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강 건너 불구경 (4)
[혼원벽력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한 기본 무공의 조각을 맞춰야 합니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중요한 것은 가문 밖에서 찾기를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용린검법이 말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혼원보와 혼원장 그리고 오호단문도가 불완전하다는 것이었다.
혼원벽력도가 문제가 아니라 기본 무공이 불완전하다면?
모래 위에 지은 성벽과 똑같다.
겉만 멀쩡할 뿐, 화살촉 하나에 우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금 본 비급의 글귀는 희망을 주는 동시에 불안감도 가져 왔다.
그때였다.
팽대위가 말했다.
“흠, 지금 그 눈빛 무섭구나. 하하.”
순간 한빈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급이 떠 있는 곳이 하필 팽대위가 있는 방향이었다.
어찌 보면 오해는 당연했다.
한빈이 말했다.
“하하, 무언의 압력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당주님.”
“흠, 서운하구나.”
“서운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는 당주가 아닌 숙부라 불러 줄 때도 된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숙부님. 호칭이 뭐 어떻겠습니까? 숙부님을 생각하는 제 마음이 중요하지요. 안 그렇습니까? 형님.”
한빈은 팽혁빈 쪽을 바라봤다.
팽혁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의 걱정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타격을 입는다면 가문은 강북 오대세가의 호칭을 다른 세가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한빈이 말한 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조심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팽혁빈에게 절실한 소원이 한 가지 있었다.
‘가문의 절기인 혼원벽력도만 재건할 수 있다면?’
그의 소원은 혼원벽력도 하나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아마 단숨에 강북 오대세가의 첫 번째 가문으로 올라설 것이었다.
팽혁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팽대위와 말을 마친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네 이야기는 가주께도 전달하마.”
한빈은 팽대위와 팽혁빈에게 묵례한 뒤 뒤돌아섰다.
몇 걸음 가던 한빈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형님, 약속은 잊지 않으셨죠?”
한빈의 말에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던 팽혁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래, 시간 맞춰 연무장에서 보자꾸나.”
“그럼 이따 뵙죠.”
한빈은 활짝 웃으며 집법당을 벗어났다.
점점이 사라지는 한빈의 뒷모습을 본 팽혁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벽까지 비무를 벌이고 맹호비고에 들어가서 죽을 고비를 넘긴 막내였다.
그런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기연이라도 얻은 것일까?
의문이 쌓였지만, 팽혁빈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대견스럽다는 듯 멀어져 가는 한빈을 볼 뿐이었다.
* * *
한빈이 처소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기척을 느낀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다가오는 속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감지한 것이다.
지금 다가오는 이는 다름 아닌 설화.
아니나 다를까.
사사-삭.
바람 소리와 함께 설화가 나타났다.
“공자님.”
다급한 목소리에 한빈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설화야.”
“저랑 좀 가 주세요, 공자님. 급해요.”
“알았다.”
한빈이 재빨리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설화의 다급함에 응대한 것이었다.
사사-삭.
순간 한빈의 신형이 사라졌다.
한빈은 속(速)의 구결을 모두 사용해 구걸십팔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한빈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설화의 처소.
덜컹.
문을 열자 그곳에는 까까머리의 삐쩍 마른 아이가 누워 있었다.
그 아이의 정체는 청연이었다.
한빈이 펼친 기사회생의 효용 덕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아이.
문제는 좀처럼 일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청연이 왜 일어나지 못하는지는 장자명도 밝히지 못했다.
지금 보니 호흡이 거칠었다.
“헉, 헉, 후-우.”
청연의 거친 호흡을 확인한 한빈이 물었다.
“언제부터 그런 거지?”
“일각이요. 갑자기 저렇게 숨을 헐떡여요.”
말투는 고저가 없었지만, 설화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다급한 것이다.
한빈은 가까이 가서 청연의 상태를 살펴봤다.
피부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푸르딩딩했던 피부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우윳빛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생기를 점점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청연의 맥을 짚었다.
완맥으로 진기를 흘려보냈다.
‘뭐지?’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은 죽어 가는 자의 혈도가 아니었다.
탁기가 전혀 없이 모든 혈도가 쭉 뻗어 나가 있었다.
완맥으로 흘려보낸 진기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찰나.
그만큼 혈맥이 순수하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 아이는 기연을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왜’라는 단어 하나에 방점이 찍힌다.
지금은 원인이 관건이었다.
독을 내공처럼 쌓았다가 천독에게 빼앗겨 생기를 잃고 시체가 되었던 아이.
천독은 독기와 생기뿐 아니라 그녀의 탁기까지 모두 빼앗아 갔었다.
그런 이유로 탁기가 한 톨도 없다는 것이 한빈이 결론이었다.
그것과 지금 죽어 가는 것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빈은 다시 한번 기사회생을 써 보기로 했다.
‘기사회생.’
한빈의 몸속에 맴돌던 용린의 기운이 완맥을 잡은 오른손으로 몰아친다.
질풍노도처럼 오른손에 모인 용린의 기운.
그 기운은 마치 자장가를 불러 주는 어미의 손길처럼 차분하게 그녀의 혈맥으로 흘러들어 갔다.
구 할을 복구시킬 수 있는 초식.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지금 이 상태가 구 할이 회복된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비급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비급이 펼쳐진 곳은 실력편의 구결이었다.
그것도 가장 아래쪽.
그곳에는 독(毒)의 구결이 있었다.
반짝이던 독의 구결이 하나 줄었다.
[독(毒) : 이십사(二十四)]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독의 기운을 청연에게 심은 것이었다.
독을 심었던 경우는 근묵자흑으로 상대를 통제할 때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의 구결이 청연에게 흘러 들어가다니?
한빈은 비급과 청연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였다.
설화가 손뼉을 쳤다.
짝짝.
그러더니 다급하게 청연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청연이 깊은숨을 토해 냈다.
“후.”
그 깊은 한숨의 끝에 청연이 눈을 떴다.
꽤 오랜 시간 청연을 간호했던 설화는 청연이 깨어나는 것을 한빈보다 더 빨리 알아차린 것 같았다.
눈을 뜬 청연이 설화를 바라봤다.
“고, 고마워요, 언니.”
“이제 괜찮니?”
“네, 괜찮아요. 공자님 덕분에 살았어요.”
청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물끄러미 한빈을 바라보던 청연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언니, 몸 좀…….”
“알았어.”
설화가 청연의 몸을 일으켰다.
침상에 앉은 청연은 먼저 설화에게 포권했다.
“언니, 감사해요. 제 생명을 구해 주신 거 절대 잊지 않을게요.”
“…….”
설화는 아무 말 없이 청연을 바라봤다.
뭐, 옆에 있던 한빈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계속 눈을 감고 있었지만, 청연은 모든 대화를 들은 것이 분명했다.
설화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한빈에게 매달렸는지를 청연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번에는 한빈에게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흠, 다행이구나.”
한빈은 팔짱을 낀 채 청연을 살폈다.
지금 현상에 대해 추측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빈이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청연의 눈동자였다.
아까와는 달리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 살핀 것이 피부색이었다.
완벽하게 하얗던 얼굴에 다소 생기가 돌았다.
이 모든 변화가 독의 구결을 심어 놓고 나서였다.
독의 구결을 하나 정도 쓴 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독은 언제든 회복할 수 있는 구결이었다.
시간이 지나야 회복되는 구결과는 달리, 독을 취하면 차오르는 구결이니 말이다.
생각을 이어 가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전생에 정의맹 서고에서 읽었던 자료가 생각난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독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천당가와 백독곡에서 공동으로 연구하던 완벽한 독인, 그들은 그 독인의 신체를 공독지체(空毒之體)라 불렀다.
공독지체의 특징은 간단했다.
독이 밥이며 독이 공기였다.
그리고 독이 생기인 것이다.
어떤 독이든 흡수할 수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어떤 독이든 배출할 수 있었다.
천하제일 독을 먹고 멀쩡할 수 있으며, 천하제일 독을 언제든 쏘아 낼 수도 있는 신체.
중요한 것은 공독지체로 들어간 독은 모두 무형지독으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무형지독이라는 것은 형태가 없고 냄새도 없는 독을 뜻한다.
만약에 저 아이가 공독지체라면?
“흠.”
백 년 만에 천하제일의 독인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공독지체가 나타난 것은 백 년 전 사천당가.
공독지체의 독인 하나로 사천당가는 백 년 전 천하제일 세가에 이름을 올렸었다.
한빈이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공자님.”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그렇고, 청연이라고 했지?”
한빈은 손을 흔들며 청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받은 청연이 말했다.
“말씀하세요, 공자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저, 저, 그러니까…….”
청연이 말을 더듬으며 설화와 한빈을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 설화가 친근하게 말했다.
“그냥 편안히 말해.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하고…….”
“네, 그거예요.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게.”
“그거라니?”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청연은 재빨리 말했다.
“여기가 집이라고 생각하고 언니와 공자님을 따르고 싶어요. 무슨 일이든 시켜 주세요.”
말을 마친 청연은 손을 모았다.
설화는 답하지 않고 한빈을 바라봤다.
자신이 답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청연을 바라봤다.
공독지체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완벽한 신체를 갖기까지는 이 년 반.
이 년 반이라?
어찌 보면 묘한 시점이었다.
그 시점은 한빈과 설화의 계약이 끝나는 시점이다.
운명일까?
잠시 고민하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좋다, 그렇게 하자.”
“네?”
놀란 설화가 다시 묻자, 한빈이 가볍게 웃었다.
“하하, 왜 그렇게 놀라? 네가 원하는 게 맞잖아, 설화야.”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리실 줄은 몰랐거든요.”
“대신!”
한빈이 짧게 외치자, 설화와 청연이 동시에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나와 설화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지?”
“…….”
청연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지금 정답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청연이 입을 열었다.
“저, 밥은 잘해요.”
“아, 밥을 잘하는구나…….”
“청소도 잘해요.”
“그래, 청소도……. 내가 기억해 주마.”
“그리고…….”
“그만하면 됐다. 앞으로 설화를 잘 따라야 한다.”
한빈의 말에 긴장에 끈이 풀린 듯 청연과 설화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휴……. 감사합니다, 공자님!”
“고마워요, 공자님!”
둘이 동시에 외쳤다.
한빈은 뒤돌아서서 품속의 은침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적혈맹호대 대원들에게 은침을 나눠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완벽한 공독지체를 이루기까지 시간이 남았다고 하지만, 공독지체를 가진 청연이 해 주는 밥을 먹는 데는 은침이 필수일 것 같았다.
그때 청연이 다급히 한빈을 불렀다.
“공자님.”
“응, 왜 그래?”
한빈이 발길을 멈추고 힐끔 돌아봤다.
청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전에 쓰던 이름을 버려도 될까요?”
“이름이라?”
한빈이 눈매를 좁히자 청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언니 이름 따라서 청화라고 하고 싶어요.”
“맘대로.”
한빈이 짧게 답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한빈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가 과거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설화를 진짜 언니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 * *
그날 오후.
한빈은 대충 끼니를 때우고 연무장에 섰다.
슬쩍 연무장을 둘러보니, 대공자 팽혁빈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한빈은 혼원보에 대해서 몇 가지 가정을 해 보았다.
혼원벽력도가 강호에 흩어진 용린검법의 흔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기본 무공도 비슷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