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사면초가 (6)
청연의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났다.
저것은 허혈초로 제조한 혈독의 증상이 아니었다.
붉은색의 반점이 아니라 피부가 검게 변한다?
거기에 피부를 덮고 있는 수포까지?
청연이 관찰하던 누군가가 얼굴을 긁었다.
순간 주르륵 흘러내리는 진물.
독공에서 천독의 다음가는 청연이지만, 저 정도의 증상은 본 적이 없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던 청연의 시선이 어느덧 사부인 천독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 눈빛은 이곳에 독을 푼 것이 사부인 천독이 아니냐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그 뜻을 안 천독이 말했다.
“저건 내가 푼 독 때문이 아니다.”
“그럼 저건 무엇입니까?”
“저것은 진짜 전염병의 증상이다. 그것도 서장 쪽에서나 볼 수 있는 지독한 병이지.”
“그렇다면…….”
“저곳은 통제가 불가능한 곳이지. 아무리 완벽한 독인이라도 저곳에 발을 들였다가는 몇 개의 목숨 줄을 가지고 있어도 부족하다.”
“그럼 장운현에 진짜 역병이 퍼졌다는 이야깁니까?”
“아니, 저곳에만 의도적으로 퍼뜨린 것 같다.”
“역병을 퍼뜨리는 미친놈이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미친놈이길래. 그렇다면 장운현의 사람들은 그냥 놔둬도 다 죽어 나가는 게 아닙니까? 그럼 저희 계획에도…….”
“성급한 결론은 내지 말아라, 청연아. 자세히 보면 역병에 걸린 이들은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저걸 퍼뜨린 놈은 역병을 극복할 방법이 있는 것이지. 즉, 역병을 다스릴 줄 아는 놈이다.”
“역병을 다스린다고요?”
청연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그 모습에 천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저걸 퍼뜨린 자는 역병의 신이라고 해야 적당할 것이다. 아마 저런 고통을 주고 그걸 즐길 것이다. 저놈은 강호에서 악랄한 놈일 수도 있다.”
“음.”
“우린 저놈을 사로잡아야 한다. 저놈의 힘을 우리 것으로 만든다면…….”
천독은 뒷말을 흐리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중원의 하늘이 된다는 말을 삼킨 것이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것입니까?”
“흑수대에게 명령을 내려라. 내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저 객잔을 포위한다.”
“네, 명 받들겠습니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저곳에서 역병의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라고 전하라.”
“그자가 누군지 어떻게 아나요? 설마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아니겠죠?”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내 생각에는 하북팽가를 돕는 고인이 있는 것 같구나. 우리는 그자를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그럼 저곳에서 나오는 이들을 조심해서 다뤄야겠군요?”
“아니지, 저곳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여라.”
“생포하라고…….”
“역병을 다스릴 줄 아는 자가 네 손에 죽겠느냐?”
“그렇다면…….”
“다 죽이고 남은 놈이 우리가 생포할 놈이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짓밟겠습니다.”
“단, 독은 가능한 한 혈독만 쓰거라.”
“아, 혈독을 쓴다면 시체를 처리 안 해도 되겠군요. 손발이 썩어 문드러질 테니까요. 사부님의 말씀대로 허혈초에서 추출한 혈독만 쓰겠습니다.”
청연의 말에 천독은 미소 지었다.
한참 동안 미소 짓던 천독이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여라.”
“이제 조금만 있으면 놈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렸다는 것을 알겠군요.”
“사면초가라? 적당한 표현이구나, 청연아.”
“초나라의 노래 대신 저희 흑수대의 독으로 덮겠습니다, 사부님.”
말을 마친 청연은 객잔 쪽을 가리켰다.
사면초가란,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한나라가 초나라의 슬픈 노래를 불렀던 일화.
청연은 한나라가 사용한 초나라의 노래 대신 독으로 적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겠다 장담한 것이다.
“그럼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포권한 청연은 검은색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천독이 앉아 있는 전각을 중심으로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딱 보면 거지라고 보기에 적당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거리 구석구석에 거지가 한둘씩 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한빈과 홍칠개가 개방도를 물리지 않았다면 위장을 한 청연의 수하들과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썰렁한 거리에 다른 이가 나타났다면 유심히 보겠지만, 거지의 등장은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했다.
* * *
같은 시각, 한빈은 창가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아 밖의 전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가끔은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긴 듯 보이는 한빈.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진득한 미소를 피워 냈다.
적의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사냥감이 꼬리를 드러냈으니 덫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한빈은 적에 대한 대략적인 특징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허혈초를 쓰는 것으로 봐서 적은 독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독공의 익힌 자들의 특징은?
살수만큼이나 은밀하고 후각이 발달해 있다.
문제는 그 은밀함이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황실의 숙수만큼이나 냄새에 민감하고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이들은 독향으로 서로를 구분한다.
어떤 식으로 채취를 지우더라도 그들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다.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숨통을 끊어 놓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결정을 했으니 이제 실행에 옮겨야 했다.
막 창문을 닫으려던 한빈의 눈에 묘한 광경이 들어왔다.
그것은 객잔에 생긴 변화였다.
원래 안 보이던 벌들이 객잔에 날아든 것이다.
한빈은 고개를 내밀어 복도 반대편 방의 창문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꿀벌들이 웽웽 소리를 내며 맴돌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곳은 설화가 묵고 있는 방이었다.
이름에 꽃이 들어간다는 것을 벌들은 아는 것일까?
신기한 일이었다.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던 한빈은 바로 웃음을 지웠다.
적의 공격과는 전혀 관계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생각을 마친 한빈은 창문을 닫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울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설화가 한빈의 옆에 나타났다.
“공자님, 저 불렀어요?”
“오늘 밤 사냥 나갈 준비 좀 해라, 설화야.”
“사냥이요? 혹시 저도 같이요?”
“싫으면 말고.”
한빈의 말에 설화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같이 갈게요. 그런데 그 전에 체력 좀 보충하고 있을게요.”
“식사가 부실하면 심 부대주한테 말해 놓을 테니, 언제든 말해라. 아니면 직접 가서 부탁해도 되고.”
“그, 그게 식사가 아니라 당이 떨어져서요.”
설화는 민망한 듯 말을 살짝 더듬었다.
“아, 당과 말이구나. 그런데 마을이 저 모양이니 당과를 구할 곳이…….”
“공자님, 그건 제가 해결했어요.”
“흠, 문을 열지 않은 가게를 설화, 네가 어떻게 해결한다고?”
“그게 아니라 해결했다고요.”
“오호, 신기한 일이네. 어떻게 해결했을까?”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는 그 눈빛에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의 끝에 설화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설화의 설명을 듣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당과를 만들 재료를 사 왔다고 한다.
과일은 보관을 생각해서 말린 과육을 준비했고 나머지 재료도 넉넉히 준비했다고 했다.
설명을 들은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창문을 다시 열었다.
지금도 벌들이 설화의 창문 앞에서 웽웽거리고 있다.
한빈이 설화에게 물었다.
“내가 왜 냄새를 눈치채지 못했지?”
“냄새가 안 새어 나가게 꽁꽁 감춰 놨거든요.”
설화가 마치 자랑하듯 어깨를 활짝 펴며 답했다.
하지만, 한빈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빈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하나였다.
영물을 대신해 천리추종향을 일정 부분 맡을 수 있는 자신이었다.
그런 후각으로도 단 냄새를 눈치채지 못한다고?
한빈의 표정을 본 설화도 턱을 괴며 생각에 빠졌다.
그것도 잠시 설화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한빈이 물었다.
“설화야, 무슨 일이지?”
“공자님이 냄새를 못 맡은 이유를 알 것 같아서요.”
“오호, 일단 말해 봐. 일리가 있다면 상을 주지.”
“상이요? 당과는 당분간 됐는데…….”
“아니, 다른 특별한 상을 줄 테니 일단 말해 봐.”
“음, 그러니까……. 공자님은 단 냄새를 못 맡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진 거예요.”
“익숙해졌다고?”
“제가 당과를 워낙 좋아하잖아요.”
“그야 그렇지.”
한빈은 팔짱을 끼고 설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표정을 본 설화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과거시험에서 정답을 적어 낸 유생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니까요. 저와 제 방에서 달달한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못 느끼시는 게 아니라, 단 냄새가 나는 걸 당연하게 느끼시는 거죠. 마치 훈련받은 것처럼요.”
“아, 일리가 있어.”
말을 마친 한빈은 생각을 정리해 봤다.
이것은 무공을 익히는 과정과 같다.
한 초식을 익히기 위해서는 같은 동작을 최소 천 번은 반복해야 한다는 무림의 속담이 있지 않은가?
상대의 초식에 맞서기 위해서는 머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반사적으로 동작이 튀어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인의 몸은 모든 동작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진다.
후각 역시도 마찬가지라 한빈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한빈은 눈을 빛냈다.
독공을 쓰는 저들에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오늘 사냥은 수월해질 것 같았다.
한빈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 너는 천재다.”
“정말루요?”
설화가 기쁜 듯 눈을 빛내자 한빈이 탁자 옆에서 어른 팔뚝만 한 상자를 꺼냈다.
“이건 해답을 찾은 것에 대한 선물이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라.”
“지금 열어 봐도 돼요?”
“당연하지.”
한빈의 말에 설화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곳에는 단검 한 자루가 있었다.
그 단검은 검은색 검신에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혹시 이거 묵철로 만든 단검인가요?”
“아니, 이건 천산혈랑의 발톱으로 만든 단검이다. 강유찬 대인의 이야기로는 천산혈랑의 발톱이 만년한철보다 단단하다고 하더구나.”
“헉, 그럼 이 단검은 지난번에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단검이잖아요. 그걸 왜 제게…….”
“내겐 아직 한 자루가 있으니, 한 자루는 네가 써라.”
“그래도 공자님께 내리신 하사품인데……. 저는 받을 수 없어요.”
“내가 관리가 될 것도 아니고 대대로 무가인 하북팽가에서 이 단검은 그저 호신용 검일 뿐이다. 대신 본업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는 반납해라.”
한빈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설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뜻을 깨달은 것이다.
황제가 내린 검으로 살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빈과 단검을 번갈아 보던 설화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 그래도…….”
설화는 말끝을 흐리며 단검을 품 안에 넣었다가 다리에 있는 각반에 찼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이 단검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설화는 서당에서 훈장의 답변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나도 이름은 모른다. 크기는 작아도 다른 보검에 뒤지지 않은 테니, 설화 네가 직접 이름을 붙여 봐라.”
“아……. 그럼 그냥 혈랑검이라고 할래요.”
설화가 잠시 망설이다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