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경천동지(驚天動地) (2)
순간 이무명은 움찔했다.
이어서 대화를 위해 서재오와 막사 쪽으로 향하던 강유찬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주변을 둘러본 강유찬이 초소에 있던 병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경계 태세의 단계를 올리라는 신호였다.
한 병사가 초소에서 나팔을 불자,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사방을 경계했다.
잠시 후.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타다닥.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병사가 말했다.
“대인, 지진입니다, 지진!”
“무슨 일인가? 소상히 보고하라.”
“지금 장운현을 중심으로 땅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일단 진정된 듯하지만, 소리로 봐서는…….”
“소리로 봐서는 어쨌다는 것인가?”
“추가로 지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내려가서 백성들을…….”
병사는 쉴 틈 없이 자신의 의견을 강유찬에게 보고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이무명은 한빈이 한 말을 떠올렸다.
경천동지할 일이 생기면 펴 보라는 비단 주머니가 기억난 것이다.
이무명은 품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를 열어 보니, 안에 둘둘 말린 쪽지가 있었다.
쪽지를 펴 본 이무명이 눈을 크게 떴다.
당황도 잠시, 그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쪽지를 해석해 줄 이를 찾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 멀리서 당과를 들고 기웃거리는 설화를 발견했다.
이무명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설화야!”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설화뿐 아이라 소대섭과 심미호까지 달려왔다.
“주군, 부르셨습니까?”
“무슨 일이에요? 주군.”
그들은 연습한 대로 이무명을 한빈 대하듯 대했다.
설화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공자님?”
그들이 모이자 이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사부가 남기고 간 쪽지입니다. 경천동지할 일이 생기면 펴 보라고 해서 펴 봤는데, 이렇게 여덟 글자만 적혀 있습니다.”
심미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글자를 확인했다.
쪽지에는 진짜 여덟 글자밖에 없었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
글자를 뚫어져라 보던 심미호가 말했다.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라고?”
“살기를 바라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란 말 아닙니까? 그런데 딱 여덟 글자밖에 없는 겁니까?”
소대섭이 묻자 이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딱 여덟 글자입니다.”
“그런데, 주군은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죠?”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쪽지를 다시 바라봤다.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란 말을 몰라서는 아니었다.
이것은 전투에 임하는 마음가짐.
세부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싸우라는 이야기라면, 어디에서 누구와 싸우는지에 대한 지시가 뒤따라야 정상이었다.
거기에 더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적혈맹호대에게 전하는 말인지?
아니면, 여기 있는 강유찬과 관군까지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인지 말이다.
이런저런 대화가 이무명과 심미호, 그리고 소대섭 사이에 오갔다.
이들이 결론을 못 내리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있던 설화가 끼어들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좋은 생각이라고?”
심미호가 설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대장 아저씨한테 보여 드리는 게 어떨까요?”
“대장 아저씨라고?”
심미호가 한층 더 고개를 기울이자, 설화가 검지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강유찬을 가리켰다.
“아, 강유찬 대인 말씀이구나?”
“네, 여기 책임자에게 보여 주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주세요. 아무리 봐도 병사들이 쓰는 말 같잖아요. 저 아저씨라면 명쾌하게 해석해 주실 거예요.”
설화의 말에 심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이 설화를 바라보던 소대섭이 물었다.
“그런데, 누가 보여 주지?”
“저렇게 바쁜데 끼어들기가 좀 뭐한데요.”
심미호의 말에 설화가 다시 끼어들었다.
“제가 가 볼게요.”
말을 마친 설화는 재빨리 쪽지와 주머니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이무명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잠시만 숨어 계세요.”
“숨으라고?”
“그러니까…….”
설화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이무명에게 속삭였다.
계획을 들은 이무명은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이곳에서 떨어져 몸을 숨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이무명이 사라지자 설화는 주머니를 들고 강유찬에게 달려갔다.
강유찬은 정신없이 부관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곳을 비워 놓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지원을 나갈 병사와 이곳을 수비할 병력을 나누고 그들에게 세부적인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강유찬이 침을 튀겨 가며 지시를 내리고 있을 때, 설화가 달려왔다.
해맑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설화의 모습에 강유찬은 말을 멈췄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우리 공자님이 경천동지할 일이 생기면 펴 보라고 해서 가져왔어요.”
“팽 공자가 펴 보라고 했다고? 그럼 직접 와서 말하면 될 것을. 팽 공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아까 사라졌어요. 볼일 있다고 하면서요.”
“그럼 어서 줘 보거라.”
강유찬이 손을 내밀자 설화가 주머니를 건넸다.
쪽지를 확인한 강유찬은 입술 사이로 침음을 흘렸다.
“흠.”
그것도 잠시, 강유찬은 쪽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먹물이 바싹 마른 것을 보니 지진 이후에 쓴 글은 아니구나.”
“아.”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덩치나 인상에 비해서 세심한 강유찬의 모습 때문이었다.
역시 금의위의 수장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강유찬은 설화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팽 공자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유찬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화는 생각에 잠긴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설화도 신기했다.
지진을 예측한다는 것은 제갈공명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땅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강유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빈이 전술에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면 제갈공명에 버금가는 군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마을에 역병이 돌 것을 예상했고, 그것이 사람에 의한 것이라는 것까지 알아내 참상을 방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진을 예측하다니?
그에 더해 지진에 대한 대책까지 이렇게 적어 놓은 것이다.
이제까지 한빈의 예측은 틀린 적이 없었고, 또한 나라의 이익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강유찬은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부관을 불렀다.
“부관.”
“네, 대인.”
“모든 병사에게 지금부터 경거망동하지 말고 자리에 머물라 전해라.”
“모든 병력이 장운현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계획이 바뀌었다. 그리고 회의를 시작할 테니, 백인장 이상은 모두 막사로 모이라 전해라.”
“존명!”
부관은 뛰어가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모든 병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일부는 강유찬이 있는 막사로 향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대장 아저씨도 모르나 보네…….”
* * *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한빈은 어디에 있을까?
한빈은 비밀 통로의 입구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한빈이 있는 곳을 향해 다급하게 달려왔다.
타다닥.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공손명후였다.
공손명후는 한빈이 보낸 신호를 받고 달려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거의 다 도착할 때쯤 천지가 흔들리는 듯한 지진을 만난 것이다.
한빈이 걱정된 공손명후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이곳에 도착했다.
거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모두 집으로 들어가서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
한빈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한빈은 턱을 괸 채 통로 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통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통로가 굴뚝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팽 공자님.”
“늦지 않게 왔군요.”
“네, 신호를 받고 왔습니다.”
“못 볼 줄 알았는데 보셨네요.”
“다루에 그렇게 커다란 깃발이 걸려 있는데 못 볼 리가요.”
그의 말대로 다루에 깃발을 걸어 놓는 것이 신호였고, 장소는 깃발에 적어 놓기로 했다.
“그런데 놀라신 표정입니다.”
“오는 길에 지진이 나서요. 여진이 있을까 염려되어서 그렇습니다.”
“아, 지진 때문에 놀라셨군요. 아마 추가로 지진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뭐, 아는 수가 있죠.”
“그런데 여긴 대체 왜 오신 겁니까?”
“아무래도 너구리를 잡는 데 성공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그 뒤처리를 맡기려고 합니다.”
“너구리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팽 공자님.”
“너구리를 잡으려고 제가 통로에 불을 좀 지폈습니다.”
“통로라면 혹시…….”
“네, 생각하시는 그 통로가 맞아요.”
한빈은 검지로 비밀 통로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럼 팽 공자님이 피우신 연기가 비밀 통로에서 나오는 거라는 말씀입니까? 너구리, 아니 적이 저 안에 남아 있고요?”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쉽게 말해 관문착적(關門捉賊)의 수법이지요.”
“관문착적이라…….”
공손명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관문착적이란 문을 걸어 잠근 후 도적을 포획하는 방법이다.
이번 일에 있어 한빈이 신중을 기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공손명후는 자신과 상의도 없이 진행할 정도로 비밀스럽고 신중해야 할 이유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밖에는 금의위와 관군이 포위하고 있지요. 그들에게 잡힌 잔당이 스무 명. 그들 중 일부는 하북성으로 압송이 끝났습니다. 그런데도 질척질척한 시선이 느껴지더라고요.”
“음.”
공손명후가 침음을 흘리자, 한빈은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도 그들 중 몇은 공손수 어르신이 섭혼술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지 않아도 장운현을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황궁으로 돌아가시길 권유드립니다. 공공문의 일도 좋지만, 공손가의 생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 안에 적을 가둬 두셨다는 겁니까? 적이 대체 왜 저기에…….”
“제가 던져 놓은 미끼를 물더라고요.”
“미끼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미안하지만, 이제 시간이 됐군요. 뿌려 놓은 씨가 충분히 자랄 시간이니 이제 추수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두 시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면 입구를 막아 주십시오.”
한빈이 입구를 가리켰다.
“입구를 막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팽 공자님.”
“막고 저 비석까지 올려 주시면 더 좋습니다.”
한빈은 커다란 비석을 가리켰다.
집채만 한 비석은 밑에 깔리면 딱 봐도 육포가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저곳을 막으면 팽 공자님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두 시진 안에 못 나온다면, 공손세가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위험할지도 모르니 꼭 부탁드려요.”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번 객잔 앞에서의 일 아시죠?”
“네, 그때 상상도 못 할 대결이 펼쳐졌다고…….”
“제가 느끼기에는 그보다 더한 고수일지도 모릅니다. 제 말 명심하십시오. 저길 막지 못하신다면 바로 황궁으로 피하십시오.”
말을 마친 한빈은 천천히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에 공손명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이 말한 미끼가 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공손명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뱉었다.
“지난번에 숨겨 놓은 보물이라는 게 미끼?”
공손명후는 달리 공손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한빈과의 대화로 대충 상황을 깨달았다.
하지만, 의문이 이어졌다.
한빈의 표정을 보면 방금 일어난 지진을 미리 알고 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진이 언제 일어날지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지진은 한빈이 만들어 냈음이 분명했다.
한빈은 어떻게 경천동지할 지진을 만들어 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공손명후는 보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무통의 내용물이 무엇일까?’
공손명후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설마…….”
호기심이 섞인 혼잣말을 토해 낸 공손명후가 비밀 통로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묘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화약 냄새는 분명 아니었지만, 냄새가 친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