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넌 누구냐? (5)
천독이 이렇게 당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은 이화신기의 은침으로 시선을 돌린 뒤, 바로 좌혈랑검과 우혈랑검을 연이어 날렸었다.
두 개의 혈랑검에는 백발백중의 묘리가 섞여 있었다.
거기에 더해 두 번째 혈랑검에는 성동격서의 수법을 조합했다.
아무리 성동격서의 수법이지만,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부족할 터.
가장 방심하는 신체 부위면서도 가장 소중한 부분을 노린 것이다.
한빈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천독의 독아를 월아로 막았다.
챙!
흥분한 천독은 독기가 아닌 힘으로 누르려 하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천독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천독은 이성을 잃고 흥분하는 바람에 독기와 내공의 일부분을 허공에 날렸다.
하지만, 바로 이성을 찾은 천독은 마지막 한 수를 위해서 독기와 내공을 집중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이성을 잃고 흥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뿐이었다.
천독은 한빈과 검을 맞대고 시간을 벌고 있던 것이었다.
끼긱.
서로 맞댄 두 검이 마찰음을 토해 내고 있을 때였다.
천독의 기세가 점점 변했다.
그 기세의 정체는 무엇일까?
천독의 심장에 독파를 전개하기 위한 독기가 모였다.
천독은 그 기운을 왼쪽 주먹 안쪽에 모았다.
좁쌀만 한 크기로 압축된 독기를 머금은 왼손이 일렁였다.
이제 한빈을 향해 독장을 날리면 될 터였다.
천독은 씩 웃었다.
이제는 천하제일의 고수가 앞에 있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천독이 한빈을 향해 독파의 수법으로 독장을 날리며 외쳤다.
“유언을……!”
천독은 유언을 남기라는 말을 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묘한 기운이 앞쪽에서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같은 기세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놀란 천독이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그건 비밀이야.”
한빈이 답하자 천독의 눈이 커졌다.
‘뭐지?’
의문을 떠올리기도 전에, 화끈한 감각이 천독의 전신을 덮쳐 왔다.
쿠아앙!
쾅!
한빈과 천독의 기파가 충돌한 결과였다.
두 개의 강대한 진기가 중간에서 엉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다.
물론 한빈도 무사한 것은 아니었다.
소용돌이는 월아를 잡은 한빈의 손을 중독시키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새로 얻은 실력편으로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회복을 나타내는 복(復)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때, 한빈의 눈에 응축된 독의 기운이 들어왔다.
한빈이 보기에는 그것이 구결을 나타내는 점처럼 보였다.
한빈은 진기의 소용돌이 속에 재빨리 검을 찔러넣었다.
눈앞에 반가운 글귀가 떴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
[독의 구결로 만독불침의 단계에 한 발 다가섰습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실력편을 확인했다.
[실력편]
[독(毒) : 이십(二十)]
독이란 구결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 수는 무려 이십이었다.
중간에 나온 글귀를 떠올린 한빈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글귀에는 분명 만독불침이란 말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아차 하며 앞을 바라봤다.
자신이 생사결 중임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앞을 보니 천독을 덮고 있던 녹색의 독기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한빈과 천독이 있는 공간은 마치 정화된 것처럼 싱그러운 바람까지 불어왔다.
한빈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초식은 진룡파혼검. 물론 듣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천독을 바라봤다.
신체가 온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초점이 없는 눈으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한빈은 진룡파혼검의 본질에 대해서 조금 알 것 같았다.
진룡파혼검은 절대적 힘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초식이 아니었다.
한빈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본질을 파괴한다.
천독의 본질은 독이었다.
혼을 깨뜨리듯 상대방의 독공과 혼을 삭제한 것이다.
물론 불완전한 진룡파혼검이 아니었다면, 그의 신체까지 날려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만족했다.
천독은 지금 무공이 폐지된 상태.
거기에 정신까지 온전하지 않았으니, 구결을 취한 후 나머지 처리는 다른 이의 손에 맡겨도 되었다.
넋 나간 천독을 쓱 훑어보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갔지?”
한빈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한빈이 찾는 구결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룡파혼검이 구결까지 날려 버린 것이었다.
남아 있던 지급 구결은 날렸지만, 실력편에 독의 구결을 추가했으니 손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잘 들어. 제자와 수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가족을 도구로 쓰는 놈은 하늘에서도 안 받을 거야. 조금 있다가 태워 줄 테니 그동안 반성해.”
말을 마친 한빈은 천독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팍!
천독이 힘없이 날아가 그의 제자 청연이 쓰러진 곳에 떨어졌다.
털썩.
어찌 보면 천벌을 받은 것이었다.
한빈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적이긴 했지만, 대결 도중 토사구팽을 당한 천독의 제자 청연이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청연을 보고 있자니 정의맹에게 버려진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 눈에 선했다.
그때였다.
모두가 한빈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빈의 허장성세에 넋을 잃었던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타다닥.
한빈의 앞에 선 이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주군,”
“무사하셨군요, 주군.”
“주군, 다행입니다.”
막내 조호는 한빈을 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한빈의 무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는 이래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한빈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고했다, 조호. 물론 한 일은 없지만…….”
농담을 던진 한빈이 말끝을 흐리자 여기저기서 헛숨이 터졌다.
“허, 주군, 저도 열심히 싸웠다고요.”
“저도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는데…….”
조호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을 진심으로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빈의 마지막 말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자와 수하는 가족이라고 한 한빈의 말이 아직 귓가에 선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빈의 마지막 말은 모두의 심장에 각인되었다.
한빈과 적혈맹호대 대원이 포근한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서재호가 한빈의 앞에서 어물거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 이런 걸 물어봐도 될는지…….”
“서 대협답지 않게 왜 그래요?”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서재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협은 어떻게 절 아시는 겁니까? 그리고 저분은 대체 누구신지…….”
서재오가 대협이라 칭한 이는 다름 아닌 한빈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킨 쪽에는 백선이 서 있었다.
한빈은 그제야 백선을 아무렇게나 방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사삭.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한빈은 백선에게 다가갔다.
백선의 옆에 선 한빈은 낮은 목소리로 백선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순간 백선이 바람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백선을 보낸 한빈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서는 서재오가 멍하니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멍하니 있는 서재오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서재오가 물었다.
“대체 대협들은 누구십니까?”
“아니, 왜 사람을 못 알아봐요? 서 대협.”
“못 알아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협을 그동안 먹여 주고 입혀 준 사람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합니까?”
“호, 혹시, 사 공자?”
서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런 말투로 이런 식의 말을 건넬 사람은 한빈밖에는 없었다.
한빈이 답했다.
“이제 알아보시네요.”
“그럼 뒤쪽에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였습니까?”
한빈임을 알고 나서도 서재오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다.
서재오는 고개를 돌려 이무명이 있는 곳을 찾아봤다.
이무명은 이미 옷을 갈아입고 턱수염까지 붙인 상태.
동시에 서재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 것이다.
그것도 잠시 서재오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럼 아까 아미파의 선배는 누구신지…….”
서재오가 말끝을 흐리며 백선이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한빈이 바로 답했다.
“제 호위입니다.”
“아미파의 선배가 사 공자의 호위라…….”
“뭐, 나머지는 비밀입니다.”
한빈이 피식 웃었다.
아까 목숨을 걸고 천독에게 맞섰던 서재오는 분명 진정한 무인이고 자신의 가족이었다.
한빈의 정체를 숨길 필요는 없지만, 백선의 존재는 다른 이들에게조차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뒤돌아선 한빈은 적혈맹호대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시는 간단했다.
살아 있는 자는 포박한 후 한곳에 모으고 숨이 끊어진 자는 태우라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자는 강유찬에게 넘겨 국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할 터였고, 죽은 자는 안전하게 화장을 시키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또한 살아 있는 자가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나라에서는 그들을 주적으로 삼고 소탕할 것이었다.
물론 정의맹에게도 알려야 하겠지만, 이제부터 적을 상대하는 것은 무림이 아니라 황실이 되어야 했다.
현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앞서서 천독과 한빈의 결투를 본 이들에게 독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복면을 하고서 독인들의 시체와 살아남은 자를 정리하던 조호가 말했다.
“이건 이제 필요 없겠죠? 장삼 아저씨.”
“주군이 벗으라고 할 때까지는 그냥 걸고 있어라.”
조호는 힐끔 주변을 바라봤다.
다른 대원들도 해독약이 든 목걸이를 풀어 놓으려 하다가 다시 집어넣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같이 보던 장삼이 말했다.
“거봐라, 조호야. 아직은 조심해야 맞다.”
“알았어요, 장삼 아저씨.”
“그래, 그런데 저 양반도 열심히구나.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우리와 같이 이런 험한 작업을 한다니 말이다.”
장삼이 가리킨 곳에는 서재오가 있었다.
조호가 웃었다.
“그러게요. 처음에는 매화검수라고 해서 가까이 가기가 힘들었는데, 요즘은 옆집 아저씨 같아요…….”
조호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느냐? 조호야.”
“어디서 썩는 냄새가 나지 않나요? 잠시 복면을 벗고 맡아 볼까요?”
“아서라, 아직은 위험하다.”
장삼이 조호를 말렸다.
조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한빈도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썩는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주변의 공기가 탁해졌다.
죽은 지 꽤 된 시체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정도를 넘어선 농도였다.
한빈이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서재오는 분주히 움직였다.
생사를 확인한 후 살아 있는 자는 밧줄로 포박하고 죽은 자는 옆으로 밀어 놨다.
그러다가 그는 천독과 청연이 같이 쓰러져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을 정리하기 위해 살피던 서재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독의 다리가 살짝 꿈틀댔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숨통이 끊어지지 않은 듯 보였다.
천독의 상태를 확인한 서재오가 고개를 돌려 한빈에게 물었다.
“사 공자, 이놈은 어떻게 할까?”
이제 예전의 말투를 찾은 그였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다른 시체들과 함께 태워 주세요, 대협.”
“헉!”
서재오가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그럼 서 대협이 데리고 있다가 강유찬 대인에게 전달하시든가요?”
“아, 그건 좀…….”
서재오는 슬쩍 천독을 바라봤다.
장운현을 죽음의 마을로 만들려고 했던 작자였다.
죽이는 것이 맞긴 해도, 산 채로 태우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서재오가 고민에 빠졌을 때였다.
칼 하나가 올라와 천독의 목을 파고들었다.
푹!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재오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이 칼 쥐고 있는 자의 얼굴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생기를 잃어 귤껍질처럼 말라비틀어진 청연이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서재오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허.”
그때 뒤쪽에서 한빈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피해.”
“그게 무슨…….”
서재오는 말을 맺지 못했다.
천독의 몸이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천독의 몸에 힘줄이 꿈틀댄다.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말이다.
드디어 한계를 벗어난 천독의 몸이 터져 나갔다.
꾸아앙!
쾅!
순간 독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쪽을 보니 심미호의 검은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시독(屍毒)이었다.
마을을 집어삼켰던 혈독이 썩으며 기괴한 형태의 독을 만들어 냈고, 죽어가는 천독이 그것을 흡수한 것이다.
저승으로 가면서도 민폐를 끼친다니!
할 말이 없었다. 한빈은 재빨리 다른 이들의 상태를 살폈다.
걱정도 잠시, 한빈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찌 보면 지금 상황은 무인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