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뜻밖의 보상 (2)
한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한빈은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하고 순서에 맞게 주머니를 나눠 줬다.
그런데 지금의 쪽지는 두 번째 주머니에 든 쪽지였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쪽지는, 한빈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적을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첫 번째로 준 쪽지의 내용은, 경천동지할 일이 생기면 재빨리 이 지역을 벗어나라는 것이었다.
땅이 흔들린다면 적이 미끼를 물었다는 의미.
미끼를 문 적을 해치우는 것은 한빈 하나면 충분했다.
잘못하면 적혈맹호대가 한빈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적혈맹호대가 하북팽가로 하루라도 빨리 향하는 게 유리하기에 내린 지시였다.
물론 일이 이렇게 꼬인 것은 우연이었다.
적혈맹호대가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에 맞춰 통로가 터지리라는 것은 한빈도 예측할 수 없었다.
바람의 방향을 바꾸고 일시를 예측하는 제갈량과 같은 재주는 없었다.
거기에 이무명이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 주머니를 꺼낸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무명의 실수와 우연이 겹쳐서 지금 강유찬과 병사들의 수장들이 머리를 맞대고 끙끙 앓는 광경을 낳게 된 것.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을 이무명이 했다고 밝힐 수 없는 일이었다.
강유찬이 보기에 이것을 전해 준 것은 이무명이 아닌 한빈이었다.
이 많은 병사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것이 사소한 오해였다고 한다면?
한빈의 눈썹이 꿈틀하다가 멈췄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두 가지라…….”
강유찬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첫째, 적이 보인다면, 흩어지지 말고 버텨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나타난 적은 분명 잔당은 아닐 터, 병사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곱게 보낼 수는 없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버틴다면 희생만 낳을 텐데?”
“이 주변에는 강유찬 대인과 홍 사부님 등 수많은 고수가 있지 않습니까? 적의 발목만 잡아도 성공이라 생각했습니다.”
“오호, 말이 되는군. 그럼 두 번째는 무엇인가?”
“두 번째는 지금처럼 폭발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지금 일어난 경천동지할 흔들림이 지진이 아니라 폭발이라고?”
조금 놀라는 모습이었다.
한빈은 장운현 지하 통로의 폭발까지 모두 적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네. 적이 무엇을 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운현 밑의 몇 군데를 폭파시켰습니다. 만약에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가 달려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흠.”
강유찬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것도 잠시 그의 눈이 커졌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손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린다.
조금 전 일어난 두 번째 폭발을 떠올린 것이다.
떨리던 손이 멈추고 강유찬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 말을 적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뭐, 어쩌다 보니 그들의 발목을 묶은 결과가 되었지만,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때 강유찬이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가 그 쪽지를 보고 마을로 달려갈 수도 있지 않았던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고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한빈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순간 강유찬은 주위 군관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빈이 준 쪽지를 해석하느라 이렇게 모여 있었으니 말이다.
강유찬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한빈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맙네. 자네는 제갈공명의 현신일세. 내 자네의 지략을 황제 폐하께 보고해 자네를…….”
강유찬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강유찬의 본심이었다.
나라에 필요한 건 백 명의 고수가 아니었다.
백 명의 고수를 움직일 한 명의 지략가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 한 명이 백 명의 고수를 천 명처럼 쓸 수도 있고.
백 명의 고수를 열 명처럼 부려 허무하게 전쟁에서 패배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것은 나라가 인재를 보는 관점이고, 무림에서 보는 관점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 강유찬의 눈에는 한빈이 화경의 고수 열 명보다도 소중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빈은 손을 내저었다.
“그러지는 마십시오, 대인.”
“아닐세…….”
“저는 제갈량이 아닙니다.”
한빈이 재빨리 강유찬의 말을 잘랐다.
조금 예의에 어긋나 보여도 낯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천거라도 한다는 말이 나오면 곤란해진다.
한빈이 있을 곳은 관이 아니라 무림이었다.
반면 강유찬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마치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한빈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
한빈을 말없이 보던 강유찬이 입을 벌렸다.
제갈량이 아니라고 한 한빈의 말이 뜻하는 걸 알아낸 것이었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했던가?
그래서 생긴 말이 바로 삼고초려 아니던가?
한빈의 뜻은 분명했다.
황제가 세 번을 찾아와도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착각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유찬이 눈을 반짝였다.
“내가 한 말은 잊게.”
“네, 알겠습니다.”
한빈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뒤돌아서려 할 때였다.
군졸 하나가 황급히 뛰어왔다.
강유찬의 앞에 선 군졸이 예도 갖추지 않고 말했다.
“황제 폐하의 성지입니다.”
그 말에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강유찬을 뺀 나머지 장수들은 바닥에 칼을 내려놨다.
오직 강유찬만이 한쪽 무릎을 꿇고는 왼손으로 바닥에 칼을 찍고 있었다.
이는 전쟁 중에 참가한 장군은 절대 칼을 내려놓는 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성지를 받을 때라도 말이다.
그때 병사가 성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번 역병을 정리한 금의위의 수장 강유찬에게…….”
성지를 읽어 나가자 모두의 어깨가 들썩였다.
바닥을 향해 있는 그들의 시선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내용이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역병이 진압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번 임무에 참가한 장수들에게 황금과 곡식을 내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대외적인 공표.
황제도 이번 역병이 인위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강유찬에게는 별도의 밀지를 내렸다.
밀지를 간단히 요약하면, 역병과 적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은 소문을 낳기 마련이다.
거기에 더해 이번에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언질도 있었다.
* * *
그날 오후.
이제 하북팽가로 떠나려는 한빈 일행을 강유찬이 잡았다.
“잠시만 기다리게!”
“왜 그러십니까? 대인.”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는가?”
“네, 그러죠.”
“고맙네. 그리고 자네도 따라오게.”
강유찬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것은 서재오였다.
막사 안, 강유찬은 커다란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들었다.
입가에 가져간 찻잔 너머로 한빈과 서재오가 보인다.
지금은 한빈에 대한 칭찬으로 강유찬의 입술에 침이 마른 상태.
차로 입술을 적신 강유찬은 시선을 서재오에게 옮겼다.
서재오를 바라보는 강유찬의 눈빛은 한빈을 바라보던 때와는 또 달랐다.
한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인재를 영입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 들어가 있다면, 서재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마치 가족을 바라보는 듯한 애정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왜일까?
바로 화산파라는 한 문파로 엮인 인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혈연만큼이나 강한 관계.
강유찬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화산파를 빛내 줘서 고맙네, 사질.”
뜻밖의 말에 서재오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한빈을 향해 칭찬을 늘어놓았을 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들었다.
거기에 더해 강유찬과의 첫 만남이 어땠던가?
매화삼경과 매화 패를 찾기 전까지는 화산파로 돌아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 그였다.
이렇게 막사 안으로 끌고 와서 하는 말이 칭찬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다소 당황한 표정을 본 강유찬이 말을 이었다.
“여럿이 있는 곳에서 자네를 칭찬하면 팔불출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해서 이리 오라 했네.”
서재오는 그제야 마주 웃을 수 있었다.
“아닙니다, 사숙. 어차피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백성을 구할 기회가 있는데 본문의 매화검수가 뒤로 물러서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본문의 가르침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오호, 많이 변했군.”
“…….”
서재오는 아무 말 없이 강유찬을 바라봤다.
사실 그를 바라보는 건 아니고 잠시 생각에 잠긴 것이었다.
강유찬의 말대로 서재오는 많이 변했다.
다른 때라면 이런 낯간지러운 대답도 못 했을 것이었다.
화산파의 가르침이 아니라 한빈의 영향 때문이었다.
한빈이 얄밉긴 하지만, 묘하게 한빈을 닮아 가는 서재오였다.
장운현에서의 일을 기점으로 얄미운 마음도 희미해졌다.
‘백독불침이라…….’
강유찬을 앞에 둔 지금도 서재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단어가 맴돌고 있었다.
장자명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번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백독불침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백독불침이라?
말이 좋아 백독불침이지, 화산파에서 백독불침의 경지를 이룬 자가 얼마나 될까?
아마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그들마저도 독에 대한 내성이 있는 것이 아닌 내공으로 독을 밀어 낼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자연스레 독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내공과는 관계없이 상대의 독수에 대항할 수 있으니까.
이 모든 것이 팽가의 사 공자, 한빈이 준 기연이었다.
그때 강유찬이 상념에 잠긴 서재오를 깨웠다.
“이제 화산파로 돌아갈 텐가?”
“아닙니다. 남은 강호행 기간 동안, 천수장에 남겠습니다.”
“천수장에 남겠다고?”
강유찬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서재오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강호를 주유하는 것보다 천수장에 남는 것이 더 많은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험이라…….”
강유찬은 말끝을 흐리며 옆에 있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도 고개를 갸웃하는 것을 보니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강유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묘하게 팽가의 사 공자, 한빈이 가는 곳에는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모든 일이 올바른 방향으로 잘 마무리된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만 해도 한빈의 제보가 없었다면 장운현뿐 아니라 하북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던가?
황제가 있는 북경과는 지척이 아니던가?
이곳의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고 하면?
황궁이 발칵 뒤집힐 것이 뻔했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 일어난 일은 반역에 준하는 일이라 강유찬은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강유찬은 한빈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을 걸세.”
“기대라니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황제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릴 걸세.”
“폐하의 백성으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한빈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 입맛을 다시면서 말이다.
고개를 숙인 한빈의 어깨를 강유찬이 가볍게 토닥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강유찬은 왼손에는 두 개의 가죽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유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으며 가죽 주머니 중 하나를 한빈에게 건넸다.
“이거 받게.”
“이게 뭡니까? 대인.”
“하북팽가에 도착하면 열어 보게. 단 혼자 있을 때 열어 보기를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