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사면초가 (8)
“죽일 놈과 이용해 먹을 놈은 적당히 나누는 게 이득이야.”
“이용하다니요?”
“때로는 살려 두는 게 적에게 더 큰 짐이 될 때가 있어.”
“살려 두는 게 이득이라는 말씀인데, 저는 이해가 안 되네요.”
“옛 성현들이 쓴 병법서에 보면 이런 질문이 나오지.”
“어떤 질문이요?”
“전쟁에서 상대의 전력을 약화하려면 과연 어디를 베어야 할까?”
“단번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심장요?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머리를요?”
설화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 본 듯,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저었다.
“병법서에서 제시한 답은 그게 아니었다.”
“그럼 그게 어딘데요?”
“가장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부위는 다리였다.”
“다리라…….”
설화는 눈을 깜빡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전우를 버릴 수 없으니 부축하겠지. 그럼 부축한 병사는 어떻게 싸울까? 그리고 체력은? 병사 하나의 다리는 동료 세 명의 발을 묶는다는 이야기가 있지. 두 명은 부축하고 한 명은 경계하고.”
“아, 그렇군요.”
설화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눈을 빛냈다.
동시에 우혈랑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잠시만 여기 계세요, 빨리 어디 좀 다녀올게요.”
말을 마친 설화가 한빈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한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설화가 다시 나타난 것은 기침 몇 번 할 시간이었다.
한빈은 설화에게 무엇을 하고 왔느냐 묻지 않았다.
우혈랑검에 묻은 혈흔이 설화가 무엇을 하고 왔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아마도 한빈이 처리한 흑의인의 다리를 …….
한빈이 설화의 칼질을 상상하고 있을 때, 설화가 물었다.
“왜 안 물어보세요?”
“우혈랑검을 쓰고 온 거 아니냐?”
“앗, 어떻게 아셨어요?”
“그럼 경계조의 다리를…….”
“사람 말고 쥐요. 원래는 빈집에 있는 토끼를 이용할까 했는데…….”
설화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 있던 표정이 점점 흐려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뜻밖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쥐는 뭐고 토끼는 뭐란 말인가?
몇 걸음 걷던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책망하려는 게 아니니, 그냥 편히 말해 봐.”
한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설화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원래는 토끼에게 상처를 내려고 했는데, 불쌍하더라고요.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상처까지 입으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쥐를 찾았어요.”
“쥐라고?”
“네, 제법 많이요. 상처 난 쥐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돌아다니게 만들었어요.”
“흠, 쥐라……. 그 이유가 뭐지?”
한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자 설화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공자님이 원하시는 게……. 적에게 단순히 짐을 안기는 걸 원하시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설화야, 너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니?”
“…….”
“그냥, 편히 말해.”
“혼란 아닌가요?”
설화의 대답에 한빈이 소리 없이 웃었다.
설화는 초특급 살수답게 이번 초반 작전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이었다.
“장식 고맙다.”
“장식이라니요?”
“요리의 가격이 무엇에서 갈리는지 아니?”
“맛 아닌가요?”
“물론 맛이지. 하지만 그건 가장 기본적이고, 은자 한 냥짜리 요리인지, 열 냥짜리의 요리인지 갈리는 것은 맛이 아니라 장식이지.”
“장식이요?”
“유명한 숙수가 맑은 물에 꽃 하나 띄워 놓으면 가격이 몇십 배 뛰기 마련이지.”
“그럼 제 생각을 아신 거네요, 공자님.”
“네가 상처를 내 놓은 쥐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혈향을 풍길 테니 적도 정신이 없겠지. 네가 한 일은 이번 임무에 있어 훌륭한 장식을 한 거라 생각해, 설화야. 조금 과분한 장식이긴 해도…….”
한빈은 웃으며 뒷말을 흐렸다.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생략한 것이다.
한빈은 설화의 창의적인 발상이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설화는 완벽한 살수가 될지도 몰랐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토끼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설화가 완벽한 살수가 될 수 있을까?
설화가 멀뚱거리며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어쨌든 잘했다는 게 결론이야, 설화야.”
“헤헤.”
설화가 해맑게 웃자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다시 시작한다.”
사사-삭.
동시에 한빈이 빠르게 사라졌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수확이었다.
* * *
소리 없이 적을 해치우기에는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보통 살수나 독인들이 암살을 위해 집단을 조직하게 되면, 경계조와 필살조로 나누기 마련이었다.
일류 독인들로만 구성된 경계조(儆戒組)에 비해, 상대의 숨통을 끊으려는 필살조(必殺組)는 고수로 구성되어 있는 법.
조금 더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도 한빈의 손길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떠 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각(殻)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금(金), 각(殻).]
기본편의 구결을 모두 채우는 동시에 인급 구결도 하나 획득했다.
설화가 일류 독인들을 해치우고 있으니, 이제 한빈이 상대해야 할 적은 초절정 독인 둘이었다.
한빈은 초절정이라 생각되는 흑의인을 바라봤다.
동시에 일촉즉발의 수법을 사용했다.
한빈의 몸이 화살촉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월아에 맺힌 푸른 검기가 상대의 심장을 꿰뚫었다.
“헉!”
상대는 낮은 비명을 터뜨리며 꼬꾸라졌다.
털썩.
순간 옆에 있는 다른 흑의인이 고개를 돌렸다.
한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월아를 횡으로 그었다.
동시에 흑의인의 머리가 몸통을 떠났다.
털썩.
데구루루.
머리가 바닥에 뒹굴자 스산한 바람을 타고 혈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을 바라보며 구결을 확인했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선(蝉)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금(金), 각(殻). 선(蝉)]
이제 세 개의 인급 구결이 모였지만, 아직 갈 길은 멀었다.
한빈의 손속은 이번만큼은 가차 없었다.
그 기준은 간단했다.
바로 그들의 체취에 풍기는 혈향 종류였다.
풍기는 혈향으로 보아, 방금 목숨을 거둔 두 독인의 손에 죽은 장운현의 사람이 꽤 될 것이 분명했다.
강호에서 손에 피 한방을 안 묻힌 자가 어디 있겠느냐만은, 무공을 모르는 이들을 한 줌 핏물로 만드는 자들까지 살려 두어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이용할 자는 이미 마혈을 제압해 놓은 자들만으로도 충분했다.
한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은 적당하게 기척을 풀어놓고 적을 제거했다.
초절정의 고수라면 느끼지 못할 테고, 화경의 고수라면 한빈의 기척을 알아챘을 것이었다.
그런데 화경의 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팔선 중 하나라면 분명 상대는 화경의 고수.
그런데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라?
수하들에게 이곳을 맡겨 놓고 다른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함정일까?
뭐, 둘 중 어떤 경우라도 좋았다.
한빈은 이제 팔선 중 하나를 제외한 고수를 처리해야 했다.
한빈은 다시 기척을 죽였다.
사사삭.
한빈이 기척을 죽이며 목표를 향해 다가가고 있을 때였다.
제법 먼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는 구결 말고 더 중요한 것을 얻을 것 같은 느낌에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머리가 모습을 드러내다니……. 운이 좋네.’
속으로 쾌재를 부른 한빈은 은신을 풀고 목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 *
객잔에서 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청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혈향이 바람에 실려 날아왔기 때문이다.
수상한 느낌에 주변에 신호를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옆으로 토끼가 깡충깡충 뛰어서 지나갔다.
피를 흘리며 가는 토끼.
집에서 기르는 토끼 같은데, 아무래도 주인을 잃고 나왔다가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아마 혈향은 저 토끼에게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청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오늘따라 조금은 따분했다.
저 멀리 객잔의 울타리 안에서는 아직도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감시하는 것을 모르더라도, 장운현에 발생된 역병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저렇게 술판을 벌이고 있다니?
거기에 적혈맹호대의 수장인 하북팽가 사 공자는 거기에 어울려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독물에 녹아내려도 될 정신이 나간 집단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강호인이라면 누구든지 아는 칼의 노래.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든 칼에 자신의 목이 떨어진다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노래.
전쟁에 참가하는 병사들이 긴장을 풀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청연은 그들의 노래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연은 달을 바라보며 대충 시간을 계산했다.
먼동이 트기까지 남은 시간은 반 시진.
반 시진이 지나면 포위망을 조금 넓히고 지켜보는 것이 맞았다.
흑수대의 수장인 청연이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부인 천독이 돌아오기 전에 성과를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부는 잠시 장운현 밖으로 나간 상태.
돌아오기까지는 삼 일의 시간이 있었다.
삼 일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고 생각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시간이었다.
청연은 다른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 줄을 잡았다.
천잠사 몇 가닥을 꼬아 만든 줄을 잡아당기면, 멀리 떨어진 초소 쪽에서 조그만 방울이 울리는 원리였다.
한 번 울리면 교대, 두 번 울리면 적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녀가 막 줄을 한 번 당기려는 때였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휘이익, 휘!
마치 마부가 말을 부르듯 짧게 울려 퍼지던 휘파람 소리가 점점 바뀌었다.
묘하게 곡조까지 띠고 있었다.
심금을 울리는 곡조.
묘하게 객잔에서 부르는 칼의 노래와 어우러진다.
“뭐지?”
눈매를 좁히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눈앞에서 야행복을 입은 괴인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청연은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포위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지금 상황을 보면 꼭 포위당한 기분이 들었다.
청연은 재빨리 줄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어떤 저항도 없이 줄이 딸려 왔다.
휙!
청연은 눈을 크게 떴다.
줄이 끊긴 것이다.
천잠사 몇 가닥을 꼬아서 만든 줄이었다.
웬만한 도검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흑수대의 무기였다.
초절정의 무림 고수 중에 저 천잠사 밧줄에 목이 달아난 자가 몇이던가?
웬만한 보검보다 더 날카롭고 단단한 것이 저 천잠사로 만든 밧줄이었다.
그런데 그 줄이 끊어지다니!
문제는 줄이 끊어지면서 그녀가 있는 쪽에 매달린 방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청연은 갑자기 공포라는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공포감이라는 것이 머리를 잠식하면 나타나는 현상은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난다.
도망치거나, 상대를 파악하지 않고 달려들거나.
청연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청연은 재빨리 장갑을 벗고 적을 향해 달려갔다.
순간 그녀의 손에 어린 푸른 독기가 점점 진해지더니 옅은 독 향을 피워 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가 풍기는 독 향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한빈이었다.
청연이 본능적으로 외쳤다.
“누구냐!”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적도 아니고…….”
야행복을 입은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한빈의 태도를 보면 소풍 나온 듯한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