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87화 (187/621)

187화. 사면초가 (7)

“혈랑검이라…….”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화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전에 황제 폐하가 내려 주신 칭호인 혈랑공자를 따서 그렇게 부를래요.”

“흠, 그건 알아서 하고.”

“참, 그냥 혈랑검이 아니라 우혈랑검이라고 해야겠네요.”

“우혈랑검이라고?”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설화가 혈랑검을 가리키며 답했다.

“한 자루 더 있잖아요.”

“…….”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 자루 더 있다는 것은 조금 전에도 한빈이 얘기한 사실이었다.

설화가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다른 사람한테 주면, 그 사람이 자기가 오른팔이라고 우길 거 아니에요. 공자님 오른팔 찜해 놓으려면 단검에 오른팔이라는 표시를 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헤헤.”

실없이 웃는 설화의 모습에 한빈도 마주 웃었다.

“그것도 알아서 하려무나, 설화야.”

“네, 공자님, 그럼 저는 체력 좀 보충하고 사냥 준비해 놓을게요.”

“그래라.”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설화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한빈의 방을 빠져나갔다.

설화가 사라지자 한빈이 혼잣말을 뱉었다.

“무명이가 서운해하려나?”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성이 높아지는 임무였다.

사람이 많다 보면 때로는 자신의 칼이 되는 게 아니라 짐이 될 때도 있었다.

이제 한빈 나름대로 결전을 준비해야 할 때.

한빈은 품에서 진세미가 준 백령단을 꺼냈다.

가부좌를 튼 한빈은 지체 없이 백령단을 입에 넣고 씹었다.

영단을 복용하는 날을 오늘로 잡은 이유는 오늘이 양기가 가장 활발하다는 날이기 때문이다.

한빈은 오늘 백령단을 흡수해서 본신 내력 일 갑자에 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날을 잡아 영단을 흡수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영단을 복용하면 복용할수록 그 효과가 감소되기 때문이다.

즉, 같은 영약이라도 처음 복용했을 때는 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다음은 오 년, 그다음은 이 년, 끝내는 반년의 내공조차도 얻기 힘들어진다.

흔히 강호인들이 말하는 영단 효용 감소 현상.

이제까지 이 이론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백령단은 하남 백사문의 보물.

아무리 감소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일류의 무인이 먹게 되면 능히 십 년의 내공이 차오르는 영약이었다.

즉 한빈은 이번 복용이 끝나면 가뿐히 본신 내공 일 갑자에 도달할 것이라 믿었다.

마치 간식을 씹듯 아무렇지 않게 백령단을 삼킨 한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빈이 눈을 뜬 것은 정확히 한 시진이 지나고 나서였다.

* * *

그날 밤.

반쯤은 기울어진 달은 여유 있게 세상을 내려다보듯 어슴푸레 객잔을 비추고 있었다.

어둠과 달빛이 적절히 버무려질 때쯤, 적혈맹호대가 머무는 객잔에서 희미한 그림자 두 개가 빠져나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울타리 위에 앉아 있던 새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달빛 아래 눈매를 좁히며 객잔을 감시하던 청연도 두 개의 그림자가 빠져나가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만 조용히 후각에 집중할 뿐이었다.

만약에 객잔에서 사람이 은신한 상태로 밖으로 나온다면?

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냄새는 감출 수 없었다.

그 냄새를 구별하기 위해서는 그리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마을의 냄새는 딱 두 가지로 갈렸다.

한 가지는 평범한 사람의 냄새, 즉 무취를 뜻한다.

또 한 가지는 허혈초에 중독된 사람. 자신의 몸에 베어 있는 혈독의 향취를 풍길 것이었다.

혈독에 중독된 자는 역병에 걸린 줄 알고 집에서 끙끙대고 있을 테니, 혈독의 향기를 풍기는 이는 아군밖에 없었다.

아군을 뺀 나머지 냄새에 집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의 체향에만 집중하면 되니 말이다.

청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객잔을 감시하는 한편, 후각에 모든 공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청연을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

그것은 물론 한빈과 설화였다.

적혈맹호대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객잔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무명은 한빈으로 위장하여 객잔의 앞마당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며, 나머지 대원들도 몸을 드러낸 채 앞마당에서 술병을 쥐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술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을 방심시키기 위한 위장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빈이 뿔피리를 불면 번개처럼 튀어나올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최후의 수단.

그런 개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한빈은 적의 숨통을 끊어 놓기로 했다.

한빈은 손짓으로 설화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리를 옮기자, 설화야.’

‘네, 공자님.’

둘은 손짓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순간 둘은 바람 부는 소리만 남긴 채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은 설화와 함께 적의 규모를 살폈다.

생명을 건 혈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피지기(知彼知己)였다.

나를 아는 것은 지금도 충분하니, 이제 적의 규모를 정확히 알면 계산할 수 있을 것.

적의 병력이 다소 앞선다면, 하루에 끝내는 것이 아닌 간헐적으로 치고 빠지는 것이 유리했다.

하지만, 다소가 아닌 우월이란 표현이 적절하다면, 일단 튀는 게 상책이고 말이다.

적의 규모를 살펴본 한빈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규모는 대략 서른 명.

초절정 세 명에 절정 다섯 명, 나머지는 일류의 고수들이다.

이것은 내공을 기준으로 파악한 것이고.

몸에 쌓은 독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중독되기 전에 적의 제압하면 그만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두 맹독이 흐르는 독인은 이제껏 보지 못했으니 충분히 제압이 가능했다.

결론은 상황에 맞게 적을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낮에 얼핏 느꼈던 화경의 고수인데, 실수인지 아니면 한빈을 방심시키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백 걸음 안쪽으로는 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경의 고수가 기척을 드러낸다면?

설화와 함께 울타리 쪽으로 몸을 피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의 흑사문은 최고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빈은 몇몇 목표물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조용히 허공을 올려다봤다.

[인급(人級) - 금(金)]

구결을 확인한 한빈은 목표물의 신체에 일렁이는 점을 다시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들에게 구결을 취하면 인급 구결 하나가 후딱 완성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빈에게 저들은 적이 아닌 먹잇감.

여차하면 필요한 구결을 취한 후 튈 생각이었다.

막 목표를 향해 돌진하려던 한빈이 설화를 힐끔 바라봤다.

‘뭐지?’

한빈은 헛웃음이 나왔다.

설화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게 요즘 들어 생긴 설화의 버릇이었다.

고의로 그러는지 무심코 그러는지는 몰라도 요즘 한빈을 따라 하고 있는 설화였다.

한빈은 피식 웃은 뒤 설화에게 손짓을 했다.

은신 후 후방에서 엄호하라는 신호였다.

설화가 기척을 완벽하게 지우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스르륵.

한빈도 초식을 운용했다.

‘구걸십팔보.’

‘전광석화.’

‘백발백중.’

모는 준비를 끝낸 한빈도 스산한 소리와 함께 신형을 감췄다.

사사삭.

동시에 한빈은 검은 복면을 한 적에게 은침을 날렸다.

달빛 아래 노출된 적이 한빈의 일차 목표였다.

휙.

휙.

네 개의 은침이 정확히 두 명의 적에게 각각 날아갔다.

푹. 푹!

동시에 은침은 적들의 어깨와 목울대에 박혔다.

아혈과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털썩.

둘이 동시에 제자리에서 쓰러지자, 한빈의 신형이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눈만 껌뻑이는 흑수대 대원의 앞에 나타난 한빈은 그들에게 귀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한빈이 둘 중 앞에 쓰러진 흑의인을 보더니 나지막이 물었다.

“눈만 깜빡여라. 내 말이 맞으면 한 번, 아니면 두 번 깜빡이면 된다. ”

흑의인은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한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너희 대장까지 합쳐서 몇 명이지? 서른 명?”

“…….”

흑의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빈은 발로 흑의인을 툭 건드렸다.

작은 힘만으로 흑의인은 바닥을 보고 엎어졌다.

문제는 여기에서 생겼다.

한빈이 제압한 것은 사혈은 아니지만, 그것은 적당한 깊이에 적당한 내공을 더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몸이 뒤집힌 흑의인의 목과 어깨에 박힌 은침이, 체중 때문에 그대로 목덜미 뒤와 어깨 뒤쪽으로 뚫고 나온 것이다.

앞쪽은 마혈이지만, 침이 뚫고 나온 것은 가장 통증을 주기에 적합한 혈도였다.

흑의인은 갑자기 몰려드는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호에서 말하는 분근착골의 고문을 당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한빈이 그에게 더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엎어 놓은 흑의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두 번째 흑의인에게 걸어갔다.

번개에 맞은 것처럼 거품을 물고 몸을 떠는 동료를 본 두 번째 흑의인은 한빈을 보자마자 쉴 틈 없이 눈을 깜빡였다.

협조하겠다는 표시였다.

한빈은 두 번째 흑의인에게 정확한 인원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인원은 한빈이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 많은 서른여섯 명이었다.

한빈은 떠나며 온전히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흑의인의 손을 바라봤다.

독공을 익힌 자가 가장 많이 쓰는 무공의 종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독장(毒掌)이었다.

가장 큰 면적으로 상대에게 독을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손바닥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손을 보면 그들의 성취를 알 수 있었다.

독장을 익힌 자의 특징이 지금처럼 장갑으로 자신의 손을 가리는 것이었다.

저렇게 장갑을 끼면 일반인처럼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으며, 자신의 경지도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독인(毒人)이라고 하면 누가 그에게 가까이 가겠는가?

희미한 푸른 선이 몇 가닥 보였다.

일반 무공으로 치면 일류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독인이었다.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은침에는 독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

흑의인은 말은 없었지만, 안도의 눈빛을 보냈다.

그 모습에 한빈은 피식 웃었다.

독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의외로 독이었다.

한빈은 다시 말을 이었다.

“독은 아니고 역병의 피를 묻혀 놨으니 너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저기 울타리 앞에 있는 자처럼 될 것이야. 그러니 너희 주인에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도망쳐서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할 것인지는 알아서 판단해. 내 설명은 여기까지.”

한빈은 나뭇잎 밟는 소리만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한빈은 그 후 열 명의 흑의인을 같은 방법으로 처리했다.

한빈이 처리한 흑의인은 한마디로 경계조였다.

경계조가 무너진 이상 넓게 퍼져 있는 적들이 한빈을 알아챌 재간은 없었다.

이제 이 퍼져 있는 적들을 하나씩 처리해야 했다.

확인된 적 중 일류의 독인들은 설화가, 나머지는 한빈이 처리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한빈이 손짓하자 설화가 나타났다.

스르륵.

한빈은 객잔의 주변이 그려진 지도를 펼쳤다.

그 속에는 이미 처리한 경계조와 남은 고수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한빈은 그중 설화가 처리할 수 있는 고수들이 있는 곳을 찍었다.

이제는 낮은 목소리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황.

한빈은 설화에게 자세한 작전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끝낸 한빈은 한마디 덧붙였다.

“만약에 그들이 비명을 지르면 바로 몸을 피해야 한다.”

“알았어요, 공자님.”

고개를 끄덕이던 설화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

“아까, 경계조는 왜 안 죽이신 거예요? 공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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