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89화 (189/621)

189화. 사면초가 (9)

청연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터벅터벅 청연을 향해 걸어오던 한빈이 걸음을 멈췄다.

탁.

마치 장벽에 걸린 것처럼 갑자기 멈춘 한빈의 모습에 돌격하던 청연도 동작을 멈췄다.

갑자기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침 몇 번 삼킬 시간이 지나자 한빈이 외쳤다.

“그만 나오시지요!”

한빈이 외침에도 답하는 이는 없었다.

간간이 객잔 쪽에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전부였다.

한빈이 바라보고 있는 장운현에서 가장 높은 전각이 있는 곳.

한빈의 옆에 있는 설화도 고개를 갸웃했다.

오죽하면 한빈을 보며 독기를 스멀스멀 피우고 있던 청연마저도 시선을 돌렸다.

한빈은 과연 누구를 부른 것일까?

그것이 한빈을 제외한 사람들의 의문이었다.

적인 청연도.

한빈의 옆에 있는 설화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전각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전각의 가장 높은 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내공을 실은 듯한 웃음소리는 마치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웃음소리에는 진득한 살 향이 묻어나왔다.

그 잔향이 사라지기도 전에 전각의 가장자리에서 독선 천독이 녹색 장포를 펄럭이며 나타났다.

그 모습에 놀란 것은 한빈이 아니라 청연이었다.

“사부님.”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사부 천독은 며칠 후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청연이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천독은 녹색 장포를 펄럭이며 건물 사이를 건너뛰어 다가왔다.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천독이 웃었다.

“하하, 고생했구나, 청연아.”

“사부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요?”

“너구리를 잡으려면 불을 지피라는 말이 있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저놈이다. 이제부터 저놈을 잡아 역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아낼 것이다. 그때는 내 별호가 독선 천독이 아닌 독선 만독이 되겠지, 하하.”

천독은 마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듯 한빈을 무시한 채 제자 청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중간에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하하.”

그 소리는 천독이 내던 내공이 실린 웃음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마치 가을 단풍나무 아래에 떨어진 낙엽만큼이나 하찮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 없는 웃음의 주인이 문제였다.

천독은 황당하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네놈이 웃을 때이더냐?”

“웃지 않으면 어쩝니까?”

“뭐가 웃기더냐?”

“적을 앞에 두고 사제 지간의 해후라니, 하품이 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부터 보고 있을 텐데, 죽어 가는 부하들은 왜 그냥 놔뒀습니까?”

질문을 던진 한빈은 힐끔 청연 쪽을 바라봤다.

한빈의 질문에 반응한 것은 역시 청연이었다.

“저게 무슨 말입니까, 사부님? 저자가 말한 부하가 흑수대라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말끝을 흐린 청연은 주변을 둘러봤다.

적의 등장과 사부의 웃음소리.

연이어 난 소란에도 흑수대의 반응은 없었다.

청연이 다시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사부.”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흑수대는 청연의 전부였다.

그들은 몸속에 흐르는 피와도 같았다.

하지만, 천독은 감정 없이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저자의 말대로다. 흑수대는 이제 없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라 저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수하들을 잃은 수장이 자격이 있을까?”

“사부.”

“내 밑에 있고 싶다면 그 자격을 증명해라.”

천독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실려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화경의 고수.

그때 한빈이 다시 끼어들었다.

“살릴 수 있는 수하를 그냥 죽도록 놔둔 자가 할 소리는 아니군. 수하를 미끼로 던져둬 놓고 나서 자격을 증명하라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허허, 네 의술을 높이 여겨 거두려 했는데, 혀에 가시가 있구나. 네 놈의 혀부터 뽑아 줘야 할 것 같구나.”

“뽑으려면 뽑으시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물에 빠진 수하를 구하지 않은 상관이 있다면 물을 원망해야 할까? 아니면 상관을 원망해야 할까?”

“네놈이…….”

독선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후에도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이나 둘의 설전은 이어졌다.

옆에서 대화를 듣던 설화는 기가 찼다.

분명 적을 처치한 것은 한빈과 자신.

그런데, 한빈의 논리에 의하면 정작 나쁜 놈은 천독이었다.

그 논리가 어찌나 그럴듯한지, 설화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설화가 옆을 힐끔 봤다.

자신뿐 아니라 적으로 맞선 청연이라는 독인조차 한빈의 말에 수긍하는 눈빛이었다.

그 결과 분노의 눈빛을 청연의 사부인 천독에게 흘리고 있었다.

천독이란 자도 바로 한빈을 치지 않고 논리에 반박하려 애쓰고 있었다.

마치 입으로 무공 대결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으로 무공을 논한다면 자신이 모시는 한빈은 화경의 끝인 십이 경의 수준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한빈과 논리로 맞서던 천독의 얼굴은 화를 억누르지 못한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지금은 벌게진 것을 넘어서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천독이 표정을 수습하고 외쳤다.

“혀에 마귀가 씐 놈이로고! 내 특별히 네 혀를 잘라 그 위에 글자를 새겨 주마!”

말을 마친 천독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주변에서 사악한 기운이 퍼졌다.

곧 기운이 퍼지며 한빈과 천독을 중심으로 하여 삼백여 장 밖으로 연기가 피어났다.

보통 굴뚝에서 볼 수 있는 희뿌연 연기가 아닌 녹색 연기가 줄기줄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가 한빈과 설화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물론 흑사문이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객잔 쪽은 빼고 말이다.

한빈은 힐끔 그곳을 보며 말했다.

“독연이네. 녹색을 띠는 거 보면 저 독 엄청 비싼 건데. 준비 많이 했나 봐, 늙은이.”

“네놈의 웃음도 여기까지다.”

피식 웃은 천독이 다시 손뼉을 쳤다.

짝짝!

이번에는 두 번. 그 신호에 맞춰 연기를 뚫고 복면을 한 독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빈이 해치웠던 흑수대와는 달랐다. 그들의 옷은 모두 녹색이었다.

녹색은 천독이 생각하는 독의 가장 순수한 색이었다.

그들은 천독이 키운 초특급 독인인 천인천독대였다.

여기서 ‘천인’의 의미는 그들 하나가 능히 천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아무리 고수라도 천 명을 상대한다?

그것은 일반 무인이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독인이라면 다르다.

독 하나로 백 명의 고수를 녹일 수 있는 것이 독공의 세계였다.

천인천독대를 본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독선의 존재는 몰라도, 전생에 천인천독대와 마주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앞에는 천독.

뒤에는 천인천독대.

사실 천인천독대의 등장은 한빈의 계산에서 어긋난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청연이라는 독인과 천독 사이에 자중지란을 일으켜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것이 계획이었다.

한빈이 재빨리 손가락을 튕겼다.

딱!

설화가 한빈을 바라보자 한빈이 외쳤다.

“삼!”

동시에 설화가 사라졌다.

삼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실시하라는 신호였다.

설화가 다시 나타난 것은 객잔의 울타리 쪽이었다.

그곳에서 설화는 아무렇지 않게 쪼그리고 앉아 천독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의 옆에는 흑사문의 장대찬이 있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목을 빼고 한빈과 천독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장대찬은 그들의 대화에서 천독이 장운현의 사람들을 몰살시키려는 독인임을 알았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장운현에서 난 역병도 그들의 짓 같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한빈과 죄 없는 장운현의 사람들을 죽이려는 천독.

둘 중 과연 누가 악인일까?

장대찬이 보기에는 둘 다 똑같은 악당이었다.

물론 사파인 장대찬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한빈을 응원했다.

한빈이 지면, 자신도 한 줌 핏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화가 빠져나가자 한빈은 품속에서 붉은색 천 하나를 꺼내 입을 중심으로 얼굴을 꽁꽁 싸맸다.

한빈이 입을 가리는 데 사용한 천은 장백산 백년설삼의 잎으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 남해에서 나는 진귀한 산호의 진액을 뽑아 천에 입힌 상태.

물론 천리 표국을 통해서 미리 구해 놓은 물건이었다.

피독주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구해 놓은 건데, 때마침 상대가 독연을 피우니 급하게 꺼낸 것이다.

한빈의 대응을 본 천독은 기가 막힌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더냐??”

“혀가 긴 거 내가 아니라 늙은이잖아! 왜 자꾸 바쁜 사람한테 말을 걸어? 나도 내 일을 할 테니 늙은이도 하던 일마저 해, 말 시키지 말고.”

한빈의 빈정대는 말투에 노한 천독이 외쳤다.

“쳐라!”

그 목소리에 맞춰 먼저 반응한 것은 한빈이었다.

사사삭.

천독의 앞에서 한빈은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천독은 설화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곳으로 도주했다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설화가 있는 곳에는 역병에 걸린 무리들만 득실댈 뿐 한빈은 없었다.

천독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독연이 주변을 덮고 있기에 목표를 찾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따랐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자충수!”

공력이 실린 목소리였다.

천독이 외쳤다.

“네놈, 실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

하지만, 한빈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한빈의 목소리 대신 비명이 들려왔다.

“악!”

비명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봤다.

그곳에는 녹색 무복을 입은 천인천독대의 독인이 쓰러지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부러진 수수깡처럼 꺾이고 있었다.

침 몇 번 삼킬 시간이 지날 때 다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악!”

그들의 비명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졌다.

얼마나 일정한지 박자를 맞추는 것만 같았다. 마치 칠현금에 맞춰 예인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빈에게 지금 상황은 물 만난 물고기였다.

만약 천독이 단독으로 달려들었으면 더 상대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수의 부하를 한빈에게 보내는 바람에, 한빈의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순한 빛이 아닌 눈이 부셔서 안 보일 정도의 빛 말이다.

실제 한빈은 녹색 연기 속에서 완벽하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다.

경공술의 빠름과 반박귀진의 은밀함이 완벽한 조합을 이룬 것이다.

한빈은 조용히 새로 나타난 글귀를 확인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地級) 구결 탈(脱)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금(金), 각(殻). 선(蝉), 탈(脱)]

마지막 조각을 맞춘 한빈은 천독의 눈을 피해 초식을 확인하고 있었다.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인급(人級) 초식 금선탈각(金蝉脱殻)을 획득하셨습니다.]

[금선탈각(金蝉脱殻) - 용린검법의 초식 중 이형환위의 수법에 해당합니다. 금선탈각을 시전 시 껍데기만 남긴 채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열두 시진마다 한 번 사용 가능합니다. 필요 공력 오 년.]

그때였다.

천독이 다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안개를 만들고 있는 독연을 걷으라는 신호였다.

천인천독대의 독인들이 분주히 움직일 때,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

천독이 내는 손뼉 소리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공력이 실린 소리였다.

물론 이것은 한빈이 내는 소리.

한빈은 천독의 소리마저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천독은 재빨리 독연을 만드는 화로를 손수 뒤집었다.

급한 김에 뒤집었지만, 그곳에 담긴 독물의 가치는 능히 황금 열 냥 이상이었다.

어느 정도 안개가 걷히자 처참한 광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