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강북의 생불(生佛) (3)
객잔 앞에 모여 있는 자들의 대부분은 초조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그 모습은 소원을 빌기 위해 와불을 향해 줄 서 있던 자들의 표정과 비슷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서재오와 마찬가지로, 장운현의 사람들도 한빈의 모습에서 관음보살을 엿봤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이 쉬지 않고 중독된 이들을 관리했기 때문이었다.
관아에서도 버린 마을 사람들을 한빈과 적혈 맹호대가 구한 것.
관군마저 가까이 가기도 무서워 그냥 팽개쳤던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물과 식량을 전달하고 치료까지 해 준 한빈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살아 있는 부처의 모습이었다.
한빈은 일반 백성을 치료하며 그들에게 아무 조건도 걸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빈이 관음보살의 현신이라는 소문이 장운현에서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빈이 불심으로 독을 치료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한빈이 나눠 주는 환약에 관음보살의 신력이 담겨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었다.
그런 소문의 배경에는 천수장 옆 마을에서 살다 온 이들의 증언도 한몫했다.
천수장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한빈을 천하제일 명의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잔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들 대부분은 아직 한빈의 도움을 못 받은 상인과 무인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 * *
드르륵, 드르륵.
한빈 일행이 이끄는 수레바퀴 소리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한빈을 보고는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웅성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셨네.”
“그러게 말일세.”
“오늘도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말일세.”
“이제야 살았군.”
웅성거리는 그들을 바라본 한빈은 활짝 웃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지나쳤다.
객잔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자, 심미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군, 괜찮겠어요?”
“뭐가 괜찮아?”
“약재와 식량을 구하러 온 것 같은데…….”
심미호가 말끝을 흐렸다.
한빈이 이들에게 도움을 줄지는 심미호도 확신하지 못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군이었기 때문이다.
심미호의 질문에 한빈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눠 줘야지.”
“정말로요? 공짜로 저 많은 사람에게 다 나눠 주신다고요?”
심미호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실망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심 부대주.”
“네, 주군.”
“누가 공짜래? 심 부대주.”
“공짜가 아니면…….”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 탁자에 앉은 한빈이 말했다.
“심 부대주, 초짜처럼 왜 그래?”
“마을 사람들은 공짜로 치료해 주셨잖아요.”
“에이, 그 사람들한테는 돈 대신 민심을 받은 거고. 저 친구들한테는 현물을 받아야지.”
“현물이요? 식량도 돈도 다 떨어졌을 텐데 어떻게 받아요, 주군?”
“현물이라는 게 꼭 재물만은 아니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은 대답 대신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설화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설화는 한빈이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탁자 위에 보따리를 풀어 놨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심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필묵이…….”
뭐,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심미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일필휘지로 내용을 써 내려갔다.
심미호는 현물이 재물만은 아니라는 의미를 깨달았다.
그들의 몸도 현물이었던 것이다.
심미호는 그제야 한빈의 깊은 뜻을 알았다.
한빈의 의도는 딱 두 가지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신념 아래, 대가를 받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생명마저 공짜라고 느끼며 헛되이 쓰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계약서를 쓰는 첫 번째 이유였다.
계약서를 같은 내용으로 열 장쯤 쓰자 한빈의 붓끝이 멈췄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물었다.
“왜 안 쓰세요?”
“원래 계약서라는 건 말이야…….”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모두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두가 침묵하자 한빈은 그제야 다음 말을 이었다.
“모든 글은 희소성이 있어야 그 가치를 발휘하는 거지.”
“글이라니요?”
“뭐, 내가 말하는 글이란 명필을 말하는 거지. 말하자면 계약서도 명필이지.”
“…….”
“후한의 서예가 맹황이 남긴 글이 수만 장이 있다면 그게 제값을 할까? 아니라는 데 철전 다섯 닢을 걸지.”
맹황은 서예가로 유명한 옛사람이었다.
“그런데, 맹황의 명필과 주군의 글이…….”
심미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말을 끊었다.
“아주 적절한 질문이야. 심 부대주, 본인의 생각을 말해 봐.”
한빈이 눈을 빛내자 심미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저 역시 맹황의 글보다 주군의 글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말을 마친 심미호가 재빨리 포권하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붓을 놓은 한빈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빈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반사적으로 끄덕인 이들도 있었고, 설화처럼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한빈에게 있어서 공짜로 일반 백성을 치료해 준 것은 투자에 가까웠다.
투자한 금액을 뽑는 대상은 상인과 무인이었다.
이것이 계약서를 쓰는 두 번째 이유였다.
심미호가 계약서를 들고나오자, 사람들이 그녀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심미호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는 웅성거렸다.
치료의 대가로 조건이 붙자, 살아 있는 부처라고 입에 닳도록 외친 이들도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그들 중, 객잔 앞에 있는 한빈을 가리킨 상인이 입을 열었다.
“저기 관음보살의 현신이 나와 있군. 오늘은 약을 받아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의 옆에는 몸이 불편한 듯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말했다.
“그러게요, 아버지.”
이번 역병으로 인해 다리까지 절게 된 아이였다.
그들 앞에 염소수염을 한 상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관음보살은 무슨, 마을 사람은 그냥 치료해 주고 우리한테는 돈을 받다니, 그게 무슨 관음보살인가?”
그는 이곳에 오면서도, 과연 공짜일까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건이 붙어서 울화통이 터진 상태에서, 같이 온 친구가 한빈을 관음보살이라 받들자 심통이 난 것이었다.
그의 말에 지팡이를 짚은 아이의 아비가 손을 내저었다.
“에이, 관음보살님께서 듣기라도 하면 큰일일세. 목소리 좀 낮춰.”
“자네 목소리가 더 크네. 뭐, 관음보살은 맞지, 다만, 계약서를 든 관음보살이니 문제지.”
염소수염을 한 상인이 비아냥대자, 그의 친구가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뭐, 나는 무조건 서명할 걸세. 흑사문이나 다른 정파와 거래하는 것보다는 하북팽가가 백배 낫지.”
“흠, 그건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생명이 걸린 일인데 돈을 밝히는 게 가당키나 한가?”
“자네, 말은 바로 하게. 이번에 하북팽가 말고 나서서 우리를 도와준 이가 있던가? 하북팽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 굶어 죽었을 걸세. 얘기를 들어 보니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황실과도 끈이 있다고 하니, 관군들도 이제 우리를 도와줄 걸세.”
“황실은 무슨! 팽가가 황실과 끈이 있으면 벌써 관군을 뚫고 도망쳤지, 이러고 있겠나?”
“도망갈 수도 있는데 남아 있으니 생불이라 부른 게지. 안 그런가? 하하.”
지팡이를 든 아이의 아비는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가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앞자리가 비었으면 빨리 갑시다! 그러고 있을 거면 제가 앞으로 가죠.”
그 말에 그들은 후다닥 앞에 붙었다.
생각보다 줄은 빨리 줄어들었다.
계약서를 내밀자 생각해 보겠다는 상인과 무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서의 내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염소수염을 한 상인의 차례가 왔다.
한빈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염소수염의 상인이 뒤쪽에 있는 친구를 보더니 말했다.
“자네가 먼저 하게.”
“그래도 될까?
“먼저 하래도.”
“그럼 먼저 하겠네.”
양보를 받은 상인과 다리를 저는 그의 아들은 앞으로 가서 심미호의 앞에 섰다.
염소수염을 한 상인의 생각은 간단했다.
친구의 상황을 지켜보고 계약서를 받아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몸이 불편한 아이의 아비가 계약서에 서명한 이후 발생했다.
상인과 무인들을 상냥하게 응대하던 심미호가 앞에 가지런히 놓인 붓과 먹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미호의 옆에서 업무를 보조하던 장삼은 빗자루를 들고 앞을 쓸기까지 했다.
쓱. 쓱.
누가 봐도 파장 분위기.
놀란 염소수염의 상인이 말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다들 내일 오세요. 오늘은 업무가 끝났어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까지 끝내 주셔야…….”
“계약서가 다 떨어졌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주군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셔서, 하루에 계약서를 열 장밖에 못 쓰세요.”
“여, 열 장이요? 다른 분이 대신 써 주시면…….”
“계약은 일륜지대사이므로, 대필은 금지라고 주군께서 명하셨어요.”
“그럼 하루에 열 장이…….”
“네, 맞아요. 한계입니다.”
순간 술렁임이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뭐지?”
“어떻게 하지?”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
소란이 점점 심해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딱.
동시에 누군가 상인들의 앞을 막아섰다.
쓰윽.
바람 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의 무복의 사내.
모두는 그의 기세에 한 발 물러났다.
뒤쪽의 누군가가 사내의 소매를 보고 말했다.
“화산파의 매화검수…….”
누군가가 가리킨 흰 소매에는 매화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를 시작으로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 화산파라고?”
“혹시 이번 사건에서 대활약을 했다는 그 매화검수 서재오?”
“…….”
순간 길게 늘어선 상인과 무인들의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서재오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어찌 보면 마지못해 나온 형식적인 강호행이었다.
물론 등 떠밀려 나오는 강호행의 행태는 화산파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요즘에는 나가서 명성을 떨친 매화검수가 전무후무한 상태.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자신은 강북이 떠들썩할 정도의 사건을 진화하는 데 한몫했다.
자신의 활약을 본 이가 없을 텐데도 이번 역병을 진화하는 데 매화검수가 활약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지금도 저들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서재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왠지 이곳에 서서 심미호를 호위하는 자신의 행동이 화산파의 제자로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이건 주점이나 객잔의 대문을 호위 무사나 하는 행동이 아니던가?
의심도 잠시, 서재오는 입꼬리를 올렸다.
신호에 따라 나서 달라는 건 한빈의 부탁이었다.
이제까지 한빈의 부탁을 들어주고 손해 본 적이 있던가?
몸은 힘들어도 손해는 없다 장담할 수 있었다.
서재오가 진득한 미소를 피워 내고 있을 때, 심미호가 지팡이를 든 아이와 그의 아비에게 다가갔다.
“이쪽으로 오셔서 약 받아 가시죠. 그리고 식량도 받으셔야죠.”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인.”
지팡이를 든 아이의 아비는 자신도 모르게 포권했다.
평상시에는 하지도 않는 포권을 하며 예를 갖춘 것이다.
그만큼 한빈과 적혈맹호대가 고마웠다.
지팡이를 든 아이의 아비는 심미호의 옆에 있는 장자명에게 환약을, 조호에게 식량을 건네받았다.
그가 식량과 약재를 챙기고 있는 동안, 그의 아들은 힘겹게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의 코를 간지럽히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예쁘장한 얼굴의 여자아이가 당과를 들고 있었다.
물론 여자아이는 설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