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경천동지(驚天動地) (3)
공손명후의 추리는 정확했다.
한빈이 보물이라 가져다 놓은 것은 수천 근의 기름이었다.
그중에는 식물에서 짠 기름도 있었고, 돼지나 생선에서 나온 기름도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친숙한 냄새가 풍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밖으로 새어 나가는 냄새의 일부일 뿐, 현재 통로 안의 상황은 처참했다.
적들의 시체 타는 냄새에서부터 시작해서, 불에 그을린 삼라만상이 쏟아 내는 악취로 가득했다.
아직 화기가 가시지 않은 듯, 통로 안쪽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통로에 들어선 한빈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냄새에 집중했다.
* * *
같은 시각 비밀 통로의 한 곳.
흑색 무복의 사내가 아직까지도 타고 있는 벽면을 바라봤다.
그곳도 그는 허탈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설마 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군.”
그는 종남파에서 사라진 천재 검객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흑선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에 비해 전체적으로는 도가의 기운을 풍기고 있는 그는 흑색 무복만 아니라면 신선으로 착각할 법도 했다.
흑선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흩어진 살점 위에는 붙은 기름에는 아직까지도 불꽃이 남아 있었다.
지글지글 타고 있는 시체를 본 흑선은 눈매를 좁혔다.
정말 악랄한 수법이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이곳에 무림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가문의 보물을 숨겨 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물론 정보도 교차 검증을 했다.
객잔을 감시하던 수하도 같은 말을 했었다.
공손세가를 감시하던 자도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전서구를 낚아채 내용이 같음을 확인한 뒤 다시 날려 보낸 것도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 전서구에는 보물에 대해 저 상세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무림을 좌우할’이라는 문구에, 흑선은 이곳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잠입하여 벽에 꽂혀 있던 횃불에 불을 붙이고, 앞에 있는 나무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무통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나무 조각을 뱉어 냈다.
나무통 속의 내용물은 기름이었다.
폭발은 이곳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기관 장치를 해 놨는지는 몰라도,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흔들리고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
눈 깜짝할 사이, 몸을 숯으로 만들 열기가 사방에서 덮쳐 왔다.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살짝이라도 늦었다면 흑선은 통구이가 됐을 것이다.
더해, 만약 이 통로가 조금만 약했다면 호신강기를 펼쳤어도 그대로 묻혔을 것이었다.
이 통로를 구성하고 있는 지층이 이리 단단한 것은 어찌 보면 흑선에게는 행운이었다.
흑선은 이 행운을 누군가에게 악운으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범인은 현장에 나타나기 마련.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자는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물론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이를 주도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뒤에서 이용하는 자가 있고, 흑선은 그의 뒤에 숨은 고수를 찾길 원하는 것이다.
흑선은 그 고수가 청운사신이라 불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뿌득.
흑선은 다시 이를 갈았다.
지금 흑선이 화가 난 것은 수하들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도마뱀이 꼬리를 끊듯 이들을 자르려 하던 참이었다.
지금 그가 이를 갈고 있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머리싸움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흑선은 암흑이 짙게 깔린 통로의 저편을 바라봤다.
그는 허리에 찬 그의 검을 확인했다.
이 검으로 상대를 꺾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이었다.
흑선은 자신의 검집을 확인하고 검을 뺐다.
스르릉.
검날을 확인한 흑선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대는 함정으로 자신에게 굴욕을 줬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인사를 해 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 생각했다.
주위를 살핀 흑선은 모든 기척을 지우고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 * *
얼마나 갔을까?
한빈은 지하 통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전에 왔을 때는 먼지와 흙 때문에 가려졌던 야명주가 통로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호롱불처럼 밝지는 않지만, 사람의 흔적 정도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밝기였다.
신기한 것은 통로의 벽면이었다.
흙을 파서 통로를 만든 줄 알았는데 폭발 때문인지 흙더미가 걷힌 상태였다.
이제는 군데군데 윤기가 흐르는 돌로 된 벽면이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돌벽에 야명주가 박혀 있는 통로라?
거기에다가 장운현 전체를 관통하는 통로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후각에 익숙한 냄새가 잡혔다.
그것은 바로 천리추종향.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천리추종향이 목욕을 해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지만, 기름으로 활활 탄 상태에서까지 남아 있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폭발이 일어났을 때 상대방은 몸을 보호할 수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호신강기라면?
한빈은 왼손으로 월아의 검집을 움켜쥐며 앞으로 걸어갔다.
점점 천리추종향의 냄새가 진해졌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전방을 확인했다.
천리추종향이 나는 것은 바로 앞.
그곳에는 몇 구의 시체가 있었다.
상의는 불에 탔는지 넝마가 된, 머리에는 피가 흐르는 시체들이 보였다.
시체는 폭발에 떠밀렸는지 몇 구가 겹쳐 있었다.
한빈은 섣불리 시체에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통로를 비추고 있는 야명주를 살폈다.
야명주를 확인한 한빈은 조용히 통로를 걸어가며, 야명주 위에 조그만 가죽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로를 막고 있는 시체를 넘어갔다.
그때였다.
시체를 뚫고 검이 튀어나왔다.
피슝!
마치 암기처럼 튀어나온 검날.
검날에는 투명한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검기 때문인지 뚫린 시체의 파편이 여기저기 비산했다.
한빈은 대비했다는 듯 넘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재빨리 뒷걸음쳤다.
미리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를 운용하고 있었기에 검기가 서린 검날을 피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검에 꽂힌 시체가 날아왔다.
순간, 검기에 뚫린 시체는 마치 폭약처럼 터졌다.
펑!
시체가 터지며 살점이 사방으로 날렸다.
휙!
한빈의 몸에도 시체의 살점이 닿았다.
순간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검날은 허초요, 시체의 폭발로 흩날리는 살점이 실초였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옷에 묻은 살점을 털어 냈다.
툭툭.
순간 시체 더미의 가운데에서 흑색 무복의 사내가 일어났다.
쓰윽 일어난 사내가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이 말했다.
“잘 잤어?”
“흠, 아직 세 치 혀를 놀리는 걸 보면 보통이 아니구나.”
“보통은 아니니 대비했겠지.”
“대비라? 지금 그렇게 웃고 있을 여유가 없을 텐데. 지금쯤이면 살이 타들어 가고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낄 텐데 어떠냐? 아무리 고수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말해. 이 정도 화골산 가지고는 간에 기별도 안 가겠네.”
한빈은 옷에 남은 살점을 털어 냈다.
툭툭.
털어 내고 보니 옷의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었다.
바닥에는 떨어진 살점이 타는 소리를 내며 녹고 있었다.
츠츠즉.
상대가 말한 대로 화골산을 시체에 묻혀 놓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빈은 천독과의 대결에서 이미 독의 내성을 얻었다.
천독으로부터 얻은 독의 내성은 지금 상대가 뿌린 화골산에도 반응했다.
한빈이 말했다.
“천독에게 받은 독인가 봐? 질이 좀 떨어지네.”
“천독을 죽인 자가 네놈이 맞구나.”
“독선 말하는 거지? 그렇다면 너는 팔선 중 흑선이 맞겠네?”
“흠, 우리를 안다…….”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데 모를 리가 있나?”
“뭐, 천독을 죽인 일은 칭찬해 주지. 상으로 너의 목을 단번에 날려 주겠다. 고통 없이…….”
“미안한데, 나는 무서운 거 싫어하거든.”
“아마 공포라는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을 것이다.”
“내가 무서움을 좀 타서 그러는데, 무시무시한 말 좀 하지 말아 줄래? 백선도 그렇고 너희들은 왜 하나같이 살벌하냐? 거참.”
“…….”
흑선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흔들리는 동공이 멈추고 대신 입술이 떨렸다.
한참 동안 떨리던 입술이 움직였다.
“네, 네가 진정 백선을 보았더냐?”
한빈은 대답 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상대는 천독은 잘 죽였다고 해 놓고는, 백선의 이야기가 나오자 극도로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다.
백선이 흑선의 역린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역린을 후벼 파야 상대가 동요할 것 같았다.
한빈이 진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보기만 했겠어? 속살도 본 사이야.”
“속살이라? 풋.”
흑선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한빈이 마주 입꼬리를 올렸다.
“뭐, 살이 아니라 장기라고 해야 정확할까?”
이것은 거짓이었다.
백선은 관군의 눈에 안 띄게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었다.
한빈과 있었던 모든 일은 기억 못 한 채 말이다.
백선의 섭혼술은 그만큼 위대했다.
백선 자신의 심령마저도 완벽히 제압했으니 말이다.
조금 전까지 웃던 흑선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한빈의 격장지계가 먹힌 것 같았다.
흑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누님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잘랐다.
“내가 보냈어.”
“보, 보냈다고…….”
흑선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한빈의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숨어 있으라 곱게 보냈으니 말이다.
한빈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괜히 내가 악당이 된 느낌이네.”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자, 흑선의 발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한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흥분한 것 같으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기습을 하려는 모습이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난 한빈이 흑선과의 거리를 벌렸다.
좁은 통로에서 경공술이 뭐가 대수겠느냐만은, 한빈은 속도만큼은 상상을 초월했다.
타다닥.
흑선이 벌린 거리만큼 날아왔다.
슝!
한빈의 일촉즉발 수법처럼 검과 하나가 되어 날아오는 흑선.
이것은 종남의 중원일통의 수법이었다.
종남 삼십삼 검 중 마지막 초식. 그는 중원을 일 검에 가를 정도의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
종남파의 검법 중 초식만으로 본다면 가장 강력한 수법이었다.
이는 이 승부를 길게 끌지 않겠다는 흑선의 결심을 담았다 볼 수 있었다.
다가오는 간격만큼 재빨리 물러나던 한빈이 품속에서 은침을 꺼냈다.
‘백발백중.’
한빈의 손에서 은침이 쏟아지자, 흑선이 검을 돌려 앞쪽에 검막을 피워 냈다.
검막을 유지하며 한빈을 살피던 흑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은침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휙. 휙.
흑선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은침.
푹. 푹.
연속으로 뭔가에 박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벽에 부딪히는 소리는 아니었다.
‘뭐지?’
흑선은 힐끔 고개를 돌려 은침이 날아간 방향을 확인했다.
순간 흑선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서로를 볼 수 있는 것은 야명주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야명주 위에 뭔가를 올려놓은 것이다.
검은 액체가 흘러내리며 연기를 피워 낸다.
“흡.”
흑선은 다급하게 입을 막았다.
순간, 뜨끔한 느낌이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뒤쪽에서 입맛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쩝,”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보는 흑선.
흑선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대는 조심성에 있어서는 천하제일을 다툴 인물이었다.
앞으로 검막을 피워 내는 동시에 몸 전체를 호신강기로 둘러싸고 있었다.
검막과 호신강기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 내공을 운용하는 능력은 분명 한빈보다 몇 수 위였다.
한빈은 전생에 비슷한 호신강기 운용을 본 적이 있었다.
엷은 진기로 몸을 두르고 있다가, 미세하게나마 적의 공격을 느끼는 순간 한곳에 진기를 집중하는 방식이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진기로 쾌검난마의 힘을 담은 한빈의 월아를 튕겨 내려면?
한마디로 천독보다 고수여야 했다.
아직까지는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숨기는 이유는?
당연히 자신의 간격 안에 몰아넣고는 단번에 끝내려는 것이다.
한빈은 상대를 바라보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흑선의 기세가 변했다.
스스슥.
그가 피워 내는 검기도 더욱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빈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