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77화 (177/621)

177화. 탈선(脫仙) (1)

한빈은 조금 더 서찰을 자세히 뜯어 보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것도 잠시, 다 읽고 난 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찰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그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무슨 일이에요?”

“공손세가에서 온 서찰인데, 비밀 통로를 내가 쓸 수 있게 사람을 보내겠다는구나. 일단 답신을 보내야지.”

“그럴 줄 알고 가져왔어요.”

설화는 탁자에 종이와 벼루 그리고 붓을 펼쳐 놓았다.

붓을 잡은 한빈은 일필휘지로 내용을 써 내려갔다.

설화는 눈도 꿈뻑이지 않고 한빈의 표정을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답신을 써 내려가는 한빈에게서 묘하게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일일까?

설화는 내용을 확인했지만, 별반 특별한 것 없는 답신이었다.

내용은 공손세가에서 보낼 사람과 만날 장소 그리고 일시에 관해서였다.

종이 위의 먹이 마르자, 한빈은 서찰을 접어 설화에게 전했다.

“공손세가에서 온 사람에게 전해 줘, 설화야.”

“네, 공자님.”

설화는 재빨리 서찰을 가지고 나가려다가 멈칫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아까의 묘한 기세도 수상했었다.

그런데 한빈이 서찰을 쥐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빈은 창밖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서찰에서 흘러나오는 천리추종향의 향기를 맡고 있었다.

이 향기는 공손명후가 가져간 철전에서 나는 향기와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뭔가 결심한 한빈이 고개를 돌려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 설화를 불렀다.

“설화야.”

“네, 공자님.”

“가는 길에 무명이에게 전해 줘.”

“뭐라고 전할까요?”

“그냥 내가 좀 보자고 한다고 전하면 돼.”

“네, 알겠어요. 공자님, 그리고 저 일 다 보고 요 앞에 나갔다 와도 되죠?”

“장운현에서 아는 곳이 있어?”

“아니요, 장삼 아저씨가 그러는데, 요 앞에 당과가 맛있다고 해서요. 그럼 가 볼게요.”

설화는 재빨리 문을 닫고 나갔다.

설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으며 이무명을 찾아 달려갔다.

* * *

한 시진 후 객잔 앞.

땡땡땡!

울타리 앞쪽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장대찬은 고개를 돌렸다.

장대찬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얼떨떨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사정을 알고 이젠 설무익과 함께 죽은 목숨이구나 했다.

하지만, 의외로 한빈의 요구는 간단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한빈이 시킨 일은 울타리에서 삼백 보 이상 벗어나지 말란 것이었다.

처음에는 굶겨 죽이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날 이후 한 번도 굶은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때가 되면 종이 울리고.

울타리 앞으로 걸어가면 적혈맹호대의 부대주인 심미호가 배식을 시작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모자라면 얘기해요. 더 줄 테니까요.”

심미호가 웃으며 밥그릇을 건넸다.

“네, 알겠습니다. 부대주님.”

장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그릇을 들고 그늘을 찾아 걸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장대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빡!

통증에 뒤를 돌아보니 설무익이 기분 나쁜 듯 장대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부대주야. 정파 년에게 부대주님이라고? 네놈이 정신을 덜 차렸구나. 이거 참, 아무리 빠져도 그렇지…….”

설무익은 쉴 틈 없이 잔소리를 늘어놨다.

아무리 노예처럼 묶여 있는 신세이긴 해도 자신의 수하가 굽신거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설무익의 잔소리가 계속되자, 장대찬은 얼굴을 굳혔다.

이곳에서 돌아간다 했다고 해도 흑사문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뻔하다.

그냥 남아 있다가는 설무익과 공범이 되어 흑사문주에게 질책을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흑사문주의 성격으로 보면 아들인 설무익보다 수하인 자신에게 책임을 떠넘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사실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설무익이 겁나서가 아니었다.

도망치면 땅끝까지 쫓아와서 지운다는 진세미와 한빈의 말이 겁나서였다.

장대찬에게 설무익은 더는 상관이 아니었다.

그래도 장운현에 있는 동안은 참기로 했다.

장운현에서 떠나는 즉시 설무익과는 끝이라 결심했다.

표정을 수습하려던 장대찬의 눈에 비릿하게 웃는 설무익의 얼굴이 들어왔다.

장대찬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왜 때리십니까!”

“이게 어디서 말대꾸야!”

“이게 다 공자님 때문이 아닙니까? 일은 혼자 저지르시고 왜 책임은 같이 집니까?”

처음 일어난 하극상이었다.

뜻밖에 상황에 설무익이 수하들이 몰려들었다.

“왜 또 심통을 부리시는 거지?”

“그러게. 사실 장대찬의 말이 맞지. 지금 이 꼴이 누구 때문인데. 평생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데 저러시는 건 너무한 거지.”

“자네들 말대로 대찬이 말이 백번 맞지.”

웅성대는 소리에 설무익이 볼살을 부르르 떨었다.

설무익은 이대로라면 자신의 지위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설무익은 하극상의 불씨는 재빨리 제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스릉.

난데없는 상황에 웅성거리던 설무익의 수하들은 입을 딱 벌렸다.

장대찬도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가 살아난 설무익은 검을 장대찬에게 겨누며 외쳤다.

“네놈의 사지 근맥을 잘라 흑사문의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

말을 마친 설무익은 자신의 수하, 장대찬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피가 튈 상황.

다른 수하들도 설무익을 어떻게 말려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설무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대찬의 앞까지 다가와 검을 높이 들었다.

진짜로 장대찬의 신체 일부를 자를 것 같은, 일도양단의 기세였다.

다른 수하들도, 장대찬도 눈을 감았다.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부드러웠지만, 그 바람에는 묘한 기세가 실려 있었다.

휘-익!

순간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빠-악!

수하들이 찔끔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묘한 바람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수하 중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지?”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수하 하나가 말끝을 흐리자 다른 수하가 재촉하듯 물었다.

“그런데라니?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설 공자가 안 보이는데?”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검을 들고 위협하고 있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어디로 간 거지?”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장대찬이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저, 저기 있네.”

모두의 시선이 장대찬의 뒤쪽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설무익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큰 대자로 뻗어 있었다.

수하 중 하나가 장대찬에게 달려오더니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저기로 날아갔어!”

장대찬은 멍한 눈으로 설무익이 뻗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장대찬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구해 준 것이 분명했다.

장대찬은 슬쩍 눈을 떴을 때 그 얼굴을 보긴 봤다.

검은 바람이 휙 지나가며 장대찬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마치 검은 근두운을 타고 가는 신선 같았다.

“누굴까…….”

웃는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장대찬은 고개를 돌려 객잔을 바라봤다.

잘 생각해 보니 그 얼굴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한빈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장대찬은 다시 혼자 뇌까렸다.

외모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경공술을 구사하는 것은 장대찬이 생각하기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멍하니 있던 장대찬을 다른 수하들이 잡아끌었다.

설무익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피하자는 의미의 행동이었다.

* * *

객잔에서 빠져나온 한빈은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를 멈추고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용안(龍眼)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금(錦)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금(金), 금(錦)]

한빈은 새로운 구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공손명후에게 얻은 인급 구결 금(金)에 이어 이번에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다른 구결 금(錦)을 얻었다.

하나의 초식일 수도 있고 별개의 초식에 쓰이는 구결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인급 초식이 완성되면 자신의 무위를 한 단계 위로 올려 줄 것이 분명했다.

“쩝.”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사실 한빈이 이번 구결을 얻은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설무익이 자신의 수하를 해치려던 순간, 그의 뒤통수에서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깜빡였다.

이번 구결은 그냥 놔두면 바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한빈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사실을 알면 행해야 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

한빈은 구결이 막 사라지려는 순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무영수를 사용해서 설무익의 뒤통수를 한 치의 오차 없이 갈겼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한빈은 구결을 얻을 수 있었다.

한빈에게 설무익 일행은 방패를 넘어서 구결을 꽃피울 보물이 될 수도 있었다.

옛 성현이 미래를 위해 한 그루의 과일나무를 심겠다던 행동과, 자신이 설무익 일행을 잡아 놓은 행동은 비견된다 생각하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구결을 확인한 한빈은 다시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반박귀진까지 운용했다.

공손세가 쪽을 바라보자 한빈의 가슴은 미세하게 뛰기 시작했다.

서찰에서 맡은 천리추종향은 한빈이 부채에 발라 놨던 향이었다.

그 말은 공손수가 정체불명의 고수와 접촉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정체불명의 고수는 구 할의 확률로 적일 것이다.

한빈이 떠올린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가능성은 공손세가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것.

두 번째는 공손수가 배신을 했다는 것이었다.

둘 다 한빈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 * *

사사-삭.

한빈의 신형이 풀잎 밟는 소리와 함께 공손수의 처소 뒤뜰에서 나타났다.

한빈의 무복은 달빛을 받아야 겨우 보일 정도로 짙었다.

그만큼 한빈은 주변의 사물에 잘 동화되어 있었다.

이것은 잠행술의 기본.

한빈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떠올린 가능성 중 공손세가가 습격을 받았다는 가정은 지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공손수가 정체불명의 고수와 접촉했다는 다른 가정이 남는다.

한빈은 며칠 전 공손수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당시 한빈은 앞으로 생길 사건에 대해서 공손수에게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대처법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 당시 공손수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신의 한 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빈은 이제부터 공손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로 했다.

정답을 얻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계획이었다.

이무명이 당분간 한빈의 대역을 하고 있기에, 자신이 없어도 계획에는 차질이 없을 것이다.

* * *

다음 날 새벽.

사사삭.

한빈의 신형이 공손수의 뒤뜰에서 사라졌다.

새벽부터 한빈이 움직인 이유는 간단했다.

공손수가 새벽 수련을 위해 연무장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이곳에 벌써 열두 시진 넘게 발이 묶여 있었다.

한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손수의 행동을 바라봤다.

공손수는 연무장을 누비며 무영보를 밟고, 금나수로 떨어지는 낙엽을 쓸어 담듯 낚아챘다.

제법 괜찮은 수법.

대학자가 되지 않고 대문파에 들어갔다면 장문인 자리를 꿰찼을 수도 있는 재능이었다.

한빈이 그의 무공을 지켜보며 반 시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스산한 새벽바람이 연무장을 쓸고 지나갔다.

휘이-익!

그 모습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람 사이에 섞여 있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뭐지?’

한빈의 눈이 커졌다.

그가 느낀 이질감의 정체는 바로 향기와 소리였다.

향기는 바로 부채에 발라 놓았던 천리추종향.

소리는 미약한 피리 소리였다.

피리 소리는 바람이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와도 같아서, 한빈이 아니었다면 못 들었을 정도의 소리였다.

피리라?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공손수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영보를 밟으며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한빈도 재빨리 구걸십팔보를 운용하며 그 뒤를 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