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강북의 생불(生佛) (2)
붕대를 칭칭 감은 것으로 봐서는 보통 심각한 상태가 아닐 터였다.
중요한 점은, 누군가가 붕대를 감은 이와 자신을 치료했다는 것이었다.
‘저승에도 의원이 있나?’
의문을 떠올린 서재오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누워서 고개를 흔들던 서재오는 몸이 원활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승이 분명한데…….”
말끝을 흐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단 방 안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값나가 보이는 족자와 도자기가 가득 차 있었다.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서재오는 본능적으로 그 가격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계산을 마친 서재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네.”
그가 다행이라 느낀 것은, 저승에 저렇게 비싼 물건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런 수집품을 모을 정도면 자신을 해칠 리 없다는 확신도 있었다.
서재오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방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얼굴이 시커먼 아이가 들어왔다.
순간 눈을 크게 뜬 서재오가 말했다.
“저승사자?”
아이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화산파 아저씨, 왜 저도 못 알아봐요?”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설화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굴이 시커먼 것이 설화와는 전혀 달랐다.
그러고 보니……. 옷도 이상했다.
묘하게 앞은 시꺼멓게 탔는데 뒤는 흰색 그대로였다.
그때 장자명이 들어왔다.
들어온 장자명은 설화의 얼굴에서 검댕을 닦아 내며 울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설화야! 약은 건들지 말랐잖느냐? 지난번에는 그래도 약만 태우더니, 이번에는 집을 태울 뻔했어, 허허.”
“미안해요, 의원 아저씨. 화산파 아저씨 약은 제가 달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들의 대화에 서재오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무사하고 이곳에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옆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사람에게 신경이 쏠린 것이다.
“설마, 사 공자…….”
서재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선천지기로 자신을 치료했다면, 독기에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서재오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붕대를 감은 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 공자, 사 공자!”
서재오가 넋을 놓고 한빈을 찾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서재오를 불렀다.
“서 대협, 왜 날 찾아요?”
서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한빈의 목소리였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니 한빈이 팔짱을 끼고 황당하다는 듯 서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재오도 마찬가지였다.
붕대를 칭칭 감은 채 누워 있는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서재오의 가슴에서 두려움이 싹텄다.
한빈은 아니라지만, 저 붕대 안에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었다.
누굴까?
서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천수장의 누구도 잃기 싫었다.
그것도 잠시, 서재오는 흔들던 고개를 멈췄다.
뒤쪽에 있던 장자명이 붕대를 감은 환자 쪽으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장자명은 힐끔 한빈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상태를 보니 붕대를 풀어도 되겠습니다, 사 공자.”
“네, 그건 장 의원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럼…….”
장자명이 붕대를 감고 있는 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붕대로 덮인 몸을 살폈다.
환자를 살핀 장자명의 손이 향한 곳은 머리였다.
머리의 가운데, 즉 백회혈에는 은침이 하나 꽂혀 있었다.
장자명은 백회혈에서 은침을 뽑아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붕대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은침은 제법 많았다.
장자명은 순서에 맞게 은침을 뽑기 시작했다.
뽑은 은침은 설화가 들고 있는 쟁반에 올려놓았다.
툭. 툭.
뽑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소나기 내리는 소리처럼 들릴 정도였다.
은침을 다 뽑자 붕대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응.”
그 신음에 장자명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살아났군.”
혼잣말을 뱉은 장자명을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자명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붕대를 풀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자명은 천천히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붕대 안쪽으로는 끈적끈적한 검은 액체가 간간이 눈에 띄었다.
드디어 얼굴이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얼굴이 아니었다.
설화만큼이나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아기처럼 뽀얀 피부.
머리카락은 모두 빠져 소림사의 동자승을 저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외모였다.
고개를 갸웃하던 서재오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저 아이는 누구입니까?”
장자명에게 물었지만, 그는 나머지 붕대를 벗겨 내는 데 신경을 쏟고 있었다.
어느 정도 붕대를 벗겨 내면 붕대의 안쪽을 확인한 후, 다음 붕대를 벗겨 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독기를 확인하는 듯 보였다.
서재오의 물음에 답한 것은 한빈이었다.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 대협이 구한 아이입니다. 정확히는 저 아이를 구하는 데 삼 할 정도의 힘을 써 주셨죠.”
“내가 구했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사 공자. 그리고 삼 할은 무슨 말이고?”
서재오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아이에게 집중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치료가 덜 끝났으니 나중에 이야기하죠, 서 대협.”
한빈의 대답에 서재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엄연히 지금은 치료 중.
자신의 말 한마디가 치료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 * *
잠시 후.
서재오는 옷을 갈아입고 침상이 있던 방보다 호화스러운 방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다름 아닌 공손세가의 접객실이었다.
객잔 앞에서의 혈투가 끝난 뒤.
독기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 상태라 그들은 잠시 공손세가에 머물고 있었다.
지금 서재오의 앞에는 찻잔이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그의 앞에는 한빈이 앉아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본 서재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본 것은 사람이 죽어 나가던 아수라장.
그런데 이렇게 찻잔을 앞에 놓고 보니 마치 지난 일들이 잠든 사이에 꾼 악몽 같았던 것이다.
찻잔으로 입술을 적신 서재오가 물었다.
“나를 구해 준 게 진짜 사 공자 자네인가?”
의심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 물음에 한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 맞습니다.”
“왜 나를 구했나?”
“그럼 동료가 죽는 것을 보고 있습니까? 서 대협은 장운현에서 나갈 기회가 있는데도 남으셔서 같이 싸우지 않았습니까?”
“아…….”
서재오는 탄성을 질렀다.
누가 봐도 자신은 도망가려다가, 한빈에게 발목을 잡혀서 남은 것일 뿐이었다.
그의 탄성이 끊기기 전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수하도 가족, 제자도 가족, 동료도 가족입니다.”
“그럼 내가 동료라는 말인가?”
“그럼 동료가 아니면 적입니까?”
“허허.”
서재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맞춰 한빈이 말을 이었다.
“저는 대협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맡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협의 가장 중요한 물건을 맡아 준 적도 있고요. 그런 사이가 동료가 아니면 뭐랍니까?”
말을 마친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서재오를 바라봤다.
서재오도 한빈의 얼굴을 마주 봤다.
둘의 시선이 탁자 위에서 얽혔다.
어떤 감정도 없는 순수한 눈빛이었다.
순간 서재오의 뇌리에 한빈과 함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하나하나 모든 일을 뜯어 보면 한빈과 서재오는 동료가 맞았다.
서재오는 하남정가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었다.
한빈은 서재오의 매화 패와 매화삼경을 맡았었고 말이다.
아니, 맡긴 건 아니고 탈취하다시피 한 거지만.
물론 매화 패는 아직도 설화의 손에 있다.
서재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료라? 그래서 선천지기를…….”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갑자기 한빈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뜻밖의 행동에 한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이러십니까? 서 대협.”
“사 공자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나 서재오는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며, 화산파 역시 매화검수를 구한 일에 대해서 잊지 않을 것이오.”
서재오의 말투는 이전과는 달리 존경심을 가득 담고 있었다.
말을 마친 서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이 황당하다는 듯 서재오를 바라보다 말했다.
“동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 대협.”
“동료라고 선천지기를 나눠 주진 않지. 안 그런가, 사 공자?”
서재오는 말투를 편하게 바꾸었다.
하지만, 한빈을 바라보는 표정만은 진지했다.
그 말에 한빈은 이틀 전 일을 떠올렸다.
독에 타들어 가는 서재오를 구한 것은 한빈의 선천지기가 아니었다.
용린검법 중 기사회생의 초식이었다.
황보세가의 이 공자를 구한 것처럼, 이번에도 기사회생을 썼다.
문제는 기사회생이란 초식이 구 할만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점이 까다로운 부분이었다.
일 할의 독기를 남겨 둔다?
그것은 독기를 모두 남겨 두는 것.
즉 맑은 물에 먹물을 푸는 것과도 같았다.
일 할이 남는다면 다시 맑은 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한빈은 일 할의 독기를 심장에 몰아넣었다.
그 후 해독약 다섯 개를 박아 버린 것이었다.
물론 일곱 개는 너무 많았으니 여섯 개를 박아도 되었겠지만, 잘못하면 바람 빠진 가죽 공이 될 수도 있었다.
한빈이 판단하기에, 다섯 개는 가장 적절한 숫자였다.
결과는 지금 멀쩡하게 한빈과 대화를 나누는 서재오가 말해 주고 있었다.
깨어난 서재오는 기사회생의 초식을 한빈의 선천지기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유리한 착각을 마다할 한빈이 아니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선천지기가 대수입니까? 서 대협.”
“…….”
서재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천지기로 자신을 치료했으니, 한빈의 무공은 적어도 십 년 이상 퇴보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게 대수가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다니…….
서재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저었다.
“다 지난 일입니다.”
“내 이 은혜는 꼭 갚겠네.”
“네,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뭐, 나중에 문서로 남겨 주시면 좋고요.”
한빈의 말에 서재오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아까 그 아이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구했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뭐, 그렇게 긴장하실 내용은 아닙니다. 제가 서 대협을 구할 때, 그 아이가 서 대협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 아이의 몸까지 치료하게 된 것이지요.”
“허허.”
“그 아이에 대해서 궁금해하시는 것 같은데……. 그 아이는 천독의 제자였던 청연이라는 아이입니다.”
“처, 천독의 제자라고?”
이틀 전 장면을 떠올린 서재오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마지막에 천독의 목에 칼을 박은 아이가 바로 청연입니다.”
“그 아이는 생기를 잃지 않았나? 대체 어떻게…….”
“뭐, 대협에게 나눠 주었던 선천지기가 조금 흘러 들어가 기연을 만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 때문에 사 공자가…….”
서재오는 황당한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자신뿐 아이라 청연이라는 아이까지 선천지기를 사용해서 살렸다면, 십 년이 아니라 무공을 완전히 잃었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한빈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모든 게 하늘의 뜻이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빈을 보던 서재오는 눈을 비볐다.
한빈에게서 관음보살의 인자함을 본 것이었다.
한빈이 방을 나간 후에도, 서재오의 눈에는 관음보살의 얼굴이 각인되어 있었다.
서재오는 한빈을 오해했던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조용히 합장했다.
그러고는 포근한 미소와 함께 창밖의 하늘을 바라봤다.
“원시천존이시여…….”
* * *
며칠 뒤.
한빈과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다시 객잔으로 돌아왔다.
객잔으로 막 돌아왔을 때,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입을 딱 벌려야 했다.
장운현의 상인들이 객잔 앞에서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