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강 건너 불구경 (1)
탁, 탁.
고즈넉한 절간에 목탁 소리처럼.
한빈의 검과 팽혁빈의 칼이 고요했던 팽가의 밤을 깨웠다.
그 소리는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달은 점점 기우는 데 반해, 그들이 내는 소리는 점점 강렬해졌다.
이제까지는 간 보기였고 지금부터 본론이라는 듯, 한빈과 팽혁빈은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치열함은 없었다.
마치 다도를 즐기듯 그들은 우아하게 비무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서로 봐주는 것은 아니었다.
초식만을 써서 응대하되 기세는 있는 대로 피워 냈다.
둘의 기세가 연무장을 장악할 때쯤.
한빈은 팽혁빈의 눈을 바라봤다.
그는 진짜 이 비무를 즐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혼원보를 알려 주려는 듯 가끔 한빈의 발걸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의 여유라면 집법당주 팽대위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가문에서 축출된 이 공자와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무위.
한빈은 지금 그의 무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생에 팽혁빈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것은 한 가지 이유였다.
팽혁빈은 전생에 한빈이 가출을 한 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인물.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불투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세를 보면 전생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튀어나오기 마련.
하북이 아니라 강호 전체라는 주머니를 놓고 봐도, 팽혁빈은 송곳이 맞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전생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고?
의문이 생길 틈도 없이 팽혁빈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한빈이 재빨리 그의 칼을 흘려보냈다.
탁. 탁.
이번에는 한빈이 그의 어깨를 노리고 목검을 찔렀다.
탁.
팽혁빈이 한빈의 검을 막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둘의 동작이 빨라졌다.
속도뿐이 아니었다.
목검과 목도가 내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는 스님처럼 무아지경에서 목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눈이 커졌다.
팽혁빈의 몸 곳곳에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점이 아니라 진청색의 점이 팽혁빈의 몸에서 일렁거렸다.
한빈의 경험상, 진청색의 점은 화경 이상에서만 볼 수 있었다.
즉 구결을 나타내는 점으로 유추해보면 팽혁빈은 화경의 경지에 발을 들여놨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팽혁빈의 나이에 화경이라?
후기지수 중에 그를 따라올 자는 강북에는 없다는 의미였다.
물론 한빈, 자신을 제외한다면.
한빈은 형의 무공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빈이 팽혁빈을 향해 외쳤다.
“형님, 조심하십시오! 이제부터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이것은 진심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속도만으로 승부를 볼 것이었다.
상대인 팽혁빈도 내공을 쓰지 않고 초식을 펼치고 있으니까.
휙!
한빈의 검이 어둠을 가르고 달려갔다.
팽혁빈의 칼이 단단한 벽이 되어 검을 막아섰다.
탁.
검과 칼이 맞닿은 상태.
둘의 얼굴도 가까워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이 주먹만 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둘.
팽혁빈은 눈썹을 반달 모양으로 치켜올리며 답했다.
“좋지, 나도 최선을 다하마.”
순간 둘의 움직임이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둘의 보법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팽혁빈은 혼원보를 펼치며 연무장을 누볐고.
한빈은 몸에 익은 구걸십팔보로 대응했다.
* * *
둘의 비무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빡!
둘의 수련용 검과 칼이 동시에 부러졌다.
우지끈.
서로 손잡이만 남은 상태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헉. 헉.”
“휴우…….”
한숨을 들이키던 팽혁빈이 말했다.
“놀랍구나.”
“저는 형님의 도법이 더욱 놀랍습니다. 그 정도면……. 집법당주님보다 한 수 위가 아닙니까?
“아니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라. 내 도법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팽혁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기분 좋게 올라갔던 눈썹이 갑자기 꿈틀댔다.
심호흡을 한 팽혁빈이 다급하게 말했다.
“오늘 고생 많았다. 오늘 오후에 다시 보자꾸나, 동생아.”
“감사합니다. 오후에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형님.”
한빈이 가볍게 포권하자 팽혁빈은 손을 흔들었다.
순간 가벼운 기침 소리가 등을 돌린 팽혁빈에게 흘러나왔다.
“쿨럭.”
한빈이 그를 불렀다.
“형님, 괜찮…….”
한빈은 말을 끊고 조용히 팽혁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팽혁빈에게 흘러나오는 혈향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기침으로 피를 토한 것이 분명했다.
화경의 고수가 내공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토혈한다고?
한빈은 멀어져 가는 팽혁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허공을 바라봤다.
조금 전 비무에서 얻은 구결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부(夫)를 획득하셨습니다]
[인급 – 부(夫)]
한빈은 팽혁빈과의 비무에서 구결 하나를 얻었다.
하나밖에 못 얻은 이유는 중간에 진청색 점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맹호비고로 향했다.
밤새도록 비무를 벌였지만, 피곤하긴커녕 몸이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일신우일신라는 연계심법의 효과인 것 같았다.
숨만 쉬어도 하루가 새롭다는 설명답게, 하루 정도는 취침을 안 해도 거뜬했다.
맹호비고 근처까지 간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새벽이라서 그런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문 내를 순찰하는 무사들만이 한빈을 보고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한빈은 손가락을 튕기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소리 한 번에 설화는 달려올 것이었다.
하지만, 설화의 단잠을 방해하기는 싫었다.
설화는 이곳에 함께 오긴 했지만, 청연을 간호 중이었다.
아마 지금 시간이면 지쳐서 단잠에 취해 있을 것이었다.
청연은 천독에게 버림받았던 독인들의 우두머리.
설화의 부탁으로 일단 수하로 거두기로 한 상태였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각각 살수로 살아가던 설화가 청연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었다.
청연도 어릴 적 부모를 잃고 천독의 손에서 독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고개를 흔든 한빈은 주변을 살피다가 정과 망치를 구해 품 안에 넣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맹호비고로 향했다.
기감을 높여 주변을 탐지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한빈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상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흑선과 헤어지면서 한빈이 걱정했던 것은 흑룡단의 연결 고리였다.
만약에 한빈과 하북팽가가 표적이 된다면,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며칠간 관찰한 결과에 따르면, 흑룡단이라는 정체불명의 집단과 자신과의 연결고리는 완벽하게 끊어진 게 분명했다.
이제는 황실이 그들을 족치는 것을 당과를 먹으며 구경하면 되었다.
한빈이 막 결론을 내었을 때였다.
마침 한빈은 맹호비고의 앞에 도착했다.
한빈을 본 경비 무사가 재빨리 포권했다.
“사 공자님을 뵙니다.”
전과는 다르게 공손해진 모습에 한빈이 씩 웃었다.
아마 전날 황제의 성지에 대한 소문이 가문 내에는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었다.
뭐, 아쉬운 것은 그 성지마저도 가문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었다.
그렇기에 하북팽가의 무사들은 입이 근질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황제의 성지는 가문의 자랑.
하지만,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기에 무사들끼리 소문을 부풀리고 있던 중이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에 고생이 많네.”
“아닙니다. 이게 저희가 할 일입죠. 그런데 몇 층을 가십니까? 지시받기로는 오 층까지 모두 개방해도 좋다고 들었습니다. 오 층을 열면 되겠습니까? 사 공자님.”
“아니야, 그냥 맹호비고의 지하를 열어 주면 되네.”
“지하라고요?”
“지하면 충분하네.”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린 경비 무사는 뒤를 보고 턱짓했다.
뒤에 선 무사는 전과 마찬가지로 책자를 보고 문의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손잡이를 돌리자, 맹호비고의 안쪽에서 작은 소음이 흘러나왔다.
끼기-긱.
계단이 지하에 맞춰 움직이는 소리였다.
소음이 멈추자 무사가 양손을 내밀며 말했다.
“들어가서도 좋습니다. 그런데…….”
무사가 머뭇거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왜 그러나?”
“저, 저기,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그러니까…….”
“편한 게 말해 보라고, 우리 사이에 거리낄 것이 있었나?”
“그럼 편안히 여쭙겠습니다요. 저희 경비 무사들 사이에 내기가 붙었는뎁쇼. 그 내기인즉슨, 사 공자님이 부마가 되신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에 대해서…….”
한빈은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그러십니까?”
“어제 생긴 일에도 이리 헛소문이 도는데, 앞으로 어떤 소문이 더 생길까 걱정되서 그러지.”
“그럼 그게 헛소문입니까?”
“부마는 무슨, 자네 동료들에게 헛소문에 신경 쓰지 말고 일에 집중하라고 하게. 앞으로는 더욱더 경계에 신경 써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사 공자님.”
무사는 머리가 땅에 닿을 것처럼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씩 웃으며 맹호비고로 들어섰다.
한빈에게 물어본 무사는 돈을 제법 딴 것 같았다.
* * *
계단을 내려온 한빈은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본래라면 저절로 불이 켜져야 정상이지만, 이미 한빈이 모든 기관 장치를 못 쓰게 망가뜨려 놓은 상태였다.
한빈이 이곳에 온 것은 확인 사살을 위함이었다.
가문을 궁지로 몰아넣은 물건이 남아 있다면 철저히 없앨 생각이었다.
한빈은 어둠 속에서 안력을 돋궜다.
벽 대부분이 지난번 한빈이 만든 불씨에 시커멓게 탄 상태였다.
한빈은 가장 멀쩡해 보이는 벽으로 가서 불을 붙이는 곳을 더듬었다.
살짝 기름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직은 멀쩡해 보였다.
한빈은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기름 위에 불꽃을 내었다.
불꽃이 기름 위에 옮겨붙자, 금세 한쪽 벽에 조명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한쪽 벽에 있는 호롱불들이 켜지자, 맹호비고 지하층의 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나무로 된 책장들은 모두 재가 되어 바스라졌으며, 벽은 검은색으로 그을려 누가 봐도 쓸모없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하나 한빈이 여기서 찾는 것은 누군가의 발자국이었다.
가문을 모함할 누군가가 이곳으로 찾아왔다면, 분명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 재가 된 곳에 흔적 없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입구에서부터 허공답보로 와서 그 상태로 나갔어야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경공술이 아닌 비행술이라 불러야 했다.
화경의 고수도 참새처럼 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맹호비고 지하층에 대한 일은 오늘로써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 정도로 태워 먹었으면 책임도 져야 하는 법.
뭐, 아무것도 없는 지하층 정도를 태워 먹은 것은 실수 측에도 못 낄 것이었다.
툭. 툭.
한빈은 발로 잿더미를 뒤적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침입자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빈이 지하층에 대한 수색을 마치고 위쪽으로 막 계단을 오르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한빈은 혼잣말을 뱉으며 돌아섰다.
하지만, 뒤쪽에는 구석구석 깔린 어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묘한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데 기세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기세가 피어나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은 먹을 엎어 놓은 것처럼 검게 그을린 자국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원인이 없는 현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빈은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벽 앞에서 멈춘 한빈은 조용히 그을린 벽의 틈새를 바라봤다.
기세는 느껴지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한빈은 손으로 벽을 쓰다듬어 봤다.
순간, 손끝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보니 검날에 베인 것처럼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뚝. 뚝.
한빈의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