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뜻밖의 보상 (4)
뜻밖의 상황에 가주인 팽강위도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한빈은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가 제 해명입니다.”
“…….”
팽강위는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당당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팽강위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좌우가 아닌 아래위로.
한빈의 행동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
한빈의 행동은 명분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해명하라 명한 것은 팽강위.
그에 따라 해명한 것이 한빈이었다.
비록 갑자기 검을 뽑기는 했어도, 자신이 아닌 가문의 위상을 위해 뽑은 것이라 생각했다.
소가주 후보라는 직책에서 어긋난 행동은 아니었다.
팽강위는 힐끔 고개를 돌려 팽대위를 바라봤다.
집법당주인 동생의 의향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가주 팽강위가 보기에, 집법당주 팽대위는 상황을 가장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팽대위는 흐뭇한 표정으로 한빈을 보고 있었다.
사실 팽대위는 계약서를 자신의 손에서 빼앗아 간 한빈이 고마웠다.
거기에 더해 한빈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이렇게 각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소가주 후보가 있었던가?
단연코 한빈이 유일했다.
거기에 적당히 선을 지키는 행동 자체가 힘이 아닌 머리로 상대를 누르는 모습이었다.
팽대위와 팽강위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러던 중 팽강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팽강위의 진득한 웃음이 가주전에 울렸다.
순간 긴장감이 화롯불 옆의 눈덩이처럼 스르륵 녹았다.
하지만, 각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팽강위의 웃음에 긴장의 끈을 놓았지만, 한빈이 매의 눈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각주들의 표정을 살폈다.
마치 자신과 가주의 뜻에 반하는 자를 찾겠다는 표정이었다.
눈빛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한빈을 관찰하던 각주들이 조금씩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속으로 웃었다.
고개를 안 돌리고 자신의 눈을 마주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최소한 뒤통수는 안 칠 터이니 말이다.
사실 한빈과 적혈맹호대의 활약상을 모두 털어놓는다면 모두 할 말이 없을 테지만, 그중 일부분은 비밀로 하기로 강유찬과 약속한 바.
대부분의 활약상은 깊은 곳에 묻힌 상태였다.
그런 이유로 사파와 결탁했다는 헛소문을 이런 식으로 잠재울 수밖에는 없었다.
뭐, 아직까지는 수긍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들은 한빈을 굴러 들어온 돌로 보고 있었다.
더욱이 이 공자에게 한발 걸쳐 놓았던 그들에게, 한빈은 아직 눈엣가시였다.
한빈에게 묻은 먼지가 더욱 커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도(刀)가 아니라 검(劍)을 쓰는 소가주는 조금…….”
그들은 한빈에게 다른 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지, 혼원벽력도를 펼치지 못하는 가주가 있을 수 있던가?”
“가주 중에 오호단문도와 혼원벽력도를 비롯한 팽가의 수많은 절기가 사라질 걸세.”
몇몇 각주들은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듯 다시 침을 튀기며 논란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한빈의 옆으로 걸어 나왔다.
근육이 옷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거구의 근육질 사내.
그는 다름 아닌 대공자 팽혁빈이었다.
팽혁빈이 거도로 바닥을 찍었다.
쿵.
내공을 실어서 찍은 거도는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을 흔들어 놨다.
가주전에 침묵이 맴돌자, 팽혁빈은 가주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모두와 시선을 나눈 팽혁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이냐 도냐 하는 문제는 이미 논쟁이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
“제가 없을 때 바로 이 자리에서 막내와 비무로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제가 잘못 들었던 겁니까?”
“그게…….”
누군가가 한 발 앞으로 나와 팽혁빈의 말에 끼어들려 했다.
팽혁빈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아십니까? 다름 아닌 가주님과 집법당주님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같은 논쟁을 끄집어내시는 걸 보니 다들 한가하신가 봅니다. 그리고…….”
팽혁빈은 힐끔 고개를 돌려 가주 팽강위를 바라봤다.
팽강위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팽혁빈이 이렇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팽강위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팽혁빈은 다시 한번 계속해도 되는가를 물었던 것.
가주 팽강위의 허락에, 팽혁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저희 가문에 한가한 무인은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팽혁빈의 말이 끝나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재 하북팽가의 소가주 후보는 둘.
그런데 한빈의 경쟁자인 대공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자, 모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고요한 눈으로 한빈과 대공자 팽혁빈을 번갈아 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둘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은 듯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공자가 빠지고 자신들이 밀어야 할 소가주 후보인 대공자 팽혁빈에게 한 방 먹자,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다.
사실, 당황한 것은 한빈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는 형제애라는 것을 느낄 틈도 없었다.
대공자 팽혁빈과는 거의 마주칠 일도 없었다.
팽혁빈과 마주하고 다른 형제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하지만, 팽혁빈이 자신의 이익도 모두 버린 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게 형제인가…….”
한빈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팽혁빈이 물었다.
“지금 뭐라 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님.”
한빈은 형님이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무사 하나가 다급하게 가주전으로 뛰어왔다.
타다닥.
가주전으로 들어온 무사는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주 팽강위 쪽으로 달려갔다.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터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팽강위 앞에 선 무사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지금 정주섭 대인이 성지를 가지고 도착했습니다.”
“…….”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서 준비하셔야…….”
무사의 설명에 각주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성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혹시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사 공자가 사고를 친 게 아닌가 싶어서.”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몰렸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한빈은 팔짱을 낀 채 가주전 밖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작게 말했다.
“올 게 왔군.”
한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미 강유찬에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장운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비밀을 지키는 대신, 강유찬은 한빈에게 보상을 하기로 했다.
가주 팽강위가 모두에게 외쳤다.
“모두 성지를 받들 준비를 하여라!”
그 말과 동시에 각주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빈에 대한 의심도, 팽혁빈에 대한 서운함도 느낄 틈이 없었다.
타다닥. 타다닥.
무사들의 발걸음이 가주전에 울렸다.
잠시 후.
하북성의 고위 관료인 정주섭이 수많은 병사와 함께 가주전으로 들어왔다.
정주섭이 팽강위를 향해 외쳤다.
“황제의 성지를 받드시오!”
순간 팽강위가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의 성지를 받들겠습니다. 만세, 만세…….”
동시에 하북팽가의 다른 이들도 무릎을 꿇었다.
정주섭은 금빛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하북팽가의 팽한빈은…….”
정주섭이 성지를 읽어 나가자 고개 숙인 각주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말이 하북팽가에 내리는 상이지, 성지가 일컫는 이는 바로 한빈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내리는 황제의 상이라?
그들 중 예상한 이는 없었다.
사실, 한빈이 이런 상을 받는 것은 두 번째였다.
첫 번째 행사는 천수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북팽가가 아닌 한빈 한 명에게 내려진 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빈의 공으로 인해, 하북팽가 전체가 상을 하사받는 모양새였다.
성지를 다 읽은 정주섭이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병사 하나가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들고 왔다.
정주섭이 턱짓하자 병사는 상자를 열었다.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 * *
그날 오후 가주전.
가주 팽강위는 한빈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도 막내 한빈의 활약상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은 깊은 대화를 하고 싶었던 팽강위의 앞에는 찻잔 대신 술잔이 놓여 있었다.
술잔에서는 그윽한 주향이 주변으로 풍겨 나갔다.
달콤한 술 향기에 주변에 벌과 나비가 날아들 정도.
그 앞에 놓여 있는 술은 가주 팽강위가 가장 아낀다는 모향주(募香酒)였다.
모향주는 하북의 명주 중 하나.
잘 빚은 모향주는 십 리 밖의 벌들도 불러들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가주전 밖에 몇 마리의 벌들이 날아들 정도이니 거짓은 아니었다.
진득한 웃음을 피운 팽강위가 술잔을 들었다.
알싸한 화주가 그의 입술을 적혔다.
하지만, 팽강위에게는 기별도 가지 않는 상황.
팽강위가 그윽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들어라.”
“감사합니다, 가주님.”
“흠.”
팽강위가 못마땅한 듯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가주님.”
“둘이 있는 자리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주님이라 불러야겠느냐?”
“아, 죄송합니다. 아버님.”
한빈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팽강위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술잔을 들었다.
“좋구나, 좋아.”
“…….”
“이렇게 편하게 아비라 부르니 얼마나 좋으냐? 앞으로는 편하게 부르거라.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도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오늘 황제 폐하께서 내린 선물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활약이 있었던 것 같구나.”
“별일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강유찬 대인이 잘 얘기해 주신 듯싶습니다.”
“그것만으로 황제 폐하께서 저런 검을 하사하지는…….”
팽강위가 가주전 벽에 걸린 검을 가리키며 말끝을 흐렸다.
검을 보는 그의 눈에 살짝 습기가 차올랐다.
한빈도 그 검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 상방보검이라 불리는 검.
개국공신들에게 나눠 줬다는 황제의 신물이었다.
강북에서 저 검을 하사받은 가문은 딱 한 곳이었다.
바로 산서의 신창양가라 불리는 양가장.
대대로 충신을 배출한 가문인 양가장만이 상방보검을 받았을 뿐.
다른 무가와 관은 철저히 선을 그은 상태.
그런데 또 하나의 상방보검이 무가로 내려온 것이다.
다시 말해, 강북 무림만 놓고 본다면 이는 대단한 사건이라 볼 수 있었다.
상방보검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상방보검은 신하와 백성이 사용하는 검은 아니었다.
이것을 하사했다는 것은, 간신을 척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는 의미였다.
한 가문에 간신을 척살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라?
즉, 황제의 신임을 뜻한다.
현재 황제가 인정한 문파는 소림과 화산 그리고 무당이 유일하다.
그리고 가문으로는 강북의 양가장과 강남의 제갈세가.
이제 하북팽가까지 포함되었으니, 상방보검을 하사받은 가문은 세 곳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물론 저 검이 권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문의 위세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
그 상징적인 의미에 팽강위의 가슴은 아직도 요동치고 있었다.
흐뭇한 눈길로 한빈과 상방보검을 번갈아 보던 가주 팽강위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가문을 빛냈으면 응당 상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아라.”
“…….”
한빈은 말없이 팽강위를 바라봤다.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지 몰라서였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한빈은 금전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무엇을 요구해야지 잘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눈을 빛내던 한빈이 입을 열었다.
“혼원벽력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혼원벽력도를 배우고 싶다는 말이냐?”
팽강위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