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탈선(脫仙) (2)
한빈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공손수의 뒤를 밟았다.
목적지는 정체불명의 고수가 있는 곳이 분명했다.
한빈은 피리 소리를 듣는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추가해야 했다.
그것은 미혼술에 공손수가 당했다는 가정이었다.
미혼술이란, 사람의 혼을 끌어당겨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는 사특한 무공 중 하나였다.
문제는 공손수의 평소 행동이었다.
미혼술에 당한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미혼술에 당한 사람은 평소 행동이 부자연스럽기 마련이었다.
한빈이 그동안 공손수를 관찰한 결과, 미혼술에 당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진짜 미혼술에 당한 거라면, 한빈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혼술을 구사하는 상대. 그 상대가 말도 안 되는 고수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혼술이 아닌 미혼대법이라 칭해야 맞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적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
그 상황만큼은 피해야 했다.
한빈의 발걸음이 더욱 은밀해졌다.
사사삭.
얼마나 갔을까.
공손세가에서 꽤 멀리 떨어진 마을 외곽.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한빈도 재빨리 숲속으로 들어섰다.
숲으로 들어선 한빈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지나가는 토끼를 하나 잡는 것이었다.
‘백발백중.’
장자명에게 빌린 조그만 침을 토끼에게 날렸다.
픽.
토끼가 소리도 못 내고 쓰러졌다.
죽인 것은 아니고 움직이지 못하고 토끼를 마비시킨 것이다.
한빈은 토끼를 품속에서 꺼낸 자루에 담았다.
그러고는 주변에서 소나무를 찾아 몸의 곳곳에 송진을 발랐다.
한빈은 이번 미행만큼은 신중하게 진행하기로 했다.
미혼술을 구사하는 자뿐 아니라 하나가 더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둘이나 마주한다라?
그것은 한빈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한빈은 적의 존재를 자세히 알아야 하지만, 적은 자신의 진정한 힘을 몰라야 했다.
그것이 이번 승부에서 한빈이 깔아 놓아야 할 판이었다.
판 자체를 잘 짜 놓는 것은 승리의 필수 요건이었다.
오늘의 목적은 정면 승부가 아닌 정보 수집.
한빈의 이런 세세한 행동은 만약을 대비한 것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한빈은 공손수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쫓았다.
* * *
잠시 후.
한빈은 공손수가 백색 무복의 여인과 만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색 무복의 여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한빈의 위.
정확히는 잔혈마도나 황보세가에서 만났던 괴인보다 경지가 높았다.
물론 여인은 기세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한빈은 철저히 기세를 숨기고 있는 백색 무복의 여인의 경지를 어떻게 추측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강호의 풍파를 겪어 오면서 체득한 감각이었다.
저 여인은 화경의 경지 중에서도 이 경 이상이었다.
화경을 세부적으로 나누는 단위는 경이었다.
화경의 세부 경지인 일 경과 이 경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흔히 일 경의 고수 셋을 감당할 수 있으면 이 경이라 부르고, 이 경의 고수 셋을 감당할 수 있으면 삼 경이라 부른다.
판단컨대, 쾌검난마를 쓴 한빈과 홍칠개까지 달라붙어야 백색 무복의 여인을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빈은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며 백색 무복의 여인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 여인의 입술은 유난히 붉었다.
거기에, 입에는 묘한 모양의 피리를 물고 있었다.
공손수가 오자, 그녀는 엄지 정도 크기인 참빗 모양의 짧은 피리를 입술에서 뗐다.
한빈은 여인의 입술이 유난히 붉게 보였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짧은 피리에서 살짝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빈은 피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여인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피리는 분명 혈향미혼소(血香迷魂梳)였다.
피리를 나타내는 소(簫)가 아닌 빗을 뜻하는 소(梳)를 쓰는 이유는, 피리가 조그만 빗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혈향미혼소는 강호인들 사이에서는 보물이라 불리는 도구 중 하나로, 시전자의 피를 넣어 상대의 혼을 마음대로 부린다고 한다.
즉, 혈향미혼소의 매개체는 소리이면서 혈향이라는 말이었다.
미혼술에 당한 상대는 소리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닌 상대의 피에 종속된다 들었다.
한빈은 공손수가 당한 미혼술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화경의 고수가 혈향미혼소를 펼쳤다면?
그것은 단순한 미혼술이 아닌,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었다.
공손수 자신이 미혼대법에 걸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문제.
그다음 문제는, 공손수가 언제부터 미혼대법에 걸려들었냐는 것이었다.
한빈은 여인과 공손수의 대화에 집중했다.
공손수가 자신의 품을 뒤지더니 서찰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팔선 어르신.”
공손수의 행동은 마치 자신의 주인을 극진히 모시는 하인과도 같았다.
여인은 공손수의 백발을 쓰다듬으며 칭찬하듯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아이야.”
“…….”
공손수는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그런 공손수를 힐끔 보더니 화사하게 웃었다.
“하지만 칭찬해 줄 수는 없단다, 아이야. 그 이유를 너는 아느냐?”
“…….”
“그건 네가 너무 늙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너의 생기를 뽑아낸다면 지금 이 자리가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
“…….”
공손수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말없이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을 바라보던 한빈은 팔선이라는 단어에 눈매를 좁혔다.
‘팔선이라?’
한빈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팔선은 무림에서 사라진 강남 무림의 여덟 명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도를 좇는 문파였다는 점이었다.
재능과 성품을 타고났다 하여 강남에서는 그 여덟을 팔선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각 문파에서 촉망받던 이들이 한날한시에 주화입마에 걸린 후, 치료를 받다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모두가 쉬쉬했고, 해당 문파에서는 입에 올리기를 꺼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명성을 얻어 세상에 문파를 빛냈을 이들.
사람들은 이들이 사라진 사건을 탈선(脫仙) 비사라 불렀다.
뭐, 등선을 앞두고 길에서 벗어났다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사라질 때 동료를 목을 베었던 것으로 봐서, 탈선이란 의미는 제법 잘 들어맞았다.
무림 공적으로 이름을 올려야 할 상황.
하지만, 각 문파는 그 사건을 조용히 덮었다.
자신의 얼굴에 먹칠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렇게 팔선은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바로 십오 년 전의 이야기였다.
물론 그 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한빈의 추측대로라면, 저 여인은 아미파의 백선이 분명했다.
전생에 봤던 자료에 의하면 정의맹에서는 그녀를 아미백선이라 불렀다.
하얀 무복에 가지런한 눈썹에 누가 봐도 단아한 인상.
거기에 대조되는 붉은 입술.
허리에 찬 은색 구절편까지.
모든 것이 전생에 한빈이 기억하던 자료와 일치했다.
‘이름이 정소군이었던가?’
기억을 더듬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여인에게서 일렁이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저 구결은 분명히 인급 구결일 터.
저 여인에게 구결을 취한다면 인급 구결 하나 정도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림의 떡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지금은 아미백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스산한 바람이 한빈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옆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흑색 무복의 사내였다.
흑색 무복의 사내가 말했다.
“저는 가 봐야겠소, 누님.”
“혼자 맛난 거 먹으러 가나? 동생.”
“본단에서 부르니 가 봐야지 않겠소. 나머지는 누님께 맡기겠소. 나는 한 달 뒤에나 돌아올 것 같소.”
“호호, 동생이 간다니 서운하네.”
“그런 표정 짓지 마시오, 누님. 누님의 표정을 보면 시원한 것 같은데, 내가 틀렸소?”
“틀리긴, 동생의 눈이 맞아. 시원하다 못해 등선한 느낌이야.”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자중하시길 바라오, 누님.”
“알았어. 빨리 가 봐, 동생.”
“그만 가 보겠소.”
흑색 무복의 사내가 돌아서자 백의 무복의 여인이 입맛을 다셨다.
“쩝.”
마치 진수성찬을 앞에 둔 표정이었다.
흑색 무복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사고 치지 마슈, 누님. 아무나 잡아먹지 말기로 한 약속, 꼭 지켜야 하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흑색 무복의 사내가 사라졌다.
스스-슥.
한빈이 다시 여인에게 집중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해진 한빈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한빈은 뜨악한 표정으로 숨을 멈췄다.
흑색 무복의 사내가 이십 여장 밖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흑색 무복의 사내가 검을 뽑았다.
스릉.
검을 뽑고 눈매를 좁힌 흑색 무복의 사내가 한빈이 숨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어디서 냄새가 나네, 수상한 냄새가…….”
말끝을 흐린 흑색 무복의 사내가 천천히 한빈이 은신한 곳으로 걸어왔다.
터벅터벅.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토끼에게 박혀 있는 침을 뺐다.
쓱.
침을 빼자 토끼가 꿈틀거렸다.
한빈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토끼를 재빨리 던졌다.
탁.
토끼는 한빈의 던진 방향대로 깡충깡충 뛰어갔다.
자신은 기척을 완벽하게 지웠다.
냄새와 흔적 등이 남지 않는, 완벽한 은신술을 펼치고 있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불어오는 바람에서 흔적을 느끼는 것이었다.
상대는 사람을 스치는 바람과 나무를 스치는 바람, 돌을 스치는 바람의 차이를 아는 고수라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피하는 것이 맞았다.
지금 한빈이 쓴 방법은 전생에서도 몇 번이나 속였던 검증된 방법이었다.
한빈은 멀어지는 토끼를 보며 속으로 기도했다.
‘먹혀라!’
흑색 무복의 사내는 자신의 앞으로 토끼가 뛰어오자 검을 그었다.
휙.
그 검은 토끼의 한 치 앞에서 멈췄다.
하지만, 토끼는 사내의 검에서 뿜어내는 기세에 꼼짝도 안 하고 얼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의 앞에 있는 토끼를 보더니 말했다.
“미안하구나, 잘못하면 무고한 생명을 해칠 뻔했어.”
말을 마친 사내의 신형이 눈 녹듯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자 그제야 토끼가 빠르게 숲속으로 도망쳤다.
모든 광경은 지켜본 한빈은 더욱 그들이 팔선이 맞음을 확신했다.
전생의 기억으로, 흑색 무복의 사내는 종남흑선이 맞았다.
사라진 종남파의 천재.
지금은 검을 썼지만, 그의 절기는 권법이었다.
한빈은 지금 안 들킨 것이 천운이라 생각했다.
전생에서는 마주하지 않은 팔선이라?
일단 하나가 사라졌으니, 아미백선만이 남았다.
아미백선을 제압할 수 있다면?
저들의 배후를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아미백선의 몸 곳곳에 일렁이는 점이었다.
‘어쩐다…….’
한빈은 아미백선과 공손수가 나누는 대화를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사사-삭.
* * *
한빈이 다시 신형을 드러낸 곳은 숲의 반대 방향이었다.
한빈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미백선 정소군에게서 구결을 취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그녀의 흔적을 찾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공손수를 만나러 가며 아미백선은 분명 이곳을 지나갔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오기 마련.
정면 승부에서는 마주하기 벅찰지 몰라도, 미리 준비한다면 분명 승산은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준비를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빈의 시야에 눈처럼 하얀 무복이 보였다.
이런 외진 숲을 지나갈 하얀 무복의 사람은 당연히 아미백선밖에 없었다.
한빈은 나무 위에 올라탔다.
휙.
여인은 계속 한빈 쪽으로 걸어왔다.
터벅터벅.
아미백선이 한빈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한빈은 미리 손에 뽑은 월아를 세웠다.
‘전광석화.’
‘쾌검난마.’
두 초식을 운용한 후 바로 이어서 용린검법의 다른 초식을 펼쳤다.
‘일촉즉발.’
월아의 끝에서 푸른 검기가 일렁였다.
동시에 진기가 몸속을 휘돌다가 다리에 모였다.
순간 한빈이 화살처럼 아미백선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