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73화 (173/621)
  • 173화. 와불을 지키는 자 (3)

    탁자 위에 쓴 글자를 본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제가 알고 있던 공공문에 그런 뜻이 있었다고요?”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그렇다면 유가의 학파라 설명한 공손수의 말이 맞았다.

    “흠, 역시 못 믿겠다는 표정이군.”

    공손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공손수는 공공문과 공손세가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한빈이 말했다.

    “네, 설명 감사합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일세. 나머지는 자네의 능력에 달린 거지.”

    “제 능력이라…….”

    “저 벽화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능력 말일세. 사실 나와 내 손자는 저 벽화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십 년 가까이 매달려 왔네.”

    “십 년이라고 하셨습니까?”

    질문을 던진 한빈은 공손수와 공손명후를 번갈아 바라봤다.

    한빈과 시선이 마주친 그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한빈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이들은 근본이 학자.

    이 벽화를 본 순간,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자인 공손수가 못 푼 수수께끼를 자신이 푼다?

    게다가 벽화를 만져 봤지만, 용린검법의 단서는 남아 있지도 않은 상태.

    한빈의 심각한 표정을 본 공손수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게. 주인이 나타나면 편하게 건네주려고 함이었지, 저 벽화에 대한 욕심 때문은 아니었네.”

    “오해 같은 건 안 했습니다. 다만, 저 벽화의 비밀을 풀 수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한 것일 뿐이죠. 대학자인 공손수 어르신이 십 년 가까이 못 푼 비밀을 제가 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자네를 믿네. 그리고 시간은 앞으로도 많지 않은가?”

    “뭐,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한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거짓이었다.

    한빈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한 달도 되지 않는다.

    앞으로 이어질 역병의 공격.

    그리고 장운현은 무법 지대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가롭게 벽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라고?

    한빈은 팔짱을 낀 채 벽화와 공손수를 번갈아 봤다.

    한참을 고민하던 한빈이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저 벽화에 대한 비밀을 제가 밝혀내길 원하시는 거죠?”

    “그렇다기보다는 저 벽화 자체가 자네의 것이네.”

    “그럼 소유권이 제게 있다는 거죠?”

    “몇 번을 말했지만, 자네 것이 맞네.”

    “그럼 자리 좀 비켜 주시죠.”

    갑작스러운 한빈의 부탁 때문인지, 공손수는 한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험,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뭐, 못 미더우시면 그냥 보고 계셔도 됩니다. 대신 조금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빈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 좋은 얼굴로 공손수를 바라봤다.

    공손수는 호의 가득한 한빈의 표정을 보고는 등골을 스쳐 뼛속 깊숙이 불길함을 느껴졌다.

    “흠.”

    헛기침하며 수염을 쓸어내린 공손수가 손자 공손명후의 소매를 끌고 조용히 서재의 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화를 보며 용린검법의 초식 하나를 떠올렸다.

    '진룡파혼검.‘

    허공에 떠 있는 비급에서 마음 심(心)의 속성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청아한 기운이 전신혈맥을 맴돌더니 양팔을 통에 양손으로 흘러들어 갔다.

    동시에 한빈은 월아를 천천히 빼 들었다.

    그러고는 벽화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한빈은 웃는 얼굴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벽화를 머릿속에 새겼다.

    한빈의 계획은 간단했다.

    내가 못 먹는 떡은 남들이 먹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장운현에 들어설 때 결심했던 바였다.

    하지만, 공손수를 만나며 살짝 흔들리기도 했었다.

    그것은 벽화에 큰 기연이 담겨 있고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데에서 오는 욕심이었다.

    과욕은 항상 실수를 낳기 마련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월아가 검명을 내며 떨었다.

    우우웅.

    우우웅.

    그 검명이 커짐과 동시에 월아의 끝에 보름달과도 같은 동근 검기가 맺혔다.

    뒤쪽에서 한빈을 바라보던 공손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명후야. 저, 저길 봐라. 내가 잘못 본 것이냐?”

    “아, 아닙니다. 할아버지. 사 공자의 무위가 저 정도였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절정에 머문 제 경지에서는 넘볼 수 없는 능력입니다.”

    “명후야.”

    “네, 할아버지.”

    “그런데, 저 친구는 대체 왜 저리 공력을 모으는 건지 아느냐?”

    “당연히…….”

    공손명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빈이 월아로 겨누고 있는 곳은 자신이 십 년 가까이 애지중지 지키던 벽화였으니 말이다.

    공손명후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본능적으로 한빈의 등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단지 말리려는 것이었다.

    한빈에게 준 벽화였지만, 어찌 저 벽화가 단순한 그림이던가?

    할아버지 공손수가 낙향을 한 후 모든 것을 바쳐 지킨 벽화였다.

    공손명후도 할아버지와 함께 밖에서 뛰어놀지도 못하고 와불과 벽화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소중한 벽화를 작살내려는 것이다.

    공손명후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공손명후는 무영보를 밟아 순식간에 한빈의 뒤에 왔다.

    그때 뒤쪽에서 할아버지 공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후야, 멈추거라.”

    하지만, 공손 명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공손명후는 한빈의 어깨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한빈의 앞에서 거대한 기파가 쏟아졌다.

    그 기파는 벽면을 덮었고 동시에 커다란 폭발음을 만들어 냈다.

    팡!

    쿠구-쿵!

    소리와 동시에 거대한 힘이 공손명후를 덮쳐 왔다.

    그것은 진룡파혼검의 후폭풍.

    절정의 공손명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힘이었다.

    거대한 힘과 부딪힌 공손명호가 뒤로 날아갔다.

    팡!

    공손명후는 바람에 날리는 종잇장처럼 힘없이 공중을 날았다.

    그 모습에 놀란 공손수가 재빨리 달려갔다.

    공손명후보다 더 완성된 무명보였다.

    공손수는 손자인 공손명후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 재빨리 그를 안았다.

    팍!

    공손수는 공손명후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한빈은 뒤쪽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벽화를 바라봤다.

    자욱했던 먼지가 천천히 걷히자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벽이 사라졌다면 분명히 휑한 공간 너머 외부가 보여야 했는데, 묘한 공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빈은 재빨리 구걸십팔보를 이용해 비밀 공간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곳에는 주먹만 한 나무 상자와 두루마리 하나가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나무 상자를 품에 넣었다.

    공손수가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다지만,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배나 기연은 다른 이가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법이었다.

    한빈이 나무 상자는 취하고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뒤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콜록.”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공손수가 입을 막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한빈은 그에게 다가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솔직히 말하면 말릴 것 같아서 일단 저질렀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네. 자네가 솔직히 말했으면 나는 백이면 백 말렸을 테니 말이야.”

    한빈은 솔직한 그의 대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두루마리를 공손수에게 건넸다.

    반사적으로 두루마리를 건네받은 공손수가 다급히 말했다.

    “아닐세. 이것은 모두 자네의 것이네.”

    “제 것이라고 해도 이 두루마리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르신께서 확인해 주시죠.”

    “흠, 그렇다면 내가 확인해 보겠네.”

    공손수는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를 확인한 공손수의 눈은 한없이 커졌다.

    옆에서는 언제 정신이 들었는지 공손명후가 다급하게 물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에요? 무슨 내용이 쓰여 있길래 그렇게 놀라시는 겁니까? 혹시 천기가 담겨 있습니까?”

    “네가 직접 보거라.”

    공손수는 허탈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촤르륵.

    풀어 헤친 머릿결처럼 펼쳐진 두루마리를 본 공손명후가 입을 벌렸다.

    물론 한빈도 두루마리의 내용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려야 했다.

    -수고했다. 제자야.

    너무도 간결한 문장이었다.

    이것은 한빈이 아닌 공손수에게 전하는 글귀임이 틀림없었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공손수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십 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을 텐데, 남겨진 구결이 고작 이것이라니!

    한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스승이란 자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공손수가 한빈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한빈이 고개를 돌리자 공손수는 힘없이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여기 있네.”

    “아닙니다. 이건 어르신의 것 같습니다.”

    “아닐세, 이건 자네의 것이 맞네. 스승님은 벽화에 담긴 모든 것이 연자에게 전하라 했네.”

    “그렇다면 제가 맡겠습니다.”

    “고맙네. 이제는 자네 덕분에 쉴 수 있겠어. 이제는 여기를 떠날 때가 온 것 같군.”

    “장운현을 떠나려고 하시는 겁니까?”

    “맞네. 북경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세월을 보내려 하네.”

    “후학이라는 것이 유학자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공공문의 후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공문이야 명후가 이을 테니, 나는 공맹의 말씀을 전해야겠지. 하하.”

    공손수는 마치 도를 깨달은 선인처럼 허허롭게 웃었다.

    한빈은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에 공손수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마음먹고 후학을 양성한다면 그의 제자가 조정을 장악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빈은 무림을 먹고 공손수는 유림을 먹는다?

    먼 훗날을 상상하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르신,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자네에게 못 해 줄 이야기는 황실의 비사뿐이 없을 것 같군.”

    “별건 아니고, 왜 무영수를 펼치지 않으셨던 겁니까?”

    이것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공손명후와 공손수는 분명히 공공문의 비기 무영보를 보여 줬다.

    하지만, 한빈의 품속에서 물건을 빼낼 때 쓰던 것은 무영수가 아니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공공문의 무영수는 물건을 낚아챌 때 쓰는 금나수와 적을 제압할 때 쓰는 장법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공손수가 보여 줬던 한 수는 공공문의 것이라기보다는 무당의 흔적이 강했다.

    한빈의 질문에 공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자네의 눈이 정확하네. 무영수는 내 전대에서 사라졌다네.”

    “흠, 안타까운 일이군요.”

    한빈은 아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두루마리로 옮겼다.

    십 년을 지켰는데 수고했단 말 한마디로 퉁친다?

    이건 강호의 도리가 아니었다.

    한빈은 두루마리를 다급히 바닥에 펼친 후 눈을 감고 두루마리를 만지며 감각을 높였다.

    얼마나 두루마리를 살폈을까?

    용린검법의 비급이 반응했다.

    [강호에 흩어진 용린검법의 전언을 획득하셨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한빈은 조용히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의 문장과는 조금 궤를 달리하는 글귀였다.

    전언이라는 단어도 처음 나오는 것이고 말이다.

    분명 단순히 초식을 전하려는 것은 아닐 터였다.

    동시에 용린검법의 비급 옆에 종이 한 장이 펼쳐졌다.

    그것은 용린검법의 전언이 분명했다.

    [연자에게 전할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용린검법에 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진룡무영수라는 초식에 관해서…….]

    글귀를 읽어 나가던 한빈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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