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창과 방패 (3)
덜컹.
문이 열리자 난장판이 된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표정을 수습한 진세미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죠?”
“…….”
진세미를 본 설무익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것도 잠시, 진세미의 뒤로 활짝 웃는 한빈이 보이자 설무익이 외쳤다.
“너는 겁쟁이 사 공자!”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진세미의 손이 독사처럼 꿈틀거리며 공간을 좁히더니 설무익의 마혈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픽!
털썩.
잠시 후.
진세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빈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점은 죄송해요, 팽 공자님.”
“오해라니요? 흑사문이면 백사문의 분파가 아닌가요? 저의 재산을 다 꿀꺽하려던 것도 모자라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요. 그런데 계약 위반이 아니라고요?”
한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자 진세미가 떨리는 눈빛으로 쓰러진 설무익을 바라봤다.
분명 당한 것이 맞았다.
하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해치려 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진세미가 말했다.
“어떻게 하시고 싶습니까?”
“저는 저를 해치려 한 자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북 땅에서 흑사문을 지워 주시죠.”
“아.”
진세미가 탄성을 흘렸다.
당돌한 말이지만, 한빈의 말을 무작정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분파를 손수 지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세미가 혼란스러운 듯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때 한빈이 한껏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뭐죠? 팽 공자님.”
“특별한 부탁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빈의 조건은 간단했다.
흑사문의 무례를 용서하는 대신, 장운현에 머물 동안 설무익은 한빈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이 좋아 수족이지, 한빈의 말은 노예에 가까웠다.
죽으라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죽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세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흑사문주에게는 제가 따로 이야기를 해 놓지요. 백사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백사문의 이름으로 약속한다고 하시니, 그럼 믿겠습니다.”
한빈이 씩 웃더니 철전 하나를 꺼내 튕겼다.
휙!
날아간 철전이 설무익의 어깨 부근을 때렸다.
팍.
어깨를 때리고 나온 철전이 바닥에 굴렀다.
데구루루.
동시에 마혈이 풀린 설무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무익은 마혈을 제압당해 누워 있었지만, 모든 대화를 다 들었다.
가장 놀란 부분은 자신이 작살내려 했던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한빈이 단순한 감시 대상이 아닌, 마휘의 귀빈이었다는 점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억울함을 호소하려던 설무익은 방금 한빈의 동작을 떠올렸다.
철전을 던져서 진세미가 제압한 혈도를 풀었다.
간단한 수 같지만, 이것은 상당히 놀라운 수법이었다.
점혈법의 원리는 간단하다.
혈도를 내공으로 막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혈도를 푸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자신의 불어 넣은 내공을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관도에 돌덩이를 쏟아서 길을 막는 것은 쉽지만, 돌덩이를 다시 거둬들이기는 힘든 것과 같다.
게다가 남이 제압한 혈도라면 더욱 힘이 든다.
적당한 공력에 적당한 힘을 풀어야 하는데, 그 ‘적당한’이라는 것을 맞추기가 힘들기 때문이었다.
문파마다 점혈법이 다르고 해혈법이 다른 것이 이런 이유였다.
타인의 제압한 점혈을 철전을 던져서 해혈한다라?
철전에 내공을 실을 수 있는 공력.
상대의 몸을 해치지 않는 적당한 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원하는 곳에 명중시킬 정확도.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갖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한빈은 초절정 이상이었다.
비슷한 나이대 중에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이가 있던가?
최소한 강북 무림에는 없었다.
그런 자가 바보처럼 자신에게 당하고 있었다고?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수정반점을 손에 넣으려던 일부터 황당한 계약서까지.
그리고 지금의 상황 모두가 한빈의 함정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을 생각해 봤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닌 문파가 괴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무익의 머릿속에는 계속 오만 가지 오해가 파고들었다.
설무익의 멍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세미가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저자를 수족처럼 부리시면 됩니다.”
진세미가 설무익을 가리키자 한빈은 그를 힐끔 확인하더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라도 제 말을 어기고 도망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지우겠습니다. 백사문의 명예를 걸고요.”
진세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설무익을 바라봤다.
솔직히 흑사문 정도의 분파가 없어진다고 해도 하남 백사문에는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한빈이 흑사문을 지워 달라고 했을 때 고민했던 것은 남의 눈초리 때문이지, 이익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의 분파를 스스로 지우는 문파를 누가 믿겠는가?
하지만, 한빈이 제안을 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강호인으로서 지켜야 할 신의라는 책임을 흑사문에게 다 넘겨 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흑사문이 아닌 설무익 개인이지만 말이다.
비장한 표정의 진세미와 어쩔 줄 모르는 설무익을 번갈아 보던 한빈이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시선을 설무익에게 고정한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운현에 있는 동안은 끔찍한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아마 구천지옥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 조건에 동의하겠느냐?”
“…….”
“뭐, 견뎌만 준다면 내 이 계약서까지 없던 일로 해 주지.”
한빈은 품 안에서 설무익과 맺은 계약서를 흔들었다.
설무익이 눈을 크게 떴다.
흔들리는 계약서를 따라 설무익의 시선이 움직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수하 중 한 명이라도 도망친다면, 내가 아닌 백사문에서 너희의 사돈의 팔촌까지 다 찾아 지울 것이다. 동의하겠느냐?”
한빈의 질문에 진세미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사돈의 팔촌까지 찾아서 지우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사파에서도 이런 악랄한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런 말을 서슴지 않게 하는 것을 보면…….
앞에 있는 한빈은 정파보다는 사파와 어울리는 사람이 맞았다.
모두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설무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말투가 변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무익이 자신의 방패가 될 걸음마를 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위아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한빈의 지론.
“그럼 지금부터 시작한다.”
한빈은 방패라는 말은 뺐다.
이들이 알고 있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설무익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한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설화가 보따리를 들고 달려왔다.
설화는 탁자 위에 보따리를 풀어 놨다.
그곳에는 회색 환약이 무더기로 놓여 있었다.
진주처럼 겉면에 윤기가 감도는 환약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불길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마치 독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환약을 하나 잡더니 설무익의 입을 향해서 날렸다.
획.
백발백중의 초식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설무익의 입속으로 환약은 빨려 들어가듯 날아갔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정체불명의 환약을 삼킨 설무익이 비명을 질렀다.
“앗! 이게 대체 뭡니까?”
“독약은 아니다.”
한빈의 말은 진실이었다.
그것은 독약이 아니라, 앞으로 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허혈초보다 적어도 다섯 배의 부작용을 지닌 경혈초로 만든 단약이었다.
한빈의 말에 설무익은 아무 말 없었다.
단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
한빈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들이 수행할 임무는 별거 없다. 이 환약을 보름마다 먹고 객잔의 울타리 밖에서 삼백 보를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
“그게 다입니까?”
드디어 설무익이 물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신 삼백 보를 벗어나면 죽는다.”
한빈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대신 진세미에게 눈짓하며 나머지 일 처리를 부탁했다.
* * *
한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공손세가에서 얻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남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공손세가에서도 조심했던 물건이었다.
나무 상자를 열자 금빛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한빈은 자신의 목걸이를 만졌다.
금빛 구슬은 한빈의 목걸이 속에 있는 은빛 구슬과 같은 용도의 물건이었다.
뭐, 외관상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금빛 구슬이 조금 더 컸다.
그렇다면 금빛 구슬에도 보물이 들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여는 방식이 달랐다.
은빛 구슬은 은옥이라고 해서 미세하게 진기를 조절해야 했지만, 이 금빛 구슬은 금옥이라고 한다.
금옥의 경우는 막대한 공력을 불어 넣어야 했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강호에 이 금옥이 등장한 것은 딱 한 번.
그리고 금옥을 열기 위해 화경급 고수 세 명이 모였다고 했다.
은옥을 연 경험은 있어도 금옥은 이렇게 보는 것이 처음.
한빈은 초식을 떠올렸다.
‘무영수.’
아직 쓸 수 없는 진룡무영수와는 다르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초식이었다.
거기에 초식 하나를 더했다.
‘일촉즉발.’
서서히 손에 진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빈은 금옥을 향해 무영수의 초식을 날렸다.
팡!
귀가 얼얼할 정도의 파공성.
하지만, 한빈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봐야 했다.
이 정도의 진기에도 금옥은 흠집조차 나지 않은 것이다.
한빈은 문득 진룡파혼검을 떠올렸다. 그 초식이라면 이 금옥을 열고도 남았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진룡파혼검은 공간을 아예 지워 버리는 초식이었다.
만약 금옥에 그런 무지막지한 방법을 쓴다면?
이 속에 든 내용물이 남아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참 동안 금옥을 살피던 한빈은 눈을 빛내며 기분 좋게 방문을 나섰다.
* * *
이틀 뒤.
한빈은 오른쪽 손목에 가죽 팔찌를 차고 있었다.
검오에게 부탁해서 만든 아주 특별한 보호대였다.
한빈은 조용히 가죽 팔찌를 손으로 튕겼다.
팅!
순간 종소리가 울렸다.
가죽 팔찌의 안에는 금옥이 담겨 있었다.
어떤 힘으로도 파괴할 수 없다면, 그것을 이용할 곳은 무궁무진했다.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다고 해도, 쉽게 파괴하지 못하는 금옥의 존재만으로도 보물이라고, 한빈은 생각했다.
가죽은 황실에 바친 천산혈랑의 가죽 중 일부를 빼돌려 놨던 것이다.
붉은색의 가죽 팔찌는 한빈의 붉은색 무복과 잘 어울렸다.
한빈은 창문을 열고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는 지루하게 밖을 서성이는 설무익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이런 평화가 불안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놈도 있었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울타리 밖에서 낮잠을 즐기는 녀석도 있었다.
물론 낮잠을 자는 놈은 설무익이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그들을 지켜봤다.
그때 설무익이 어딘가 근지러운지 여기저기를 긁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시작되겠군.”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 소리에 한빈이 말했다.
“들어와라, 설화야.”
덜컹.
문이 열리고 설화가 재빨리 한빈에게 다가와 서찰을 전했다.
서찰을 펴 본 한빈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