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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203화 (203/621)
  • 203화. 경천동지(驚天動地) (4)

    한빈의 입꼬리가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상대가 가면을 벗어 버리고 무위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한빈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한빈이 이번 함정을 파 놓은 진짜 이유는 잔당을 처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의 머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머리를 못 잡는다면 적의 정체라도 알아야만 했다.

    적은 자신을 아는데, 자신은 적을 모르는 상황.

    덕분에 한빈의 뒤통수는 항상 뻑적지근했다.

    그래서 보물이라는 미끼로 함정을 파 놓은 것이었다.

    장운현이 흔들릴 정도의 폭발이 통로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근원지에서 살아남은 놈이 있다라?

    그런 이가 보통의 무인일 수가 없었다.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적의 머리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지금도 점점 기세가 강해진다.

    어찌 보면 한빈이 찾는 자의 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한빈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막상 좋아하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는 상대의 무위에 맞춰 계산을 다시 해야 했다.

    쾌검난마를 운용하며 나머지 초식들을 적절히 섞는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흑선은 화경 중에서도 사 경 이상임이 틀림없었다.

    만약 사 경 이상이라면 정면 승부로 꺾을 수 있을까?

    계산을 마친 한빈은 힐끔 복도를 바라봤다.

    때마침 한빈이 뿌려 놓은 염료와 독이 야명주를 오염시켰다.

    스르륵.

    칠흑 같은 어둠이 통로를 덮기 시작했다.

    살짝 남은 빛 속에 흑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흑선은 당황한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 눈웃음을 짓는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다음 장면에서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흑선의 행동 때문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전에 상대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데, 흑선은 눈을 감았다.

    ‘혹시 격장지계?’

    한빈은 고민을 떨쳐 냈다.

    어둠 속에서 누가 더 유리할까?

    후각에 예민한 자신이 한 수 위였다.

    한빈은 경지의 차이를 쾌검난마와 어둠으로 메꿀 생각이었다.

    곧,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이 매한가지인 상황이 찾아왔다.

    한빈과 흑선의 숨소리가 동시에 멈췄다.

    완벽한 암흑.

    한빈이 들리지 않을 정도의 미약한 호흡을 뱉어 냈다.

    “후.”

    동시에 일촉즉발의 수법으로 재빨리 검을 뻗었다.

    슝!

    파공성을 내며 앞으로 뻗어 가는 월아.

    월아가 향하는 곳은 흑선이 있는 곳.

    한빈의 후각은 정확했다.

    월아의 검 끝이 흑선의 몸에 닿으려 할 때였다.

    챙!

    흑선의 검이 월아를 튕겨 냈다.

    그뿐 아니라 흑선의 검이 앞으로 뻗어 나온다.

    피슝!

    월아의 검날로 날아오는 흑선의 검을 비스듬히 쳐 냈다.

    챙!

    방향만 바꿔 놓은 뒤 성동격서의 수법으로 다시 흑선을 찔러 들어갔다.

    상대의 무위는 한눈에 봐도 한빈보다 위.

    무공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을 때, 공격에 성공할 확률은 이 할.

    이것이 성동격서에 대한 비급의 설명이었다.

    이제까지는 다섯 번 공격하면 한 번은 성공했었다.

    지금도 성동격서의 수법으로 일단 찔러 가다 보면 한 번을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챙. 챙. 챙. 챙. 챙!

    징을 두드리는 듯한 다섯 번의 격돌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허무하게 모두 막혀 버린 성동격서.

    문제는 순식간에 이십오 년의 공력이 날아갔다는 점이다.

    이대로 성동격서를 계속 내지른다면?

    흑선을 상대할 공력이 모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후의 상황은?

    뭐, 불 보듯 훤했다.

    그때였다.

    흑선의 검이 날아왔다.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 펼쳤던 중원일통에 비하면 가벼운 초식이었다.

    진정한 무위를 개방하고는 가장 기본적인 초식으로 공격해 온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월아를 들었다.

    전생에 수없이 봐 왔던 종남 삼십삼검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첫수.

    천점일통(千點一通)이었다.

    천점일통은 천 개의 점을 찍으면 어떤 상대든 뚫을 수 있다는 묘리를 담고 있는 초식이었다.

    즉, 물방울로 바위를 뚫을 수 있다는 수적천석(水滴穿石)의 원리를 담은 초식.

    바늘처럼 날카로운 흑선의 공격이 들어왔다.

    챙. 챙.

    뒤쪽으로 물러나며 계속해서 흑선의 공격을 튕겨 내던 한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뭐지?

    초식은 물방울로 꾸준히 바위를 때리는 듯한 천점일통인 데 반해, 위력은 중원일통에 버금가기 때문이었다.

    가랑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폭우라?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 한빈의 시야에는 처음 본 글귀가 보였다.

    [마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쾌검난마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비급이 알려 주는 정보가 맞았다.

    마기가 없어진 것은 흑선이 본신의 무력을 개방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처음에 보였던 끈끈한 마기를 더는 드러내지 않았다.

    마기와 도가의 무공을 동시에 사용하는 고수라?

    그런데 그 고수의 경지가 화경, 그중에서도 사 경에 다다른다고?

    답을 찾지 못한 한빈은 일단 시간을 벌기로 하고, 쾌검난마의 초식 대신에 금상첨화의 초식을 사용했다.

    금상첨화는 신체 중 한 곳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초식.

    한빈이 선택한 것은 왼팔이었다.

    한빈은 금상첨화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해 보았다.

    그 결과 금상첨화를 왼팔에 적용했을 때는 금강석과 같이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막지 못한 흑선의 일부 공격은 왼팔로 막는다.

    그리고 그 힘의 일부를 돌려보내면 일단 승산이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자승자박을 펼쳤다.

    ‘전광석화.’

    ‘자승자박.’

    ‘금상첨화.’

    세 초식이 어우러지자 한빈의 몸속의 진기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진기가 균형에 맞게 다시 재분배된다.

    동시에 한빈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같은 초식으로 한빈을 공격하던 흑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흘러들어 오는 상대의 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 검기가 자신의 내공과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혹시 이화접목?’

    그도 한빈과 싸웠던 다른 이들처럼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검을 멈추지는 않았다.

    흑선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달음은 화경 중 사 경에 속하지만, 본신의 내공만은 화경 중 일 경에 불과했다.

    사 경의 무위를 보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

    그렇기에 빨리 승부를 봐야 했다.

    흑선이 본 한빈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였다.

    이렇게 판단을 내린 근거는 간단했다.

    자신과 백선이 강호에서 은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자였기 때문이다.

    흑선의 검이 노한 듯 검명을 토해 냈다.

    우우-웅.

    웅.

    흑선의 노기가 점점 짙어졌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 흑선의 앞에 희미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은 삼십 년 전 처음 마주한 괴인의 얼굴이었다.

    오래전, 강호의 이름 모를 괴인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납치했다.

    물론 그들을 납치한 때는 모두 달랐다.

    하지만 납치한 아이들에게 한 일은 모두 같았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무공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이었다.

    그 괴인은 여덟 명의 아이들을 훈련시킨 뒤, 그들의 기억을 삭제하고 금제를 걸었다.

    그러고는 여덟 명의 아이들을 다시 문파로 돌려보냈다.

    문파의 최고 후기지수로 성장한 아이들은, 어느 날 동시에 사라졌다.

    이것이 팔선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였다.

    여덟 명의 아이들은 문파의 비사와 비급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각 문파의 살아 있는 비고였다.

    덕분에 괴인은 힘도 들이지 않고 주요 문파들의 비급과 약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 있는 문파의 비급과 약점을 털어놓은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정답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흑선은 괴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강호의 음지에서 활동했다.

    흑선이 어둠 속에서 그린 얼굴은 바로 그 괴인이었다.

    괴인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흑선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소모되는 내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흑선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그 분노는 한빈을 향한 것이 아니라 괴인을 향한 것이었다.

    죽이고 싶지만, 실력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고 강호를 떠나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납치된 아이 중 흑산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기억이 삭제된 채 금제에 걸려 여전히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

    다행히 흑선은 상단전이 개방되는 기연을 얻어, 금제를 풀며 모든 기억을 찾은 상태.

    이는 흑선이 하늘이 내렸다는 천령지체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갈 수 없었다.

    백선을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하며 살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임무가 중요했다.

    이번 임무만 끝나면 백선의 금제를 풀고 강호에서 은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산산이 부순, 방해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빈이었다.

    흑선은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온몸이 저릿저릿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만약에 누군가 흑선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악귀처럼 변한 그의 모습에 놀라 자빠질 정도였다.

    순간 상대가 빠른 속도로 뒤로 빠졌다.

    흑선은 재빨리 앞으로 상대를 쫓아갔다.

    어둠 속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흑선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코끝처럼 씰룩이는 그의 귀였다.

    바로 그 귀가 어둠 속에서도 상대를 정확히 공격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던 한빈은 무심코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밟았다.

    삐끗.

    발을 헛디딤과 동시에 어김없이 한빈의 허점을 파고드는 흑선의 검.

    한빈은 재빨리 월아로 그의 검을 쳐 내었다.

    사실 그의 검을 쳐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리만 들리지만, 한빈의 몸 가까이 오면 묘한 선기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마치 종남파의 득도한 도인과 싸우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한빈이 밟았던 무기가 날아가 뒤쪽으로 떨어졌다.

    쨍.

    순간 흑선의 검이 그쪽으로 향했다.

    한빈은 이제야 흑선의 비밀을 눈치챘다.

    자신이 후각에 예민한 것처럼 흑선은 청각에 예민한 것이었다.

    적의 청각을 교란하는 것은 한빈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한빈이 상대를 교란하기 위해 은침을 뒤쪽으로 날리려 할 때였다.

    어디선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쩌적. 쩌-억.

    분명 벽에 금이 가는 소리인데 후각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한빈은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상대해야 할 적이 바뀌었음을 알아챈 것이다.

    검을 멈춘 흑선이 한빈에게 달려왔다.

    동시에 귓전을 울리는 굉음.

    꽈꽈-쾅.

    검으로는 흠집도 나지 않았던, 금강석처럼 단단한 천장이 내려앉은 것이다.

    다가오는 흑선보다 더 빨리 한빈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육포가 될 터.

    둘은 공통의 적을 마주한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야명주가 박힌 곳이 나왔다.

    한빈이 힐끔 흑선을 바라봤다.

    놈도 당황한 듯 한빈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는 서로를 볼 수 있는 상태.

    하지만, 한빈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것은 놈도 마찬가지.

    한빈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듯 따라오고 있었다.

    흑선은 한빈이 이곳 통로를 잘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러지 않고서야 미로처럼 이리저리 뻗은 통로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찾아갈 수 없는 일이었다.

    흑선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면, 백선은 그놈의 노리개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흑선은 달려가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통로 앞 상황을 모르니, 언제 공기가 없어질지 몰랐다.

    화경의 고수라도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을 터.

    뒤쪽에서 따라오는 흑선의 움직임에는 신경 쓰지 않고 한빈은 재빨리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삭.

    그는 재빨리 후각에 집중했다.

    방향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이 비밀 통로는 이전에 공손명후와 추격전을 펼쳤던 곳.

    아직도 천리추종향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한빈은 미친 듯이 속도를 높였다.

    이젠 상대에게 정보를 알아내야겠다는 목적도 잊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잘못해서 이곳에 묻히게 된다면, 아마 우스운 묘비가 새겨질 것이다.

    -천하제일인이 될 뻔한 자, 이곳에 묻히다.

    쩌적.

    앞쪽의 벽과 천장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한빈은 ‘속(速)’의 속성을 모두 쏟아부어 구걸십팔보를 펼쳤다.

    사사삭.

    한빈의 눈앞에 넓은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은 와불의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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