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와불을 지키는 자 (2)
적혈석은 절호곡에서 천산혈랑을 잡는 기연 덕분에 얻은 황실의 하사품이었다.
공손수는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황실에 있던 학자.
적혈석을 알아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의 반응이었다.
황제의 스승까지 했던 사람이 적혈석 하나에 이렇게 놀란다?
적어도 공손수라면 적혈석에 비견될 하사품을 수십 개는 받았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공손수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한빈은 공손수의 흔들리는 눈빛을 말없이 바라봤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
공손수의 눈빛에 비친 달이 어느 정도 움직였을 때야 한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무슨 일입니까?”
“혹시 자네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인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죠?”
이럴 때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 맞았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공손수를 바라봤다.
공손수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눈을 감았다.
“스승님의 예언이 맞았군.”
스승님의 예언이라?
생뚱맞은 소리에 한빈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스승님이라니요? 게다가 예언은 또 무슨 말입니까?”
“내 스승님이 떠나시기 전에 내게 부탁 하나를 했다네. 나는 그 부탁을 들어드리기 위해 장운현에 머무는 중이고 말일세.”
“…….”
한빈은 계속 공손수의 말을 경청하기로 했다.
한빈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알아본 후 그의 태도는 확 달라졌다.
그것은 적의가 아닌 호의였다.
변복한 자신은 몰라도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신분의 팽한빈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한 느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친근한 눈빛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쌓여 가는 한빈의 의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손수가 말을 이었다.
“장운현에서 와불을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 적혈석을 든 무림인이 찾아올 거라 했네.”
“그게 저라는 말씀입니까?”
“내 생각에는 그렇다네.”
공손수의 말은 단호했다.
한빈은 그의 말 중에 허점을 찾아냈다.
말을 안 한 것이 있던가?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한빈이 상체를 기울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정중하면서도 은밀하게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보십이오. 적혈석이 황실의 보물이긴 하지만, 황실에만 있는 물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공손수는 한빈에 말에 무엇이든 답해 주겠다는 것처럼 손에 깍지를 낀 채 턱을 괴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실에만 있는 물건도 아닌데, 적혈석을 든 무림인이 장운현에 오는 게 대수입니까?”
“그런데 말일세…….”
“네, 말씀하시지요.”
“그 무림인을 구별하는 방법을 스승님은 가르쳐 주셨다네.”
“그게 대체 뭔가요?”
“그 무림인은 꽃을 보내올 거라 했네. 검을 든 무림인이면 몰라도 꽃을 든 무림인이라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처음에는 무림인에 꽃 하면 떠오르는 문파인 화산파에서 무사가 올 거라 생각했네.”
“흠, 꽃과 무림인이면 매화에 파묻힌 화산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얼마 전에 황실에서 자네에게 적혈석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했네.”
“네, 제가 적혈석을 들고 있는 것은 맞지만, 저는 꽃을 보내온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보내오지 않았나?”
“제가 꽃을 보냈다고요?”
“명후야. 보여 주거라.”
공손수는 자신의 손자에게 조용히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공손수의 손자는 철전이 든 자루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철전을 순서대로 배열했다.
철전이 나타내는 문장은 간단했다.
-그가 도착했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아까 불상 아래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봤던 글자였다.
한빈이 글자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공손명후가 말했다.
“아까 가져갔던 철전을 올려놔 보시지요, 공자.”
“여기 있습니다.”
한빈은 화(花) 자가 적힌 철전을 올려놨다.
공손수는 한빈이 올려놓은 철전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 철전 말일세. 자네게 우리에게 보내온 철전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는 분명 꽃이 맞네만은.”
“아.”
한빈이 잠시 할 말을 잊고 탄성을 터뜨렸다.
한빈은 진짜 꽃만 생각했지, 이런 글자를 꽃으로 받아들일지는 몰랐었다.
정자에서의 대화 이전에는 한빈이 그들에게 캘 것이 많았었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누군가가 한빈이 되어 버린 상황.
한빈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제가 어르신이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뭐가 달라집니까?”
“건네줄 것이 있다네.”
“그럼 지금 주시지요, 어르신.”
한빈이 눈을 빛냈다.
그가 주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 찾는 무언가일 수도 있었다.
공손수는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줄 수 없다네.”
“그럼 언제 줄 수 있습니까?”
“자네 성질이 급하군. 자네에게 줘도 가져갈 수 없다네. 그러니 서두르지 말게.”
“물건이 아니군요.”
“눈치가 빠르군, 자네.”
공손수는 활짝 웃으며 차로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시름 놨다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달을 바라보며 공손명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 한빈은 말없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그들이 보여 줄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밝혀질 것이다.
* * *
공손수는 참으로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한빈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한 후에야 정자에서 일어났다.
공손수가 안내한 곳은 공손세가의 서관이었다.
삼 층짜리 전각에 그가 평생 모아 놓은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다.
공손수의 발길이 멈춘 곳은 일 층 서재의 끝이었다.
서재의 끝에는 무엇을 가리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장막이 쳐 있었다.
그 옆에는 탁자와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공손수가 턱짓하자 공손명후가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다기를 올려놨다.
“일단 차를 마저 하면서 얘기하지.”
“그러시지요, 어르신.”
벽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진 탁자에서 한빈과 공손수 그리고 공손명후는 두 번째로 차를 우려냈다.
차향이 주변에 퍼질 때쯤 공손수가 장막을 힐끔 바라봤다.
이제는 저 장막 뒤에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는 듯 보였다.
한빈이 침을 꿀꺽 삼키자 공손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장막이 쳐 있는 벽을 바라보더니 옆에 대기하고 있는 공손명후를 향해 손짓했다.
공손명후는 조심스럽게 벽면의 우측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길게 드리워진 끈이 있었다.
점소이로 변장한 공손명후가 잡아당겼던 끈과 흡사했다.
공손수 쪽을 힐끔 바라보며 마지막까지 확인을 한 공손명후가 와불 밑 공간에서처럼 끈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장막은 아래로 흘러내렸다.
촤르륵.
장막이 떨어지자 벽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면에는 선기를 품은 듯한 벽화가 있었다.
공손수는 벽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내가 말했던 물건이네.”
“그림이 묘하군요. 사신도인가요?”
한빈이 그림을 가리키며 묻자 공손수가 손을 내저었다.
“사신 중에 있는 것은 용밖에 없지 않나?”
“그렇군요. 용도 지금 보니 청룡이 아니라 적룡이군요.”
“그렇지. 적룡이 푸른 구름을 뚫고 나오는 그림일세. 적룡이라, 뭔가 생각나는 게 있지 않나?”
“적룡이라? 바로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자네가 적룡대협이라는 분의 후인이라지?”
“흠.”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한빈과 그 주변에 대해 세밀하게 조사한 것은 알았지만, 여기까지 파고들었을 줄은 몰랐다.
어쩐지 이들은 하북팽가 사 공자인 팽한빈에 대해서는 신뢰하고 있던 것 같았다.
지금 한빈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에 대한 검증이 끝난 후, 그 신뢰를 온전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대체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단순한 유학계의 유명인사?
황실의 스승?
아니면 공공문의 구성원?
한빈의 의문 어린 눈빛에 공손수와 공손명후는 시종일관 웃음으로 답했다.
전쟁에서 등을 맡긴 전우를 대하는 듯 그들의 태도는 살가웠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빈의 의문은 커져 갔다.
한빈의 표정을 본 공손수가 말했다.
“걱정하지는 말게. 사파의 수뇌부를 통해 알아내긴 했지만, 아는 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일세.”
“네, 알겠습니다.”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와불을 통해 정보를 모을 정도면 하오문이나 개방에 비견되는 정보력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이들이 아군이라는 것에 감사하며 한빈은 일단 벽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벽화는 굉장히 단순했다.
푸른 구름과 붉은 용.
가장 아래에는 붉은 용이 떨어뜨린 비늘로 추정되는 물건까지 보인다.
어찌 보면 현재 한빈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빈은 이 벽화에 남들이 알 수 있는 기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저 벽화를 남긴 인물은 하남정가와 황보세가에 안배를 남긴 인물일 수도 있었다.
기연?
안배?
아니면 미래에 대한 예언?
그 어떤 것이든 좋았다.
한빈은 이 벽화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 내고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벽화에 집중하던 한빈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벽화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하지만, 벽화에서 느껴지는 구결의 흔적은 없었다.
한참 동안 정성껏 벽화를 쓰다듬던 한빈이 눈을 떴다.
옆을 힐끔 보니 공손수와 공손명후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과연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이 벽화의 비밀을 푸는 것이 먼저였다.
한빈은 다시 자리에 앉아 공손수와 공손명후를 바라봤다.
이제 그들에게 단서를 얻어야 할 때였다.
한빈이 공손수에게 물었다,
“스승님이란 분 말입니다.”
“스승님이라?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가?”
“이 벽화를 남기면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없었다네. 때가 되면 연자가 알아서 저 벽화의 비밀을 풀 거라고 하셨다네.”
“흠, 그럼 어르신은 연자가 저라는 것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거군요.”
“이 정도의 우연은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되니 믿어야지 어떻게 하겠나.”
“일단 저는 저 벽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대체 스승님이란 분은 누구입니까? 황실의 스승이었던 어르신의 스승이라니? 저는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나도 모른다네. 지금도 와불을 통해서 연락을 하시지, 얼굴을 뵌 지는 오래되었으니 말이야.”
“그럼 무영보도 스승님이란 분이 전해 주신 겁니까?”
“무영보는 공손가의 비기일세.”
“헉, 그렇다면 정말 공손가가 공공문의 숨겨진 얼굴이란 말입니까?”
“공공문이라?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가 세운 공공문은 유가의 학파 중 하나일세.”
“유가라고요?”
“그렇다네. 공이란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 것 같나?”
“공공문이라는 것이 빌 공에 문 문 자를 쓰지 않습니까? 공공문의 문도에게 모든 문은 비어 있다는 강호의 속담처럼 말입니다.”
한빈의 질문은 거침없었다.
한빈의 말대로 공공문에게 문파의 대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집 드나드는 것처럼 남의 문파를 터는 강호의 도둑이란 의미로 공공문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한빈을 보며 수염을 쓰다듬던 공손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네. 공의 참뜻은 공공(公共)에 있다네. 어찌 보면 다른 의미의 공이지.”
공손수는 조금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찻잔에 손을 넣었다 빼더니 탁자 위에 글자를 썼다.
-공공문(公共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