 조용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팽혁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먼 산을 바라보는 한빈의 행동이 마치 득도한 고승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슨 이유 때문일까?

팽혁빈은 지금 한빈의 모습에 깨달음을 방해받아 허탈해하는 모습이라 판단했다.

자신이 연무장을 누볐으니 한빈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줬을 것이었다.

팽혁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빈을 향해 다가갔다.

물론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먼산이 아니었다.

[혼원벽력도의 기본 무공 혼원보를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은 기분 좋은 문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구걸십팔보에 여러 가지 구결을 혼합해 보았다.

속(速)이 아닌 체(體)를 사용해 보기도 했고.

체(體)에서 심(心)으로 바꿔 보기도 했다.

결국 해답을 찾은 것이 력(力)이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력(力)을 적용하자, 시야에 가상의 투로가 보였다는 것이었다.

혼원벽력도를 펼칠 경우를 가정한 투로가 명확하게 나타났다.

덕분에 그 투로를 따라 연무장을 누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심화편의 성취라 글귀에는 나타났다.

그렇게 혼원보를 완벽하게 익히고 나자, 옆쪽에서 파공성 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보니 팽혁빈이 혼원보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와는 다른 투로와 느낌으로 진각을 밟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빈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혼원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한빈은 팽혁빈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연무장의 가장자리로 빠져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했다.

그 깨달음의 끝에 나온 것이 지금의 글귀였다.

한빈이 기분 좋게 글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고요해진 주변을 느끼고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팽혁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빈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오긴 아까 왔는데…….”

살짝 말을 얼버무리는 팽혁빈.

한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님께 혼원보를 마저 배워야겠지요.”

“아우님, 지금 놀리는 건가?”

“놀리다니요?”

“아우가 펼친 혼원보는 완벽에 가까웠네. 덕분에 내 혼원보를 수정할 수 있었고. 그런데 내게 배울 것이 있다고? 하하.”

기분 좋게 웃는 팽혁빈.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하루 만에 익힌 혼원보입니다. 어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빈말이었다.

자신의 혼원보가 완벽하다는 것은 비급이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순간 팽혁빈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한빈아.”

“네, 형님.”

“나한테는 솔직하게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구나.”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팽혁빈을 바라봤다.

팽혁빈은 감정 없는 시선으로 물었다.

“너는 내가 알던 막내 팽한빈이 맞는 것이냐?”

“아.”

한빈은 탄성을 터뜨렸다.

어떤 질문이 나올까 궁금했는데, 가장 원초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다.

사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한빈은 겨우 참았다.

긴 탄성의 끝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아니면 누굴까요? 이렇게 귀엽고 솔직한 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빈이 너스레를 떨자, 팽혁빈의 표정이 더욱 진지해졌다.

“내가 봤던 네 마지막 모습은 사 년 전이었다. 그때는 약해 빠진 모습이었지. 내가 약하다고 한 것은 육체가 아닌 정신이었다. 사실 나는 그 당시 강호행을 나가며 네가 걱정이 되었단다.”

“…….”

“둘째와 셋째의 등쌀에 견뎌 낼까 하는 걸 말이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전혀 다른 네가 있더구나. 거기까지는 기연이라 여기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 그런데 혼원보를 하루 만에 익히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구나.”

“형님.”

“말해 보아라. 어떤 말이든 믿겠다.”

“기연이라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기연이라…….”

“일단 비무 한 판 어떻습니까?”

한빈이 씩 웃으며 수련용 병장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당연히 허락할 것이라는 듯 말이다.

팽혁빈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머리를 식히는 데는 비무가 최고지.”

“네, 그 말이 맞죠.”

“어쨌든 고맙다, 아우야.”

“별말씀을요. 형님이 아니었다면 혼원보의 오의를 깨우치지 못했을 겁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팽혁빈이 혼원보에 대해 설명해 준 덕분에 한빈이 구걸십팔보를 통해 완벽한 보법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둘은 각자 병장기를 잡고 기수식을 취했다.

연무장에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착각은 아니었다.

그들의 기세가 그러했으니…….

팽혁빈이 달려들었다.

팡! 탁!

한빈이 바람처럼 날아오는 팽혁빈의 공격을 막으며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상대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옆구리를 찔렀다.

획!

한빈의 공격을 빙그르 돌며 피한 팽혁빈이 외쳤다.

“좋구나, 좋아. 오늘은 비무에 취해 보자!”

“네, 좋습니다.”

해가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을 때도 그들의 칼은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부(婦)를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은 팽혁빈을 통해 또 하나의 구결을 얻을 수 있었다.

완성하지 못한 초식은 두 개.

인급 초식은 이제 두 개의 구결만 더 있으면 완벽한 초식으로 변할 것 같고, 지급은 세 개의 구결이 남은 상태.

[인급(人級) - 부(夫), 부(婦)]

[지급(地級) - 만(滿)]

한빈이 구결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팽혁빈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럭!”

기침 소리가 내공이 실린 것처럼 연무장에 울렸다.

딱 봐도 보통 증세는 아닌 듯.

한빈은 재빨리 팽혁빈에게 달려갔다.

“형님.”

팽혁빈은 한빈이 다가오자 고개를 돌리며 기침을 했다.

“쿨럭!”

이번에는 그의 입에서 피가 한가득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

팽혁빈은 손을 내저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동안 심호흡을 하던 팽혁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못난 꼴을 보여 미안하구나. 조절을 하지 못한 내 탓이다.”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솔직하게 말해 주시죠, 형님.”

한빈은 팽혁빈에게 다가가 용태를 살폈다.

팽혁빈은 손바닥을 보이며 한빈을 만류했다.

“괜찮다고 해도.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제가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

“우연일지는 몰라도 형님께 완벽한 혼원보를 알려 드렸죠?”

“…….”

“그건 분명히 무인의 관계에서는 은인입니다.”

“…….”

“형님은 그 은혜를 제게 빚진 것이고요.”

“그래, 그건 인정하마.”

팽혁빈은 그제야 답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그 빚, 지금 갚으시죠.”

“빚을 갚다니…….”

“제가 형님의 완맥 한번 잡아 보겠습니다.”

“허허.”

“빚을 지고 그냥 입을 씻으실 겁니까?”

“허허.”

“제가 의원은 아니지만, 살펴볼 권리는 충분히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하여라.”

팽혁빈은 포기한 듯 오른팔을 내밀었다.

한빈은 재빨리 그의 완맥을 틀어쥐었다.

누가 보면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것 같다 오해할 정도의 속도였다.

그만큼 한빈의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한빈은 청연, 아니 지금은 이름을 바꾼 청화에게 했던 것처럼 진기를 흘려 넣었다.

뭐지?

한빈은 눈이 커졌다.

묘한 글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용린검법의 인연으로 이어진 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