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사면초가 (5)
한빈과 관련된 수많은 생각을 이어 나가자, 다시 깨달음의 끝자락이 보일 듯 말 듯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재오는 조금 더 깊이 사색에 잠겼다.
일반적인 정파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백성을 해치려는 상대의 계획을 눈치챘다면, 그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뭐, 결과는 뻔했다.
백 명의 좀도둑을 모두 잡을 수는 없는 일.
적은 도망가고 다른 곳에서 또 일을 벌일 것이다.
어찌 보면 언 발에 오줌 누기와도 같은 행태.
약간의 희생이 생기더라도, 백 명의 좀도둑을 잡는다는 생각은 정파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서재오의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
개방이 창이고 흑사문이 방패라 했다.
서재오는 왜 흑사문을 방패라 칭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시 보일 것 같은 깨달음의 끝자락.
그때 홍칠개가 서재오의 어깨를 토닥였다.
“무슨 걱정을 그리 하나?”
“아, 무제자 어르신!”
서재오는 오늘만은 한빈보다 홍칠개가 미웠다.
그것도 잠시 서재오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패라…….”
“방패라니?”
홍칠개도 고개를 갸웃하자 서재오가 물었다.
“흑사문이 진짜 방패입니까?”
“아, 흑사문 말이군? 나도 그놈들이 왜 방패인지는 모르겠네.”
“어르신도 모르는 게 있군요.”
“험.”
헛기침한 홍칠개가 재빨리 앞장서자 서재오가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같이 가시죠, 어르신.”
서재오가 경공술을 펼치자 주변의 먼지가 일어났다.
그들의 의문이 풀린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 * *
며칠 후.
객잔 앞 울타리 밖에 모여 있는 흑사문 무리에게 묘한 증상이 일어났다.
얼굴이 시퍼렇다 못해 검게 변했으며, 겉으로 드러난 피부의 여기저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양이 얼마나 흉측한지 서로를 바라보면서 밥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설무익은 밥을 다 먹고 장대찬을 불렀다.
“내 밥그릇 좀 갖다 놔라.”
“이제 자기 일은 자기가 하슈. 왜 남을 부려먹습니까?”
“이놈이 진짜 죽으려고…….”
“죽여 보십시오. 지금 공자님 꼴이나 내 꼴이나 죽어 가는 건 똑같지 않습니까?”
장대찬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덤벼들었다.
설무익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물통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얼굴에 잔뜩 돋아난 수포.
검게 변한 피부.
모든 것이 보통 병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상태만 보면 역병에 걸렸다는 마을 사람보다 더 심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들 때문인지는 몰라도 객잔 앞에 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도 저 멀리 무인 몇몇이 와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 장운현의 상권을 나눠 가지고 있는 정파인들이었다.
그들이 찾아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북팽가에서 온 사람들과 그들이 관리하는 상인들만 멀쩡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역병을 완치하는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 약을 구하기 위해 왔지만, 골골대는 흑사문 무리를 보고는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멀리서 주춤대며 물러서는 무사들을 바라보던 설무익은 그제야 한빈이 자신들을 방패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독이라면 피하면 그만이지만, 이런 괴질을 대처할 방법은 없었다.
사천당문이라면 이런 괴질에 대비할 수 있을까?
백독곡에 있는 백독문이 역병을 막을 수 있을까?
강호인에게 역병은 독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 나가면…….”
설무익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목이 간지럽기 시작한 것이다.
쓰윽.
목을 긁자 설무익의 목덜미에 생겼던 수포가 터졌다.
톡,
동시에 진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주르륵.
그 모습을 멀리서 보던 정파의 무인들이 아연실색하며 줄행랑을 쳤다.
아마 화경의 고수라도 이곳을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멍하니 줄행랑을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설무익은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 뒤로 그의 수하들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대찬은 이 모든 것이 천벌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다.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하루아침에 빼앗고, 남의 일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적이 한두 번이던가.
그것이 사파가 할 일이라 생각하며 아무 생각 없이 설무익을 따랐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닌, 더러워서 피할 수밖에 없는 오물 같은 처지가 된 지금, 장대찬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살아 나가고 싶은 마음은 처음과 똑같았지만 말이다.
장대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완강하게 거부는 했지만, 넋을 잃은 설무익을 보니 잘못하면 자신까지 저녁을 거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장대찬은 남은 그릇을 가져가 울타리 앞에 있는 심미호에게 가져다주었다.
심미호가 상냥하게 물었다.
“잘 드셨어요?”
“잘 먹었습니다.”
돌아선 장대찬은 자시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이곳에서는 관음보살과 같은 여인이었다.
모두가 피하는데 저 여인만은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배식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만약 적혈맹호대 부대주인 심미호가 없었다면, 자신을 비롯한 흑사문 무리는 벌써 명이 끊어졌을 것이었다.
장대찬은 밥그릇을 건네고는 황급히 달려왔다.
갑자기 몸이 근지럽기 시작해서였다.
등을 긁고 확인해 보니 몸을 긁던 손톱에 살점이 묻어 나왔다.
“헉!”
비명을 지른 장대찬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순간 장대찬의 눈에 뭔가가 보였다.
꼭 눈에 풀잎이 낀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드는 녹생 장포였다.
그것도 잠시, 녹색 옷자락은 눈앞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뭐지? 설마 눈까지…….”
장대찬은 이것이 자신에 눈에 생긴 이상이라 생각했다.
그의 이상한 행동에 흑사문의 무리가 몰려들었다.
“왜 그래? 설마 눈까지 안 보이는 거야?”
흑사문의 무리는 장대찬을 재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대찬이 아프다고 하면 반드시 자신들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장대찬이 손을 내저었다.
“눈앞에 녹색 장포가 나타났다가 없어졌는데, 지금은 괜찮다.”
“휴…….”
동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장대찬이 바라보는 곳을 확인했다.
* * *
객잔의 위층에서는 한빈이 팔짱을 끼고 흑사문의 무리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보고 있었다.
“저자도 혹시 팔선……?”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의문을 띄웠다.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설화가 물었다.
“혹시 걱정되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공자님.”
“아니야. 지금까지는 계획대로네, 쩝.”
말을 마친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설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요? 저도 지난번에는 힘들었어요. 그 언니가 얼마나 무거운지…….”
설화는 한빈의 눈치를 보며 불평을 털어놨다.
백선을 마을 밖으로 옮겨야 했던 날, 설화는 뜨거운 국에 풀어진 떡처럼 몸이 흐물흐물해졌다.
뭐, 그날 한빈이 사야 했던 당과의 양은 어마어마했고 말이다.
한빈이 재빨리 설화의 말을 끊었다.
“걱정하지마. 이번에는 힘들게 안 할 테니까, 설화야.”
“이번에는 힘들면 당과 두 배예요, 공자님.”
“두 배 인정해 주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한빈의 얼굴에는 진득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는 복합적인 미소였다.
첫 번째 의미는 적이 움직임이 파악되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객잔으로 들어오는 서재오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돌아왔네.”
한빈의 말에 설화도 창밖을 바라봤다.
홍칠개와 함께 들어오는 서재오를 본 설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에이, 화산파 아저씨가 의리가 있네요. 그렇죠?”
“그렇지, 의리가…….”
한빈은 말끝을 흐렸다.
점점 객잔과 가까워지는 서재오를 본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화산파 아저씨 얼굴에 초췌해 보이네요. 그러고 보니 떠나신 지 며칠 만에 오시는 거잖아요.”
“원래 가출했다가 바로 집에 들어오긴 뭐하지. 가족이란 그런 거다, 설화야.”
“가족이라고요?”
설화는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길게 빼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서재오를 바라봤다.
“어디선가 구르고 온 모습인데요.”
“그럴 리가.”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한빈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설화의 눈이 정확했다.
홍칠개가 오면서 이 일 저 일을 시키며 굴렸을 것이 분명하다.
뭐, 굳이 죄목을 따지자면 탈주하려고 했던 죄?
한빈은 흡족한 표정으로 객잔 밖을 바라봤다.
* * *
다음 날 아침.
적혈맹호대가 묵는 객잔의 울타리에서 한참 떨어진 전각의 지붕.
백발노인 하나가 녹색 장포를 펄럭이며 객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흰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모습 중 남들이 보기에 묘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흰 수염을 쓰다듬는 그의 손이었다.
그의 손은 맨살임에도 암흑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검은색이었다.
그 손에 닿으면 모든 빛이 흡수되어 암흑으로 물든 것 같았다.
녹색 장포의 중년인 옆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일단 뜸은 다 들인 것 같아요, 사부.”
“완벽한가?”
“네, 하북팽가와 관련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완벽하다고 판단돼요, 사부님.”
“완벽하다라…….”
백발노인의 정체는 팔선 중 천독이라 불리는 독선이었다.
독선 천독은 못마땅한 듯 상대를 바라봤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깡마른 체구의 여인이 있었다.
어찌 보면 수수깡에 옷만 입혀 놓은 듯한 모습.
그녀는 검은색 무복에 녹색 허리띠를 차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청연.
어릴 적 독선에게 거둬져, 그의 오른팔의 위치까지 올라온 여인이었다.
스물여덟 정도의 외모를 가진 그녀의 진짜 나이는 열여덟.
포권한 그녀의 손은 푸른색.
그녀의 청색 손은 백 가지의 독에 대한 면역과, 그 백 가지 독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음을 뜻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독공을 택한 결과였다.
꺼림칙한 독선 천독의 눈빛을 눈치챈 청연이 말했다.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사부님”
조심스럽게 청연이 묻자, 천독은 표정을 굳혔다.
“어떤 변수를 제외하고 말할 수 있는 완벽한 일은 없다. 변수가 있다면 그 자체로 완벽한 일이 아닌 것이다, 청연아.”
“그럼 어떻게 해야 완벽해질까요? 사부님.”
“당연히 변수를 제거하고 수확을 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그렇다면 제가 거치적거리는 변수부터 치울게요, 사부님.”
말을 마친 청연은 객잔 쪽을 바라봤다.
동시의 그녀의 푸른 손이 더욱 짙어졌다.
이전의 손이 희미한 푸른색이었다면, 지금은 진한 청색으로 변했다.
청연은 독기를 운용함으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지은 천독이 나지막이 외쳤다.
“아서라! 계획이 먼저다. 저들은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은밀함으로 따지면 저희 흑수대를 따라갈 자들이 있겠어요? 당장에 저 객잔을 깨끗이 지울 테니 명만 내리시지요, 사부.”
“청연아, 저길 잘 봐라.”
천독이 객잔을 가리키자 청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자 보고 있습니다. 저기가 목표 아닙니까? 사부님.”
청연은 쉬지 않고 객잔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특별한 사항은 없었다.
계속 눈동자를 굴리는 청연의 모습에 천독이 말했다.
“그곳 말고, 저 아래를 보란 말이다.”
천독은 객잔이 아닌 울타리 쪽을 가리켰다.
“저 아래라면…….”
공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높이던 청연이 말끝을 흐렸다.
객잔의 앞 울타리 근처에서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