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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82화 (182/621)
  • 182화. 사면초가 (2)

    바꾸기로 결심은 했지만, 좀처럼 어울리는 초식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지난번에 가르쳐 주신 게 파혼검이니 이번에는 파혼장인가요, 공자님?”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설화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설화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더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질책을 당할 것을 예상하고 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빈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오호, 그거 좋은 이름인데!”

    앞으로 무림을 뒤흔들 무영수가 파혼장으로 이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한빈이 막 말을 마쳤을 때였다.

    허공에 뜬 비급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한빈이 눈을 빛내자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진룡무영수의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은 진룡파혼장입니다.]

    한빈은 헛웃음을 지었다.

    한빈이 초식명을 결정하자마자 비급에도 반영된다니!

    왠지 비급의 활용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 * *

    이틀 후 객잔.

    한빈은 오후가 되자 천리 표국에서 온 마차 스무 대를 맞이했다.

    윤 표두와 짐꾼들은 능숙한 솜씨로 짐을 울타리 안에 쌓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타리 안쪽에는 수백 개의 나무통이 일정한 간격으로 쌓였다.

    나무통은 밀봉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나무의 틈에 돼지기름을 뿌리고, 그 위에 기름종이를 덧대 놓았다.

    설화가 나무통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마치 저 안에 꿀이라도 들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한빈은 그런 설화를 잡아끌었다.

    “설화야.”

    “네, 공자님.”

    “눈독 들이지 말아라. 나중에 후회한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건 비밀이다.”

    한빈이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 돌아서자, 설화는 멍하니 나무통을 바라봤다.

    설화가 이렇게 나무통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묘하게 기름 냄새에 섞여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때 설화를 향해 정체불명의 물체가 파공성을 내며 날아왔다.

    슝!

    그 소리에 설화가 재빨리 돌아서 물체를 낚아챘다.

    팍.

    설화는 손에 든 물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낭이었다.

    슬쩍 흔들어 보니 제법 묵직했다.

    설화는 조용히 한빈의 방을 올려다봤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손짓하고 있었다.

    한빈이 주는 용돈이었다.

    설화는 전낭을 들고 울타리 쪽으로 걸어갔다.

    울타리 안에서는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이 쉬고 있다.

    휴식을 취하라는 한빈의 지시 때문이었다.

    뭐,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이도 있었다.

    그것은 의원인 장자명.

    장자명과 그 옆의 검오는 구슬땀을 흘리며 약을 달이고 있었다.

    저 약을 어디에 쓰는지 아는 이는 이 객잔 안에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빈과 장자명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한 객잔의 앞마당.

    설화는 이런 평화로운 광경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몰랐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는 설화를 본 조호가 달려왔다.

    “설화야.”

    “네, 조호 오라버니.”

    “혹시 당과 사러 나가는 것이냐?”

    “네, 맞아요.”

    “그럼 이거 보태서 더 사 먹거라.”

    말을 마친 조호는 설화에게 철전 한 닢은 던졌다.

    휙!

    설화는 날아오는 철전을 아무렇지 않게 잡아 전낭 속에 넣었다.

    “설화야!”

    이번에 부른 것은 장삼이었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장삼 아저씨?”

    “이것도 보태서 사 먹어라.”

    장삼이 설화에게 철전을 던졌다.

    내공이 실린 철전은 파공성을 내며 설화를 향해 날아갔다.

    슝!

    무섭게 날아오는 기세와는 다르게, 설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철전을 낚아챘다.

    전낭 속에 장삼이 준 철전을 넣은 설화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장삼 오라버니.”

    “흐흐, 오라버니라……. 설화 때문에 한 십 년은 젊어진 것 같구나. 고맙다, 설화야.”

    기분 좋게 웃는 장삼의 옆구리를 조호가 찔렀다.

    푹.

    장삼이 인상을 찌푸리며 조호를 바라봤다.

    “왜 그러냐? 조호.”

    “아저씨, 양심 좀 있어 봐요. 십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은 젊어져야 설화한테 오라버니 소리를 들어도 어색하지 않죠.”

    “하하, 그런가?”

    장삼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자 조호도 마주 웃었다.

    그때부터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설화에게 철전을 주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받은 거지? 저 속도와 저 방향이라면 나도 받기 힘들 텐데······.”

    “맞아, 혹시 천수장에 들어오기 전에 경극단에서 곡예를 하다 온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건 그렇고, 저 정도면 무공을 가르쳐도 금방 성취를 보이겠는데.”

    “그럼 자네가 제자로 삼지 그래?”

    “일단 아저씨란 호칭에서부터 벗어나고 보자고.”

    말을 마친 대원은 오른손으로 철전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얼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것은 철전을 낚아채는 설화의 모습이 신기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설화가 대원들을 부르는 호칭도 한몫 거들었다.

    설화가 적혈맹호대 대원들을 부르는 호칭은 딱 두 가지였다.

    오라버니와 아저씨.

    그 구분은 간단했다.

    용돈을 주면 오라버니요, 용돈을 안 주면 아저씨였다.

    그런 이유로 나이가 가장 많은 장삼도 설화에게 용돈을 주면 오라버니 대우를 받는 것이었다.

    장삼이 설화에게 용돈을 주는 순간, 나머지 대원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설화에게 아저씨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철전을 바쳐야 했다.

    전낭에 철전을 두둑이 채운 설화는 기분 좋게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타다닥.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눈매를 좁혔다.

    먼지를 일으킨 주인공은 두 명이었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설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심미호와 서재오.

    둘 다 한빈의 부탁으로 장운현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물론 둘이 맡은 임무는 다르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동시에 이렇게 달려온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했다.

    설화는 그들을 기다렸다.

    먼지를 내며 달려오던 심미호와 서재오가 설화의 앞에 멈췄다.

    탁.

    먼지 입을 연 것은 서재오였다.

    “설화야, 일단 안으로 들어가라.”

    “저 당과 사러…….”

    “이제 울타리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에요, 화산파 아저씨?”

    “일단 들어가자. 자세한 이야기는 사 공자와 함께 나눠야겠구나.”

    “아.”

    설화가 낮은 탄성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고개는 여전히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가 좋아하는 당과를 파는 가게가 있는 방향이었다.

    잠시 후.

    한빈과 적혈맹호대 대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객잔의 일 층에 모였다.

    한빈의 지시로 모두가 한곳에 모이자, 심미호가 앞으로 나섰다.

    심미호의 앞에는 커다란 지도가 놓여 있었다.

    자세하지는 않지만, 장운현의 대략적인 약도였다.

    심미호는 지도의 한 곳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곳에서부터 역병이 번지고 있습니다.”

    “그곳이면…….”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기억을 더듬자, 심미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장운현에서 식수로 쓰고 있는 냇물이 있는 곳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성내천이라고 하죠.”

    “역병이 번지는 속도는?”

    “성내천을 따라 눈 깜짝할 사이에 번지고 있습니다. 현재 관군이 마을 입구를 막고 있는 상태고요.”

    심미호의 설명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중에 조호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러다가 장가도 못 가고…….”

    “이놈아, 왜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장삼 아저씨, 역병이라잖아요. 역병에는 무공도 무용지물인데, 어떻게 해요. 관군이 마을 입구를 막고 있으면 이제 옴짝달싹 못 한다는 건데…….”

    “주군이 알아서 준비하셨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장삼은 조용히 한빈을 바라봤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꽂혔다.

    따갑다기보다는 뜨거운 시선.

    한빈은 그들의 눈빛을 웃음으로 받았다.

    “걱정 안 해도 된다.”

    한빈이 웃으며 손을 내젓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휴…….”

    “다행이야.”

    그 모습에 심미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군, 어떤 대책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그게 방법이라고요?”

    “미리 식량 다 받아 놨잖아.”

    “그럼 이 사태를 미리 다 아시고…….”

    “내가 그걸 알 리는 없지.”

    “식량은 식량이라고 치고, 식수는 어떻게 합니까?”

    “식수는 걱정 안 해도 돼. 객잔 아래로 지하수가 흐르잖아. 그리고 오늘을 위해서 장 의원님이 해약을 만들어 놨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이번에는 시선이 장자명에게 모였다.

    “해약이요?”

    “역병에 해약이 무슨 소용이지?”

    장자명을 바라보고 있는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커졌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장자명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렸지만, 대원들은 어느새 장자명의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다.

    장자명은 할 수 없이 멋쩍게 웃었다.

    한빈이 만들라고 해서 만들긴 했는데, 어디에 쓰일지도 모르는 해약이었다.

    멋쩍게 웃는 장자명을 대신해서 한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지금 역병에 걸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독된 것이다. 성내천을 중심으로 역병이 번진다는 얘기는…….”

    한빈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모두는 눈에 힘을 주며 한빈의 설명을 들었다.

    한빈의 설명은 간단했다.

    정체불명의 집단이 식수와 곡식에 독을 풀었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듣던 조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주군인 한빈은 이 모든 사태를 알고도 장운현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적이 무력 집단이라면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나타난 진짜 적은 역병이라는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역병이 발생하면, 황실은 피도 눈물도 없이 냉정하게 상황을 수습하기 마련이었다.

    과연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온 것일까?

    조호는 한빈의 선택이 괜히 원망스러웠다.

    그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고 한빈을 바라봤다.

    조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고 말했다.

    “질문 있습니다, 주군.”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중독이 되면 어떻게 합니까?”

    “좋은 질문이다, 조호.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설화가 보따리를 들고 왔다.

    설화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에는 묘하게 생긴 환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게 무엇입니까? 주군.”

    “특제 해독약이다.”

    말을 마친 한빈은 품 안에서 장신구 하나를 꺼냈다.

    그 장신구는 객잔에 들어서며 적혈맹호대 대원들에게 나눠 준 것이었다.

    한빈은 장신구를 모두에게 보여 주고는, 좁쌀만큼 튀어나온 부분을 열었다.

    순간 장신구의 앞부분이 열렸다.

    찰칵.

    장신구가 열리자 한빈은 설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설화는 바로 한빈에게 환약을 건넸다.

    “여기요, 공자님.”

    “고맙다, 설화야.”

    말을 마친 한빈은 환약을 장신구의 빈 곳에 넣었다.

    그리고 장신구의 뚜껑을 다시 닫았다.

    찰컥.

    소리를 내며 뚜껑이 닫힌 장신구는 흔한 목걸이와 다른 점이 없었다.

    한빈은 그 장신구를 힘껏 자신의 팔뚝에 내려쳤다.

    픽!

    순간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앗, 주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모두의 아우성을 뒤로한 채 한빈이 말을 이었다.

    “모두 잘 봐라.”

    한빈은 목걸이를 팔뚝에서 떼어 냈다.

    동시에 한빈의 팔뚝에서 얇은 바늘이 나왔다.

    바늘이 나온 곳에서는 미세하게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모두는 겁에 질려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풀어 놓았다.

    목걸이에서 바늘이 나오다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목걸이가 아닌, 암기 혹은 자살 도구로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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