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사면초가 (4)
서재오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지금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묘하게 등골을 스치는 불길한 느낌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강유찬의 따가운 눈빛은 아직까지 느껴졌다.
힐끔 눈을 돌리자마자 강유찬과 시선이 마주쳤다.
강유찬의 눈빛을 보면 ‘자네도 당연히 여기 남아야지.’ 하며 독려하는 모습이다.
역병과 사숙, 둘 중 누가 무서울까?
저울의 추가 사숙 쪽으로 기우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앞으로 사람이 죽어 나갈 장운현에 머무는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서재오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있을 때, 강유찬이 가죽 주머니를 다시 들여다봤다.
“흠, 안에 쪽지가 들어 있군.”
“네? 쪽지요?”
서재오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묻자 강유찬이 쪽지를 펼치며 말했다.
“아무래도 팽가의 사 공자가 보낸 것 같군.”
“무슨 내용입니까?”
“…….”
서재오의 물음에도 강유찬은 아무 말 없이 쪽지를 읽어 나갔다.
서재오는 나름 안심하며 강유찬을 바라봤다.
강유찬의 표정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쪽지를 확인하던 강유찬의 시선이 갑자기 서재오에게 꽂혔다.
강유찬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서재오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숙.”
“자네의 우국충정 받아들이겠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팽 공자가 자네에 대해 여기에 적었다네.”
“저에 대해서 적었다니요?”
“자네는 나라를 위해 여기에 남고 싶어 했다지? 그것이 화산파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도 했다는데…….”
“아, 그러니까……. 그건.”
서재오가 말을 더듬자 강유찬이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그럼 혹시, 팽 공자가 한 말이 거짓인가?”
순간 서재오의 눈이 멍해졌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불안감이 현실이 되자, 말로만 듣던 주마등이 서재오의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화산파에 입문해서 매화검수가 될 때까지의 장면이 한 장 한 장 그림이 되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 하북팽가와의 악연까지…….
한빈을 떠올리자 스쳐 가던 주마등이 멈췄다.
그러고는 웃고 있는 한빈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언제는 편안히 가라더니만! 드러운 놈.’
이것은 완벽한 함정이었다.
자신을 이번 일에 갈아 넣으려는 한빈의 수작이 분명했다.
빠득!
이를 갈았지만, 화산파의 명예까지 나온 이상 서재오는 할 말이 없었다.
서재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숙. 제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맞습니다.”
강유찬의 꿈틀대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다.
“역시 그랬군. 팽 공자는 이곳이 위험하다고 자네에게 피하라 했다는데, 그것도 맞나?”
“네, 맞습니다.”
“그렇게 말리는데도 여기에 남아 있겠다니! 역시 우리 화산파의 매화검수답군. 팽 공자와 함께 있더니 그에게 충심을 배운 것인가?”
“뭐, 그게…….”
서재오는 말끝을 흐렸다.
충심은 무슨 충심이란 말인가?
뭐, 배운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옆에 있으면서 계약서 쓰는 수법은 배우긴 했다.
어물쩍거리는 서재오를 본 강유찬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문파의 어르신께 자네의 선행을 보고하겠네.”
“가, 감사합니다, 사숙.”
서재오는 반사적으로 포권을 했다.
하지만,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모습에 강유찬은 더욱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수고해 주게. 황실과 화산파는 자네를 기억하겠네.”
말을 마친 강유찬은 서재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순간 서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멀리 떠나보내는 듯한 인사였다.
한번 건너면 돌아오지 못하는 삼도천(三途川)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서재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아, 팽한빈!’
서재오는 속으로 이 모든 원흉의 이름을 외쳤다.
그냥 당한 것이 아니고, 승부에서 진 듯한 느낌은 왜 드는 걸까?
이런 게 강호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것일까?
서재오는 자신을 향해 수많은 질문을 쏟아 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서재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 수많은 질문이 눈앞에 맴돌았다.
그러던 중 빛이 한 줄기 내려왔다.
서재오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끝자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경지를 넘어설 단서인지.
아니면 도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득도의 단서인지는 몰라도.
저 빛줄기를 잡으면 해답이 보일 것 같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휙!
이번에는 묘하게 진짜 한기가 들었다.
서재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순간 눈앞에서 일렁이는 빛줄기는 사라졌다.
이어서 서재오의 귓가에 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의 시야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나타났다.
서재오는 자신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림자의 주인이 웃고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에 반가움도 잠시.
서재오는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무제자 어르신! 하필이면 지금 오셨습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홍칠개였다.
“마치 깨달음이라도 놓친 표정이군.”
“하,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제자와 있더니 농담 하나는 늘었네.”
“농담이 아닌데…….”
“그런데, 자네가 여기는 웬일인가?”
“저는…….”
서재오가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강유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백성들을 위해 장운현에 남기로 했답니다.”
“허허, 역시 화산파의 매화검수군. 문파의 최고는 화산이요, 방파의 최고는 개방이라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군.”
“하하, 어르신 말씀 감사합니다.”
강유찬은 표정을 수습 못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정파 최고의 세력을 꼽으라면 누구나 일문(一門), 일사(一寺), 일방(一傍)이라는 말이 있다.
일사는 소림사를 말함이요, 일방은 개방이었다.
하지만, 문파 중 제일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의 화산은 무당과 종남에도 살짝 밀리는 형편.
그런데 개방의 원로, 그중에서도 가장 깐깐하다는 홍칠개가 화산파가 일문이라 하니, 강유찬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 홍칠개가 말했다.
“움직이기 시작했네,”
그 말에 강유찬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입니까?”
“지도부터 보세.”
그들은 밖에 서재오를 남겨 둔 채 막사로 들어갔다.
강유찬은 군사용 지도가 놓인 탁자로 홍칠개를 안내했다.
지도를 본 홍칠개는 거침없이 군사용 지도에 점을 찍었다.
“지금, 이곳과 이곳, 그리고 이곳으로 낯선 자들이 향하고 있다네.”
“감사합니다, 무제자 어르신. 위험한 곳에 남아서 이렇게 도와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강유찬은 홍칠개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뭐, 이게 무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겠나. 백성이 힘들면 거지는 누구한테 빌어먹겠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르신을 보니 개방이 무림 일방으로 추앙받는 건 너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이 끝나면 우리 방도들에게 따뜻한 국밥이라도 내어 주게.”
“국밥이 대수입니까? 제가 직접 나선 건 황제 폐하의 특별 지시입니다. 하북성의 개방 방도가 굶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아니 되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거지는 호의호식하면 거지던가? 굶을 때도 있어야 진정한 거지 아닌가? 하하.”
홍칠개는 득도한 도인처럼 웃었다.
그 모습에 강유찬은 자시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에는 홍칠개가 득도한 도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매화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던 화산파의 시조와 홍칠개의 모습이 살짝 겹쳐 보였다.
* * *
서재오는 막사 앞에서 강유찬과 홍칠개를 기다리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내 깨달음……!”
하지만 그의 외침은 하늘로 흩어질 뿐, 누구 하나 대답해 주지 않았다.
서재오의 머릿속에는 아쉬움과 깨달음을 향한 열망뿐이었다.
그에게 깨달음의 끝자락은 달콤한 주향과도 같았다.
술맛을 아예 모른다면 포기하겠지만, 달콤한 술 향기를 한번 맡게 되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현상과 비슷했다.
그때 서재오의 머릿속에 깨달음의 끝자락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해답을 찾던 서재오의 머릿속에 하나의 얼굴이 떠올렸다.
물론 그것은 한빈이었다.
생각해 보니 천수장에 처음 왔을 때도 어렴풋하게 깨달음의 끝자락을 느낀 적이 있었다.
“진짜 돌아가야 하나…….”
그때 홍칠개가 막 막사에서 나왔다.
막사에서 나온 홍칠개는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서재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객잔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같이 가겠나?”
“아, 저는…….”
“그리 어려워 하지 말고, 앞으로 몇 개월은 동고동락할 사인데, 뭘 그리 어려워하나? 자네.”
홍칠개가 씩 웃으며 서재오를 잡아끌었다.
서재오는 힘없이 홍칠개에게 끌려가다가 다급하게 움직이는 병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입니까?”
“개방은 적에 대한 감시를 맡았네.”
“지난번에 들어 보니 개방이 창이라 하던데…….”
“창은 맞지. 우린 찔러 주고, 관군은 베고.”
“아, 그런 의미의 창이었습니까?”
서재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병기의 사용 방법.
목숨을 거두는 것이 아닌, 위치가 있는 곳을 관군에게 찔러 준다?
말장난 같지만, 어찌 보면 창의 임무일 수도 있었다.
서재오의 표정을 본 홍칠개가 설명을 덧붙였다.
“굳이 정체도 모르는 세력들인데, 우리가 나설 필요가 있겠나?”
“…….”
서재오는 조용히 홍칠개를 바라봤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홍칠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백성을 괴롭히는 무리는 나라에서 나서는 게 맞지. 지금부터는 누구라도 여길 벗어나는 순간 관아의 적이 될 것이야.”
“누구라도요?”
“당연하지, 아군 중에는 도망치는 자가 없을 테니, 벗어나는 자가 속한 집단은 불순한 무리 들이 분명하지. 이만 명의 관군이면 누구라도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테니까. 물론 우리 제자의 계획이지만 말이네.”
“아, 팽 공자의 계획이었군요.”
서재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적을 무림과 연관시키지 않고 자신의 가문과도 연관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어린 나이에 생각할 수 없는 치밀함이었다.
그런데 이런 치밀함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의문을 이어 나가던 서재오의 고개가 점점 기울어졌다.
“그런데 솔직히 궁금한 게 있습니다.”
“편하게 물어보게.”
홍칠개가 웃으며 답하자 서재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오는 걸 막아야지, 빠져나가는 걸 막다니! 그런 책략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백성들을 위한다면서요?”
“장운현에 몰아넣고 잡는다던데.”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우리 제자지.”
“아! 그것도 팽 공자의 계획이군요.”
서재오가 탄성을 흘리자 홍칠개는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홍칠개의 미소와 한빈의 미소가 겹쳐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서재오는 자신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그가 보기에 한빈의 계획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바로 차도지계(借刀之計)였다.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처리하는 것.
자신의 적이 아닌 국가의 적으로 만든다라?
강호인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흔히 관무불가침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힘에 복종할 때의 이야기였다.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나라의 명을 거스른다면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법.
문파 하나가 나라에 맞선다라?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적을 지우는 가장 편한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서재오는 진심으로 한빈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