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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75화 (175/621)
  • 175화. 창과 방패 (2)

    “안녕하세요. 저는 사 공자님을 모시는 심미호라고 해요. 백사문이라면…….”

    심미호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네다가 백사문이라는 단어에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을 보던 심미호는 영단산에서 이루어진 한빈과 사파 간의 만남을 떠올렸다.

    ‘혹시 그 일에 불만이라도 품고…….’

    심미호는 진세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경계심 가득한 심미호의 모습에 진세미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사 공자님께 전해 드릴 물건이 있어서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부탁드릴 것도 있고요.”

    그녀의 말에 긴장을 푼 듯 날카롭던 심미호의 눈빛이 사그라들었다.

    심미호가 멋쩍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 그런데 어떻게 하죠? 공자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요.”

    “잠시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까요?”

    진세미는 넉살 좋게 객잔의 안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한빈을 꼭 만나야 했다.

    무작정 문 앞에서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사문의 금지옥엽인 그녀가 이렇게 부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남에서는 모든 것을 알아서 그녀에게 맞춰 줬다.

    물론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한빈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영단산에서 확실히 느꼈었다.

    무서운 것은 무공이 아니라 한빈의 세 치 혀였다.

    마휘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무림인이라?

    아마 정파 중에는 한빈이 유일할 것이었다.

    진세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심미호 역시 헛기침을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흠.”

    진세미의 모습을 보면 호의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를 안으로 들이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심미호가 고민하던 사이에 뒤쪽에서 소대섭이 뛰어왔다. 다급히 뛰어온 소대섭은 진세미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적혈맹호대의 대주, 소대섭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백사문의 진세미예요.”

    “주군이 자신을 찾는 손님이 오시면 안으로 모시라고 저에게 당부하고 가셨습니다. 이곳 객잔이야 남는 게 방이니 일단 짐부터 푸시겠습니까?”

    “호의 감사드려요.”

    “그럼 여기로…….”

    소대섭은 진세미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심미호를 바라봤다.

    “심 부대주, 주군이 자신을 찾는 손님이 오면 그 어떤 누구라도 모시라고 했어. 그걸 깜빡하고 내가 전달 안 했네. 미안, 심 부대주.”

    “알겠어요, 대주님.”

    “그럼 나는 이분들을 안내할 테니 이곳을 부탁하네, 부대주.”

    말을 마친 소대섭은 진세미와 그녀의 수하를 안내했다.

    멀어지는 소대섭과 진세미 일행을 본 심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지 않아도 바쁜데 주군은 왜 손님까지 받으라고 하시는 거지?”

    심미호는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나이 많은 무사인 장삼부터 막내 조호까지 모두 객잔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땀을 쏟는 것은 적혈맹호대뿐이 아니었다.

    장자명은 구슬땀을 흘리며 약재를 조합해서 약물을 추출하고 있었고 새로 온 이를 검오가 돕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든지 다 모시라고? 대체 이곳에 손님으로 올 사람이 누가 있기에…….”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였다.

    미약한 살기가 느껴졌다.

    심미호가 눈매를 좁히며 살기가 피어나는 곳을 바라봤다.

    멀리서 한 무리의 사내가 기세등등하게 객잔으로 걸어오고 있다.

    뭐지?

    심미호의 고개가 점점 기울어질 때 무리 중 하나가 뛰어왔다.

    그가 가까워지자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살짝 익숙한 얼굴이었다.

    얼마 전 자신의 짐을 들어 주려다가 어깨가 빠진 사내였다.

    빠진 어깨가 회복이 안 되었는지 부목까지 대고 있었다.

    그 사내는 설무익의 수하, 장대찬이었다.

    장대찬 역시 심미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천수장에서 봤던 여자 약초꾼이었다.

    한눈에 반했던 그녀가 왜 여기에 있다는 말인가?

    그 약초꾼의 짐을 들어 주려다가 어깨가 빠지는 바람에, 약한 놈이라고 동료들에게 아직까지 놀림을 받고 있었다.

    장대찬은 부목을 댄 채 물끄러미 심미호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물었다.

    “지난번에 제 짐을 들어 주려고 하신 무사님 맞으시죠?”

    “아. 기억하시는군요.”

    “그때 말려야 했는데, 저 때문에 다치신 것 같아서 죄송…….”

    “아닙니다. 그거 때문에 다친 거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정도 부상은 다친 축에도 못 낍니다.”

    장대찬은 팔에 댄 부목을 바닥에 던지고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멀쩡합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말과는 다르게 심미호는 장대찬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심미호의 귀에는 묘하게 뼈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장대찬이 심미호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뒤쪽에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물론 설무익이었다.

    설무익의 입장에서는 장대찬의 행동이 흡족했다.

    팔에 댄 부목을 집어 던지는 모습이 마치 으름장을 놓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잠시 설무익은 객잔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설무익은 천수장의 주인과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썼다는 것을 며칠 전 알아챘다.

    문제는 천수장이 주인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걸 너무도 뒤늦게 알아챘다는 것이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강남 사파에서 예의 주시하는 사람.

    하지만, 설무익에게는 하북제일 겁쟁이였던 하북팽가 사 공자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물론 이것은 설무익의 잘못이 컸다.

    한빈의 소문은 하북 내에서는 조금은 퍼져 있었다.

    한빈이 하북팽가의 소가주 후보가 되었다느니.

    황실이 내린 상을 받았다느니 하는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조금 더 알아보니 송화산 근처에서는 신의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다.

    그러나 설무익은 모든 것이 헛소문이라 생각했다.

    사실 조금만 노력했으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은 설무익의 자만에서 벌어진 일.

    설무익은 몇 년 전 한빈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설무익과 눈빛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았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이 바뀌면 얼마나 바뀌었을까?

    으름장만 조금 놓는다면 계약을 파기하는 것은 누워서 죽 먹기보다 쉽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나누던 장대찬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심미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기세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장대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약초꾼이 아니셨…….”

    장대찬이 말끝을 흐리자 심미호가 포권하며 말했다.

    “저는 적혈맹호대의 부대주 심미호입니다.”

    “아, 저, 적혈맹호대의 부대주님이시군요. 저는 흑사문의 장대찬이라고 합니다.”

    “흑사문이라…….”

    심미호는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잠시 바로 의심을 풀었다.

    백사문이 한빈을 찾아왔다면, 흑사문이 뒤를 따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거기에 더해 소대섭에게 전달받은 한빈의 지시가 떠오르자 심미호가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심미호가 손짓하자 장대찬이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말했다.

    “잠시만요, 저희 공자님께 전하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장대찬이 뒤쪽으로 뛰어가 설무익의 앞에 섰다.

    뛰어오는 장대찬을 본 설무익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더냐?

    “안으로 모시라고 합니다. 저쪽에 있는 여인이 사 공자의 수하인 것 같습니다.”

    “거봐라, 하북의 겁쟁이가 맞대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장대찬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잘못 들었는지는 몰라도 적혈맹호대라고 했다.

    하북 강호에서 눈칫밥만 십 년이 넘은 그였다.

    하북의 겁쟁이가 무력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장대찬은 그냥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신경을 끊었다.

    * * *

    그날 오후, 객잔의 별채.

    별채에서는 한빈과 진세미가 마주하고 있었다.

    한빈은 진세미를 향해 포권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진세미도 마주 포권하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한빈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는 때가 되었다는 듯 자신의 호위 무사에게 눈짓했다.

    진세미의 신호를 받은 호위 무사는 탁자 위에 조그마한 철제 상자를 올려놓았다.

    진세미는 바로 손바닥만 한 되는 철제 상자를 열었다.

    그 철제 상자의 가운데에는 새끼손톱만 한 하얀 단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건을 확인한 진세미는 상자를 한빈 쪽으로 밀었다.

    “이건 마휘 군사님께서 약속한 물건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북 무림을 위해 잘 사용하겠습니다.”

    한빈은 철제 상자를 닫고는 잽싸게 품속에 넣었다.

    그 모습에 진세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뭔지도 안 물어보시는군요?”

    “백령단이 아닌가요?”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 저희 가문의 보물입니다. 알면서도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진세미는 진심이었다.

    백령단은 백사문의 보물이었다.

    백사문에서서 보유하고 있는 백령단은 열 개.

    그중 하나를 한빈을 위해 빼낸 것이다.

    백사문의 직계 중에도 백령단을 한 번도 못 본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정파인에게 이 영약을 선물한다?

    이것은 익절선생 마휘와 벌이는 사업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계약에 따른 것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넙죽 받아 품에 넣는 한빈의 모습이 황당했던 것.

    그 표정을 본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약속한 물건을 받은 건데 제가 놀랄 필요가 없죠.”

    “아무리 그래도…….”

    진세미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하자 한빈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손뼉을 쳤다.

    짝!

    그 모습에 진세미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참, 그 전에 계약에 대해서 다시 얘기해야 할 듯싶군요.”

    진세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익절선생 마휘와 계산이 끝난 계약이었다.

    그런데 왜 저 주제를 다시 입에 올리는 것인가?

    진세미가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이 말했다.

    “저희가 합의한 사항에 따르면, 사파가 저를 해치려고 하면…….”

    한빈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듯 쉴 새 없이 계약 내용을 따졌다.

    한빈의 설명이 계속되자 진세미는 손을 내저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저희는 공자님께 손톱만큼도 위해를 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냥 까놓고 말씀드리면…….”

    한빈이 막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별채의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심미호였다.

    심미호는 슬쩍 진세미를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분명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심 부대주, 편히 말해도 돼.”

    “주군, 손님이 소란을 피워서요.”

    “무슨 손님?”

    “흑사문의 설무익이라는 분이에요. 주군을 찾는 손님은 다 모시라고 해서 모시긴 했는데…….”

    심미호의 설명은 간단했다.

    한빈이 객잔으로 돌아왔는데도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는 데 대해 기분이 나빠 소란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설무익이 이곳에 진세미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은 모시되 손님에게 다른 설명은 일절 하지 말란 한빈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명을 마친 심미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주군의 손님이라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아서요.”

    “심 부대주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죽여도 될까요?”

    심 미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한빈이 진세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상황이네요.”

    “아.”

    진세미는 탄성을 흘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불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진세미의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일단 같이 가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빈이 손짓하자 진세미가 그 뒤를 따랐다.

    객실이 가까워지자 진세미는 이를 악물었다.

    심미호의 말대로 끝 쪽 객실에서 소란이 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당탕.

    쨍그랑.

    탁자 뒤집히는 소리에서부터 찻잔 깨지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설무익이 난장을 치던 객실의 문을 연 것은 심미호도 아니고 한빈도 아니었다.

    얼굴이 벌게진 진세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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