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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93화 (193/621)
  • 193화. 넌 누구냐? (3)

    “그런데 아쉽구나. 너 같은 적수를 만난 것도 처음이요, 적이 녹아내린 모습을 보며 내가 아쉬워한 것도 처음이구나…….”

    천독은 진심으로 아쉬운 듯 한동안 한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발을 구르며 한빈을 응원하던 이들이 있었다.

    물론 요란하게 소리를 내던 그들의 칼은 멈춰 있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진득한 살기를 담았다.

    천독은 그들을 세상에서 지우기로 했다.

    만독지체가 된 지금, 그에게 역병은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피부를 감싼 독이 역병의 기운을 녹여 버릴 테니 말이다.

    천독은 거리낌 없이 객잔을 향해 걸어갔다.

    즉, 이제 가짜 역병에 걸린 흑사문 무리는 더는 방패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적혈맹호대와 흑사문의 무인들 모두는 한빈이 천독의 피에 당한 것을 보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

    멍하니 있던 그들을 깨운 것은 천독의 발소리였다.

    쾅!

    우르릉!

    내공을 실어 내딛는 발걸음은 마치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기세를 뿜어냈다.

    당황도 잠시, 정신을 차린 소대섭이 외쳤다.

    “주군을 위해!”

    뒤를 이어 심미호가 외쳤다.

    “팽가를 위해!”

    소대섭과 심미호를 선두로, 적혈맹호대가 천독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심미호의 뒤를 따르던 조호도 이를 악물었다.

    닿기만 하면 녹아내릴 듯한 녹색 독기를 뿜어내는 천독에게 이길 생각은 없었다.

    다만, 주군이 없는 적혈맹호대와 자신의 삶은 생각할 수 없었다.

    조호는 한빈이 사라지는 순간 무인으로서의 자신의 삶도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류 무인을 일류로 만들어 준 것이 누구던가?

    아랫마을 향이와 사랑을 이어 준 것이 누구던가?

    고수의 꿈을 꾸게 해 준 것이 누구던가?

    조호와 적혈맹호대에게 있어 한빈은 모시는 주군을 넘어선 삶의 그 자체.

    조호의 눈에 습기가 맺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 보면 장강에 조약돌 던지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조호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들이 천독이 만들어 낸 기세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질끈 눈을 감고 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려는 적혈맹호대의 앞을 누군가가 막아섰다.

    스르륵.

    소리 없이 적혈맹호대의 앞을 막아선 사람은 백색 무복의 여인이었다.

    여인이 짧게 말했다.

    “멈춰!”

    누가 봐도 적혈맹호대와는 비교도 안 될 고수.

    여인이 풍기는 것은 진득한 살기.

    누가 봐도 천독과 같은 편이었다.

    조호는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순간 귀청을 찢을 듯한 격돌음이 들렸다.

    쩡!

    조호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펼쳐졌다.

    적이라 생각한 백색 무복의 여인이 천독을 향해 일격을 날린 것이었다.

    천독은 기가 막혔다.

    만독불침에 가까운 새파란 놈이 나타나 이제껏 고생했는데, 갑자기 다른 고수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조그만 마을에서 이런 고수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계산해도 그럴 확률은 없었다.

    중원에 있는 모든 무인을 한 줄로 세워 놓는다면, 방금 피떡이 된 젊은 놈과 지금 새로 나타난 여인은 분명 백대고수 안에 들 것이다.

    백 명이라고 하면 많아 보일지는 몰라도, 중원을 백 등분 한다면 서로 마주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거기에 더해 백대고수 중 대부분을 천하 십대세가와 거대 문파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그들과 마주친다는 것은 여름날 평상 위에서 낮잠 자다가 번개에 맞을 확률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천독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우연이 계속 겹친다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부?

    아니면 정의맹?

    그것도 아니라면 마교나 사파?

    천독의 머릿속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백의 여인이 뻗은 구절편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부웅!

    천독이 내뿜는 독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구절편은 한기를 품고 있었다.

    천독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 무공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아미파?

    그중에서도 구절편을 쓰는 여인이라면?

    천독은 독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상대가 백선임을 알아본 것이다.

    팔선 중 하나라면 적이 아니라 아군이었다.

    아군이 자신을 공격해 올 경우는 배신밖에 없었다.

    천독이 외쳤다.

    “네가 배신자였구나! 그래서 모든 계획을 상대가 알고 있었던 것이구나. 내 너를 한 줌 독물로 만들어 줄 테니 기다리거라.”

    “…….”

    백선은 아무 대답 없이 구절편을 휘둘렀다.

    그녀의 만년구절편은 천독에게는 상극이었다.

    줄기줄기 내뿜는 독기의 간격 밖에서 그를 공격할 수 있었고.

    만년한철로 만든 백선의 만년구절편은 독기에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파바박!

    만년구절편이 회오리를 만들어 내며 독기를 안으로 가두고 천독에게 짓쳐들어왔다.

    천독의 가슴에 만년구절편이 닿으려는 순간.

    그의 신형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천독이 다시 나타난 것은 백선의 뒤쪽.

    순간 그는 다시 독기를 뿜어내며 독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천독이 만들어 낸 이형환위의 수법이 백선을 독기에 가둬 버린 것이었다.

    백선도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만년구절편을 작게 휘둘렀다.

    목표는 천독이 아닌 공간이었다.

    구절편은 백선을 중심으로 팽이처럼 돌았다.

    그 결과 독으로 가득 찬 공간 안에 백선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녹색 독혈로 가득 찬 공간 안에 백선이 움직일 공간은 없었다.

    그녀도 그저 버틸 뿐이었다.

    그때였다.

    쩌-억.

    이상한 소리가 나며 녹색 독혈로 덮였던 한빈이 부서져 내렸다.

    이 광경은 천독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힐끔 시선을 돌린 순간, 백선은 천독이 내뿜는 독기의 간격 밖으로 벗어났다.

    이것을 기점으로 잠시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하지만,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정신 줄을 놓고 부서진 녹색 껍데기를 바라봤다.

    어찌나 잘 녹아내렸는지 녹색 껍데기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심미호가 외쳤다.

    “주, 주군!”

    “안 돼!”

    조호가 따라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모두가 다시 칼을 들었다.

    휙, 휙.

    이제는 무서울 게 없다는 듯 천독을 향해 칼을 겨누는 적혈맹호대 대원들.

    그런데 그들을 휙 지나쳐 천독에게 달려가는 이가 있었다.

    타다닥.

    그는 화산파의 매화검수 서재오였다.

    그가 천독에게 맞서기로 한 것은 아미파의 백선을 보고 나서였다.

    아미파는 화산파와는 막역한 사이.

    천독과 맞서는 아미파의 고수를 보니, 화산파의 매화검수의 칭호를 받은 자신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던 것이다.

    다만, 독기에 다가갈 수 없으니 방법을 강구했다.

    서재오는 자신의 검 매화삼경에 천잠사를 만들어 천독에게 맞서기로 한 것이었다.

    슝!

    서재오가 매화삼경을 날리며 외쳤다.

    “아미파의 선배님! 저와 협공하시지요!”

    “…….”

    백선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서재오와 합을 맞추며 천독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둘 다 독기의 영향 밖에서 공격하자 이제 천독과 동수를 이룰 수 있었다.

    * * *

    그들이 생사결을 펼치는 동안 멀리 떨어진 전각에서 팔짱을 끼고 이 싸움을 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한빈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이치는 간단했다.

    한빈이 마지막에 쓴 수법은 금선탈각이었다.

    껍데기만 남기고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한빈은 오늘에야 깨달았다.

    진짜 매미가 허물을 벗듯, 껍데기만 남기고 이곳으로옮겨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독기에 눌어붙은 옷과 피부는 그 자리에 남고, 한빈의 본체는 이형환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자리를 떠났다.

    물론 알몸이 된 한빈은 쓰러진 적들의 옷을 대충 주워 입고는 전각에 올라선 상태였다.

    그러고는 한빈에게 달려온 백선을 만났다.

    백선이 온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한빈이 휘파람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한빈의 흑수대를 해치우며 불던 휘파람 소리는 상대를 겁박하기 위해서 불던 것이 아니었다.

    바로 백선을 호출하는 신호였다.

    한빈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이유는 뜻밖의 기연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팔짱을 낀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신 공력이 일 갑자를 넘었습니다]

    [천지일연공을 습득하셨습니다.]

    [천지일연공이 본래의 이름으로 변경됩니다.]

    [여의심법(如意心法)을 습득하셨습니다.]

    [최초의 심법 획득으로 용혈지체로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여의심법의 습득으로 심화편이 열렸습니다.]

    여기까지는 방금 본 글귀였다.

    한빈은 어떻게 본신 내공 일 갑자를 채워 천지일연공을 얻을 수 있었을까?

    사실 이번 대결 전에 복용한 영약으로는 일 갑자의 본신 내력을 성취하지 못했었다.

    상승 심법을 익히지 않은 관계로 단전의 크기가 일정했으며, 단전에 흡수되지 않은 내공은 산산이 흩어졌다.

    그런데, 천독과의 대결에서 그 내공 중 일부가 몸 안에 잠들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피부, 장기, 그리고 근육.

    모든 곳에 흩어져서 잠들어 있던 내공을 천독의 강력한 독기가 깨운 것이다.

    그 깨어난 독기가 금선탈각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빈의 단전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끝없이 몰려드는 내공에 한빈의 단전은 금이 갔다.

    그런데 무한대로 쓸 수 있는 회복의 속성 때문에, 금이 가고 아물고를 반복하며 신체에 잠들어 있던 내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빈은 천독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물론 그 인사는 검으로 할 것이었다.

    그때 한빈의 시야에 독기에 갇힌 백선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빈은 재빨리 전각의 지붕 위를 구르는 조그만 돌을 잡았다.

    ‘백발백중!’

    한빈이 날린 조그만 돌이 한빈이 탈출한 껍데기로 날아갔다.

    퍽!

    동시에 녹색 껍데기가 무너져 내렸다.

    백선을 위기에서 구한 한빈은 재빨리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지금은 그들의 대결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눈에서 반짝이는 깨달음이 중요했다.

    용린검법의 비급이 반짝이기 시작하며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심화편(深化編)]

    [여의심법-여의심법은 심화편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심법입니다. 여의심법으로 당신은 여의주를 입에 문 용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여의주 안에 용린검법의 심법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여의심법의 첫 번째 연계 심법이 각인됩니다.]

    [책장에 연계심법 중 일신우일신이 등록되었습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 용린의 주인은 본래 매일 숨만 쉬어도 하루하루가 새롭습니다. 언제나 운기하는 효과를 얻습니다. 초식의 시전 속도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한빈은 입을 떡 벌렸다.

    전생의 기억에서 천지일연공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상승의 심법이라 알려졌었다.

    하지만, 누구도 익히지 못했던 심법.

    가만히 있어도 운기의 효과를 보게 된다는 것이 천지일연공의 최고 단계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용린검법의 심화편 중 연계심법의 하나인 일신우일신의 효과에 불과했던 것이다.

    용린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천지일연공의 진짜 활용을 알 수 있는 자가 있을까?

    거기에 더해 한빈이 영약이 아닌 다른 심법으로 일 갑자의 공력을 얻었다면?

    천지일연공뿐 아니라 심화편도 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천운.

    그때 설화가 옆에 스르륵 나타났다.

    “공자님, 저 왔어요.”

    말을 마친 설화가 보따리를 펼쳐 놓았다.

    그녀가 펼쳐 놓은 보따리 안에는 옷과 마실 물이 있었다.

    “그래. 수고 많았어, 설화야.”

    “공자님, 그런데 아래쪽 그냥 놔둬도 되겠어요?”

    “…….”

    한빈은 말없이 설화가 가리키는 곳을 힐끔 봤다.

    아래쪽에서는 구절편을 휘두르는 백선과 독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천독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저 얽혀 있는 실타래를 푸는 것은 한빈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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