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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12화 (212/621)

212화. 강 건너 불구경 (2)

손가락을 제법 깊게 베인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의 눈은 손가락이 아닌 벽을 향했다.

자신의 손가락에 상처를 입힌 물건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한참을 벽을 관찰하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벽 쪽에서 은빛 광채를 띠는 선을 발견했다.

벽에 그려진 선이라?

충분히 의심이 갈 만한 상황이었다.

하남정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한빈은 조용히 그 선을 만졌다.

하남정가에서 본 것과는 다른 형태의 선.

스윽.

다시 손가락 끝에서 깊은 고통이 느껴졌다.

한빈은 그것이 단순한 선이 아닌 칼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칼날이 벽 전체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한빈에게는, 베인 상처가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한빈의 손가락은 벌써 아문 상태였다.

회복의 속성 덕분이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글귀가 나타났다.

[강호에 흩어진 초식 중 일부를 찾았습니다. 용린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초식을 깨웠습니다. 당신의 피는 잠들어 있는 초식을 깨우기에 충분합니다.

[초식을 흡수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초식을 흡수하기까지 남은 시간 두 시진.]

글귀를 확인한 한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다시 확인해 봐도 글귀는 변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이 두 시진이라니?

이제까지 이렇게 시간 제약이 있는 경우는 없었다.

두 시진이라?

어찌 보면 빠듯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 초식의 주인이 될 자는 자신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방법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그 글귀와 벽에 박힌 칼날을 다시 확인해 봤다.

아무래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빈은 상처에 신경 쓰지 않고, 벽에 박힌 칼날에 손을 대어 따라가 보았다.

서걱.

다시 손가락이 베이는 통증이 느껴졌다.

서걱.

계속 한빈은 칼날이 만들어 낸 선을 손끝으로 느꼈다.

한빈의 손끝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칼날이 만들어 낸 선으로 스며들었다.

뭐지?

한빈이 눈을 크게 떴다.

그의 피를 머금은 선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짙은 황금색이었다.

황금빛이 얼마나 진한지, 진짜 황금 중에서도 저렇게 영롱한 빛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세상에는 없는 황금빛 같았다.

마치 황금색 여의주처럼 말이다.

힐끔 벽면을 본 한빈은 이것이 제대로 된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한빈은 다시 손을 칼날 위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한빈은 벽에 박혀 있는 칼날의 끝까지 갔다.

스스슥.

한빈의 핏방울이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칼날로 흘러 들어갔다.

‘뭐지?’

한빈이 살짝 당황했다.

상처야 별 상관이 없지만, 황금색 실선으로 흘러 들어가는 피의 양이 문제였다.

전장에서 칼이 몇 군데 꽂혀도 이 정도로 피가 흘러나오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기호지세라고 했던가?

한빈은 멈출 수 없었다.

중간에 멈추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본능적으로 말이다.

실력편의 ‘복(復)’의 구결이 점점 줄어든다.

본래 사십 개였던 복(復) 자가 이제는 열 개밖에 남지 않은 상태.

무슨 마공도 아니고, 자신의 피를 바쳐서 초식을 확인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냐?

하지만, 의문은 길지 않았다.

용린도 자신의 피를 바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한빈은 계속 실선에 피를 주입했다.

그가 지나온 자리에 있던 은빛 실선은 이제 모두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이제 남은 실선은 오분지 일.

한빈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자칫 잘못하면 골로 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구결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일촉즉발.’

한빈은 순식간에 실선의 끝에 도달했다.

이것은 한빈의 꼼수.

어차피 피를 바쳐야 한다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빨리 가나 늦게 가나 황금빛 실선으로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피의 양은 똑같았던 것이었다.

한 번에 모든 피를 소모한 한빈은 눈앞이 핑 돌았다.

소위 말하는 급성 빈혈.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 한빈은 다른 초식을 모두 지우고 재빨리 기사회생을 펼쳤다.

스스-슥.

한빈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물론 몸 안에 필요한 피도 기사회생의 초식으로 회복되었다.

정신을 차린 한빈은 조금 떨어져 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빈이 핏방울이 만들어 낸 황금색 실선이 벽의 한가운데에 그려졌다.

지하에 있는 호롱불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지만, 황금색 실선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황금색 실선.

한빈은 그 실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봤다.

뭐지?

분명 강호에 흩어진 초식을 발견했다는 글귀를 확인했는데, 아무리 집중해서 봐도 비급의 흔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남은 시간 한 시진.]

시간이 줄어들어 있었다.

황금색 실선으로 만드는 데까지만 해도 꽤 시간을 허비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 번에 많은 피를 쏟아부은 한빈의 선택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허공에 떠 있는 글귀에는 아무런 단서도 나와 있지 않았다.

“흠,”

헛기침한 한빈이 다시 벽을 바라봤다.

이런 기연을 만든 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한빈이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길 바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까지 올려진 상황.

그런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다니!

한빈은 난감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반 시진.]

그 글귀를 본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월아를 뽑았다.

스르릉.

승부수를 띄워 보기로 한 것이었다.

한빈의 생각은 간단했다.

황금색 실선에 용린검법의 초식을 더 주입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초식을 확인할 수 있는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본능이 움직인 것이다.

한빈은 벽을 마주 보며 기수식을 취했다.

월아의 검 끝이 황금색 실선이 수놓아진 벽 끝으로 향했다.

순간 한빈의 몸에서 휘돌던 기운이 서서히 팔을 타고 월아를 잡은 손아귀로 전해졌다.

월아는 모든 파혼의 기운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우우-웅. 우우-웅.

검명을 토해 냈다.

* * *

해가 중천에 떠서 하북팽가를 비추고 있었다.

하북팽가는 전날 일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술렁였다.

모두가 오전 업무는 접어 두고 삼삼오오 모여 어제의 일을 떠들고 있었다.

물론 오전에 이렇게 한가하게 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가주의 명 때문이었다.

상방보검을 받은 것은 비밀로 하라는 황제의 명 때문에 잔치를 벌일 수는 없었지만, 하북팽가의 녹을 먹는 이들은 사흘간의 휴식과 은자를 받았다.

물론 세가를 경비하는 인원들에게 그럴 틈이 없기에, 다른 이들이 반은 은자에 더해 휴식에 대한 값을 얹어서 받았다.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하북팽가는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

그렇게 오전 동안 쉴 틈 없이 떠들던 이들도 간만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모두 저잣거리로 나갔다.

하지만,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각주와 당주들이었다.

어깨에 걸린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모든 각주는 다시 한번 조직을 검토해야 했다.

훌쩍 올라간 하북팽가에 위상에 맞춰,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실수에 대비하여 점검하는 것이다.

집법당주 팽대위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마치고 집법당으로 업무를 보기 위해 들어선 팽대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이 와 있는 것이다.

자신보다도 먼저 온 이는 다름 아닌 팽혁빈.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집법당주실에 쌓인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팽대위가 조용히 다가갔다.

기척을 느낀 팽혁빈이 재빨리 몸을 돌려 포권했다.

“숙부님, 오셨습니까?”

“그래, 왔다. 그런데 대체 이 시간이 무슨 일이냐?”

“상의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왔습니다.”

“상의한다는 것이 저기에 쌓인 서류를 검토하라는 건 아니겠지?”

“하하, 농도 지나치십니다, 숙부님. 제가 저 서류에 대해서 어찌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 알았다. 얘기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일단 목 좀 축이시죠.”

팽혁빈이 품 안에서 조그만 호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 호리병을 본 팽대위의 눈이 커졌다.

“이건 혹시 …….”

“네, 맞습니다. 금존청(金尊淸)입니다. 그것도 이십 년이 넘은 놈이지요.”

금존청이라면 명주 중의 명주.

팽혁빈이 꺼내 놓은 금존청은 그중에서도 상품에 속했다.

“오호, 그걸 내게 보여 주는 이유는?”

“당연히 드리려고 하는 거지, 딴 이유가 어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팽혁빈은 금존청을 팽대위에게 건넸다.

팽대위는 받자마자 호리병을 열었다.

순간 청아한 주향이 집법당에 가득 찼다.

팽대위의 눈이 반짝였다.

“진짜 금존청이 맞군, 맞아. 이십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은 되어 보이는데…….”

침을 튀기며 칭찬을 늘어놓는 팽대위를 뒤로한 채, 팽혁빈은 어디선가 술잔 두 개를 가져왔다.

“설마 혼자 드시지는 않겠지요?”

“하하, 이렇게 좋은 선물을 나 혼자 꿀꺽하면 그건 가칙 위반 아니던가? 술잔 하나 이리 주게.”

팽대위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날렸다.

휙!

그가 날린 술잔에는 투명한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공을 실어 던진 것이었다.

탁!

팽대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잡았다.

잡은 술잔이 팽이처럼 팽대위의 손에서 맴돈다.

팽대위는 씩 웃었다.

“묵은 먼지를 터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벽력장이 최고지. 그런데 내가 숨겨 놓은 술잔은 용케 찾았군그래.”

말을 마친 팽대위는 기분 좋게 호리병을 들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 안에서 빙글빙글 도는 술잔에 술을 부었다.

빙글빙글 도는 술잔에 술을 들이부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흘러넘치겠지만, 팽대위는 손바닥 안에서 팽이처럼 도는 술잔은 조금의 술도 흘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숙부님. 언제 벽력장을 익히신 겁니까? 벽력장을 대성하면 날아가는 나비도 손바닥 안에 가둘 수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군요.”

때마침, 핑그르르 돌던 술잔이 멈췄다.

“대성은 아니고 소성이라고 해야 할까? 여길 잘 보게.”

말을 마친 팽대위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술잔을 쥔 손바닥을 펼쳤다.

그때까지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술잔이 과자 부서지듯 스르르 부서졌다.

술잔은 팽대위의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부서진 것이 분명했다.

그 부서진 형태를 내공으로 옭아 넣고 있었고 말이다.

술잔에 따라 마셨다기보다는, 내공에 담아 술을 마셨다고 해야 정확했다.

그 모습에 팽혁빈이 탄성을 흘렸다.

“아, 그랬군요.”

“그래, 벽력장을 대성한 게 아니라서 이 모양인 게지. 사실 이 술잔은 일 년 전에 먹다 잃어버린 거라네. 찾으면 버리려고 했는데……. 자네도 한잔할 텐가?”

팽대위가 술병을 들자, 팽혁빈은 힐끔 남은 술잔을 바라봤다.

보이기에 가져온 것인데 일 년이라니?

팽혁빈은 다급하게 술잔을 옆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저는 됐습니다, 숙부님.”

“하하, 아쉽게 됐군. 그럼 용건을 슬슬 말할 때가 된 것 같은데…….”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팽혁빈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모습에 팽대위도 이제까지의 장난스럽던 표정을 지우고 구석의 탁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

팽대위가 천천히 앞서 나갔다.

그를 따라가는 팽혁빈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 * *

진룡파혼검을 펼친 한빈의 눈앞에 묘한 광경이 나타났다.

지하층 한쪽 벽이 모두 사라진 것이었다.

사라진 자리에는 황금빛 실선만이 남아 있었다.

하나 벽을 제거하고 보니, 그것은 황금빛 실선이 아니었다.

거대한 금판의 일부가 벽 쪽으로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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