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탈선(脫仙) (3)
슝!
바람을 가르며 위에서부터 내리꽂히는 한빈의 월아.
그 순간 아미백선이 고개를 들었다.
번쩍이는 월아를 본 아미백선은 당황하지 않았다.
도리어 흐뭇한 표정으로 허리에 묶어 놓았던 구절편을 뽑았다.
구절편은 아홉 막대를 이어서 만든 채찍.
아미백선의 구절편이 은빛을 띠는 것은 만년한철이 내뿜는 한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미백선 정소군의 무기를 만년구절편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미백선은 둥그렇게 말아 놓은 채찍을 펴지도 않았다.
그 구절편을 잡은 오른손을 그대로 내질렀다.
챙!
월아와 아미백선의 구절편이 서로 인사를 하듯 경쾌한 소리를 냈다.
아미백선의 정수리를 향해서 날아오던 한빈의 몸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꺾여 날아갔다.
힘없이 날아가는 듯 보였던 한빈이 몸을 틀었다.
그는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 나무의 몸통을 밟아 속도를 줄였다.
속도를 줄인 한빈이 공중에서 사뿐히 내려앉았다.
한빈과 아미백선 사이의 간격은 고작 다섯 걸음.
서로가 공격할 수 있는 간격에 들어선 것이다.
둘은 잠시 상대를 확인했다.
여유 있게 한빈을 훑어보던 아미백선의 미간에 골짜기가 패였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강북 무림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를 마친 상황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라?
임무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변수였다.
지금 그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변수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그것은 아미백선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한빈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마친 상황이었다.
문제는 지금 한빈의 상태였다.
한빈은 얼굴에 진흙을 발라 상대가 못 알아보게끔 했다.
거기에 더해 항상 붉은색 무복을 입고 다니던 한빈이었기에, 지금의 야행복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잔뜩 찌푸린 아미백선에 비해 한빈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이것은 실력 차이를 좁히기 위한 한빈의 방법이었다.
아미백선의 경지는 한빈의 위.
일단 상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한빈이 활짝 웃었다.
“잘 지냈어?”
“우리가 구면이던가?”
“구면이 아니면? 내가 아줌마를 어떻게 알아봐?”
“아줌마라고?”
“미안, 내가 헛소리를 했네. 노파보고 아줌마라니…….”
한빈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아미백선이 발끈한 표정으로 외쳤다.
“사악한 혀를 가진 놈이구나!”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려는 당신이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안 그래?”
“…….”
아미백선이 흥미롭다는 듯 말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참을 보던 아미백선이 말했다.
“흙 속에 진주가 묻혀 있어. 내가 왜 못 알아봤지?”
“뭘 못 알아봐?”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진흙만 걷어 내면 먹을 만한 놈이네.”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아무래도 격장지계의 수법이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바로 감정을 수습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녀는 강호에서 닳고 닳은 노고수였다.
한빈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맞받아쳤다.
“고마워, 할매.”
유독 나이에 관련된 단어에 발끈했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한빈의 예상대로 효과가 있었다.
아미백선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만년구절편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팔 하나 정도는 썰고 시작해야겠어.”
“거참 궁금하네. 그다음은 어디를 노릴 건데?”
“그다음은 네놈의 혀다!”
말을 마친 아미백선이 한빈에게 달려들었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여유 있게 상대를 기다렸다.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한빈은 숫자를 셌다.
아미백선이 구절편을 풀자 한빈이 제자리에서 진각을 밟았다.
순간 한빈의 몸이 아래로 꺼졌다.
푹.
이것은 미리 파 놓은 구덩이.
상대를 위한 함정이 아니라, 한빈이 몸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구덩이었다.
한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난데없이 한빈이 사라지자, 아미백선이 휘두른 구절편은 허공을 스쳤다.
팡.
아미백선이 한빈이 만들어 놓은 구덩이 위를 지나가자 한빈이 다시 튀어나왔다.
아미백선을 향해서 달려드는 한빈.
한빈의 월아가 아미백선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푹!
하지만, 깊이가 얕았다.
살갗에 상처만 냈을 뿐, 관통하지는 못하고 월아가 튕겨 나왔다.
타다닥.
한빈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나지막이 외쳤다.
“호신강기!”
아미백선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매운데? 그렇지 않아도 간지럽던 곳인데 고마워.”
아미백선이 옆구리를 톡톡 치며 웃었다.
그녀의 하얀 무복에 붉은 점이 점점 커졌다.
물론 한빈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옆구리에 월아가 닿자마자, 아미백선은 만년구절편을 회수하며 한빈의 오른팔에 큰 자상을 남겼다.
어찌 보면 한 번씩 주고받은 상황.
이상한 것은 상처를 입은 아미백선의 표정이었다.
한빈보다 고수인 아미백선은 지금처럼 한 수씩 주고받았다면 분노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진짜 기뻐하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한빈도 입꼬리를 덩달아 올리고 있었다.
한빈은 슬쩍 자신의 팔에 난 상처를 확인하고는 허공을 바라봤다.
한빈이 이번 공격으로 얻은 것은 바로.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화(花)를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금(金), 금(錦), 화(花)]
새로운 구결을 얻은 한빈은 활짝 웃었다.
아미백선과 대결에서 취해야 할 것은 그녀의 목숨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구결.
한참을 웃던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활짝 웃으며 한빈의 공격을 기다리는 아미백선의 모습이 다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한빈이 아미백선을 보며 한 가지 가정을 세웠다.
아미백선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취향.
고민도 잠시, 한빈은 그녀를 향해 월아를 겨눴다.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
그리고 쾌검난마를 조합한 검법.
세 가지 초식이 섞여 있지만, 한빈의 검로는 담백했다.
그것은 순수한 직선.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월아를 본 아미백선이 구절편을 정면으로 돌렸다.
마치 회오리가 치듯 돌아가며 호랑이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붉은 강기가 만들어 낸 호랑이.
강기가 만들어 낸 회오리 안은 영락없이 호랑이의 입속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월아를 세워 땅에 박아 공격을 멈췄다.
강기의 소용돌이의 안쪽에서 느껴지는 강한 마기 때문이었다.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뭐, 첫 번째 공격도 호랑이의 입에 손을 넣었다 뺀 기분이었지만, 호랑이가 입을 다물려 할 때는 빼는 것이 당연했다.
한빈이 월아를 발판 삼아 뒤로 튕기자 아미백선이 말했다.
“제법 눈썰미도 좋은데.”
“칭찬은 감사히 받지. 그러지 말고 일단 이리 들어오지, 할매!”
한빈은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가리키며 상대를 도발했다.
한빈의 외침에 아미백선이 눈을 흘기며 달려들었다.
“이놈, 아무래도 네 혀부터 잘라 놔야겠구나.”
아미백선이 달려들자, 한빈은 돌덩이 하나를 주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백발백중.’
돌덩이는 한빈이 고정해 놓은 나무토막에 명중했다.
나무토막이 빠지자 옆쪽에서 밧줄이 풀리며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내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연쇄 반응이었다.
슈웅!
위쪽에서 떨어지는 통나무를 향해 아미백선이 구절편으로 원을 그렸다.
바사-삭.
커다란 통나무가 나뭇잎이 바스러지듯, 가루가 되어 주변으로 흩날렸다.
통나무가 톱밥처럼 먼지로 변하자, 아미백선은 다시 한빈이 있는 쪽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빈은 그녀의 앞에 와 있었다.
‘성동격서.’
공력의 소모는 있지만, 이 시기에 가장 적절한 초식이었다.
전광석화와 함께 어우러진 성동격서가 뱀처럼 휘어서 어깨를 찍었다.
둘 사이의 간격은 불과 한 걸음.
장거리에 특화된 무기인 구절편이 가장 애를 먹는 간격이었다.
하지만, 아미백선은 구절편을 회수한 후 다시 말아 쥐었다.
그녀는 공격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한빈을 향해서 구절편을 날렸다.
퍽!
푹!
한빈의 월아와 아미백선의 만년구절편이 상대의 몸에 적중했다.
동시에 서로가 뒤로 물러났다.
파파박.
한빈은 자신의 어깨에 흐르는 피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봤다.
한빈의 표정을 본 아미백선이 웃었다.
“마음에 드네.”
“별말씀을.”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아무래도 아미백선의 의도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미백선은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즐기면서, 자신이 상처를 입는 것 또한 즐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빈은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요혈만 아니면 상처를 입는 것을 은근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한빈에게 중요한 것은 다시 구결 하나를 얻었다는 점이었다.
[인급(人級) - 금(金), 금(錦), 화(花), 첨(添)]
하나가 다시 늘어났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아미백선의 몸을 살폈다.
이제 남아 있는 구결은 하나였다.
그때 한빈을 본 아미백선이 말했다.
“네놈도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졌구나. 가능하면 마무리는 불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 줄 테니 어서 오너라.”
“휴……. 누님, 이제는 살살 하자고.”
한빈이 씩 웃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동시에 한빈의 월아와 아미백선의 만년구절편이 다시 부딪히며 불꽃을 냈다.
챙! 챙!
쉴 새 없이 부딪히는 둘의 병장기 소리에, 산짐승들이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은 새들은 둘의 기세에 눌려 바닥에 떨어졌다.
툭. 툭.
두 사람이 내는 병장기 소리는 타악기 소리, 새들이 떨어지는 소리는 그 간주 같은 느낌이었다.
한빈은 흑색 무복은 군데군데 찢어져 살갗의 핏물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아미백선의 하얀 무복은 일정하게 붉은색 점이 찍힌 덕분에 색동저고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계속 공방을 이어 나가던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한빈의 추측대로 아미백선은 고의로 자신의 몸을 내주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아미백선이 마지막 남은 구결을 내어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지막 남은 구결은 묘하게 단전의 세 치 위에 있었다.
정확히 복부의 가운데 부분.
요혈로 향하는 공격만은 철저히 막고 있는 아미백선이었다.
아미백선에게 한빈의 공격은 그저 유흥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그때 아미백선이 번개처럼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이제부터는 내 차례니 기대해도 좋다, 아이야!”
아미백선이 화사하게 웃으며 경고했다.
한빈도 맞받아쳤다.
“기대하지.”
한빈은 씩 웃으며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피에 절어 있는 무복에 비해, 아미백선의 눈빛은 너무 멀쩡했다.
그런데, 이제부터라니?
본격적인 실력을 보인다면 한빈이 구결을 획득할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남은 구결을 획득하고 나면 한빈은 두 가지 계획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중 하나는 삼십육계였다.
만약에 상대도 안 된다 생각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작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한빈은 천천히 아미백선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초식을 대체했다.
‘반박귀진.’
‘전광석화.’
아무런 적의가 없다는 듯 월아까지 검집에 넣었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아미백선을 향해 웃었다.
터벅터벅.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오는 한빈을 본 아미백선이 구절편을 바닥에 풀었다.
그러고는 한빈을 향해 위협하듯 휘둘렀다.
쫘-악.
동시에 나뭇잎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냈다.
나뭇잎과 섞여 튀어 오른 돌멩이 하나가 한빈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호랑이의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과 같은 상황.
피식 웃음을 지은 아미백선이 말했다.
“벌써 포기한 건가?”
그때 한빈은 아미백선의 코앞에서 멈췄다.
어떤 적의도 보이지 않으며 다가온 한빈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 사부인 의령사태가 안부 전해 달라던데, 정소군.”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아미백선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자신의 이름과 사부가 한빈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당황한 것이다.
한빈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무영수.’
반박귀진에 무영수를 섞자 묘한 초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