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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71화 (171/621)

171화. 와불을 지키는 자 (1)

동시에 점소이가 있던 자리가 푹 꺼졌다.

사라지는 신형.

한빈은 재빨리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마혈?

아니면 구결?

푹!

한빈이 선택한 것은 구결이다.

한빈이 구결이 어른거리는 어깨를 찍는 순간 점소이는 아래로 사라지고 순식간에 꺼진 바닥이 닫혔다.

하지만, 한빈은 기분 좋게 허공을 올려다봤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금(金)을 획득하셨습니다.]

금(金)이라?

거기에 인급이라고?

놀람도 잠시,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한빈은 이번에는 바닥을 내려다봤다.

다행히도 점소이는 한빈이 천리추종향을 묻혀 놓은 철전이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갔다.

이제부터는 향을 추적해야 했다.

한빈은 심각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코를 씰룩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던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향기가 나는 방향을 알아챈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끼기긱.

뭐지?

고개를 갸웃하던 한빈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끼기긱.

다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세히 바라보니 천장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지고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벽 쪽에 있는 횃불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는 가벼운 먼지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잠시 후.

한빈이 나타난 곳은 막다른 통로였다.

길은 끊긴 대신 위쪽으로 동그란 출구가 나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출구로 나왔다.

주변을 살피려는 순간 굵직한 목소리가 한빈의 귓전을 때렸다.

“누구냐?”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사내를 바라봤다.

자취를 감춘 점소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일 가능성도 있었다.

사내는 서른 중반처럼 보이는 외모에, 검집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무공의 경지는 절정.

그의 주변에는 열 명의 무사들이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다.

순간 한빈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

한빈의 목표는 아직 이곳에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한빈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돈 찾으러 왔는데.”

어찌 보면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검집을 잡은 무사의 손등에 힘줄이 꿈틀댔다.

“돈은 무슨 돈. 남의 집에 들어와서 돈을 찾는다고? 도둑놈이 분명하구나.”

“도둑은 내가 아니라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내 돈을 훔쳐 간 도둑 말이야.”

“헛소리.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것이냐!”

“여기가 어딘데?”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무사가 발끈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녕 네가 스스로 무덤을 찾아왔구나.”

“흠, 웬만하면 조금 친절하게 답해 주시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뒤쪽에서 한빈 또래의 서생 하나가 천천히 걸어왔다.

“청명, 그만하거라.”

그 목소리에 무사는 재빨리 물러섰다.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서생에게 쏠렸다.

서생은 천천히 걸어 한빈의 앞에 섰다.

“저는 공손가의 공손명후라고 합니다. 저희 공손가에는 무슨 일이신지요?”

“·…….”

한빈이 코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앞에 공손명후라고 하는 서생에게서 미약하지만 천리추종향이 느껴졌다.

그런데 공손가라?

잠시 머릿속에 공손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한빈이 말을 이었다.

“혹시 파죽 공손수 선생과는 어떤 관계이신지요?”

한빈은 최대한 정중히 물었다.

파죽 공손수란 이름은 무림이 아닌 유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파죽(破竹)이란,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 때문에 생긴 별호였다.

한빈의 물음에 서생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저희 할아버지십니다.”

“할아버지시라고요?”

한빈의 눈이 커졌다.

공손이라는 성씨가 흔하지 않기에 물어본 것인데, 한빈이 기억하던 공손세가였던 것이다.

공손세가는 무림세가가 아닌 유림세가라 해야 맞았다.

대대로 황제의 스승을 배출해 내는 가문과 장운현에서 일어날 사건이 관련이 있다고?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현재 상황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때 공손명후가 물었다.

“그나저나, 돈을 찾으러 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누가 내 철전을 홈쳐 갔습니다.”

“홈쳐 가는 걸 봤습니까?”

“봤으니 쫓았겠죠. 나는 분명히 부처님께 드렸는데 누군가가 그 돈을 홈쳐 가더군요. 그래서 뒤를 밟던 중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죠.”

“철전이라·……. 흔하디흔한 철전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나는 이제까지 제 것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보면 알 수 있죠.”

“그럼 찾아보시겠습니까?”

말을 마친 공손명후는 손뼉을 쳤다.

짝짝!

동시에 뒤쪽에서 시녀 하나가 자루를 들고 왔다.

순간 한빈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시녀가 들고 온 자루는 점소이가 들고 사라진 것과 똑같았다.

거기에 더해 자루에서 풍겨 오는 향기가 정확히 한빈이 철전에 묻혀 놓은 향과 일치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자루를 보여 주다니?

시녀가 한빈의 앞에 자루를 내려놨다.

탁.

공손명후가 말했다.

“찾아보시지요.”

팔짱을 낀 공손명후의 표정은 담담했다.

한빈은 이제까지의 일을 잠시 정리해 봤다.

이 자루를 공손세가에서 가져갔다고 해서 죄가 있을까?

그 점소이와 공손명후가 동일인이라고 해서 질책할 수 있을까?

한빈이 찾으려는 건 점소이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노리는 물건이었다.

보물일 수도 비급일 수도, 아니면 영약일 수도 있는 물건 말이다.

이제까지 상황으로 보면 그 보물은 공손세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해답을 얻어야 했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공손명후와 기 싸움을 펼쳐야 했다.

한빈은 자루를 열어 정확히 화(花) 자가 적힌 철전을 잡았다.

“제 철전이 여기 있군요.”

한빈은 철전을 들어 서생에게 보여 주고는 품속에 넣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철전을 챙긴 한빈을 본 공손명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한빈은 그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포권했다.

“제 물건을 찾았으니 이제 가 보겠습니다.”

완벽하게 변한 한빈의 태도에 공손명후의 눈이 커졌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도둑이 가져간 게 아니라, 와불의 관리인이 가져간 걸 오해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관리인이라니요? 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공자.”

어찌나 다급한지 공손명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빈이 말을 이었다.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유학자라고 해서 정보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보장 있습니까? 황실에서는 싫어하겠지만요.”

“·…….”

“제가 설마 황실에 고해바치기라도 하겠습니까?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한빈은 손을 휘휘 저으며 돌아섰다.

돌아선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문이 보이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터벅터벅.

그때 한빈의 귓불에 바람이 스쳤다.

쓱.

한빈의 앞에 나타난 공손명후.

그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한빈을 바라봤다.

공손명후의 달싹이는 입술을 본 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영보(無影步)?”

이것은 공손명후만 들을 수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어, 어떻게·…….”

공손명후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표정을 확인한 한빈이 말을 이었다.

“무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보법이죠. 그런데 명망 높은 학자의 집안에서 무영보라니·……. 이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한빈이 활짝 웃었다.

무영보는 구걸십팔보와 비견되는 출중한 경공술 중 하나였다.

무영보란 이름은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에서 유래했다.

도둑들의 문파인 공공문(空空門)에서 일인전승으로 전해진다는 무공이었다.

물론 한빈이 전생에 무영보를 본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속 공공문은 언제부터인지 강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한빈은 공손명후의 표정을 통해 그가 펼친 것이 무영보가 맞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스승이었던 공손수가 있는 공손세가에서 무영보를 익힌 자가 있다니!

이쯤 되니 한빈은 보물의 향방은 잊은 채 공손세가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한빈은 조금 더 공손명후를 자극하기로 했다.

“경공술도 구경 잘했습니다. 그럼 이만!”

한빈이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덜컹.

활짝 열린 대문으로 머리가 희끗한 노인 하나가 걸어왔다.

겉보기에 무인은 아닌 것 같지만, 그 기세가 평범하지 않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게 철저히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그의 소맷자락은 어찌나 빳빳한지 칼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한빈은 그가 황제의 스승이었던 대학자 파북 공손수임을 알아보았다.

한빈은 조용히 그에게 포권했다.

“공손수 어르신을 뵙습니다.”

“허허. 어찌 나를 알아보았느냐?”

“대쪽 같은 성격에 대쪽 같은 복장을 하고 계시니 못 알아보면 제 눈이 잘못된 것이겠죠.”

고개를 든 한빈이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공손수가 힐끔 공손명후를 바라봤다.

“어찌 된 일이냐? 명후야.”

“아버님, 그러니까·…….”

공손명후는 조용히 한빈과 마주한 일을 설명했다.

물론 점소이가 아닌 공손명후로 이곳에서 한빈을 마주한 일을 말이다.

이야기를 듣고 난 공손수는 사람을 물렸다.

* * *

잠시 후.

공손세가의 구석진 정자에서 한빈과 공손명후 그리고 공손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서로를 바라봤다.

차를 내온 시녀의 발소리가 저 멀리 사라지자 공손수가 입을 열었다.

“왜 명후의 뒤를 밟았는가?”

“비밀입니다.”

“비밀이라? 호랑이 굴에 들어오고서 비밀이라니?”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건 알지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굴입니다.”

“나갈 수 있다고?”

“물론이죠.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 나갈 수 있는 법이죠.”

“그건 헛된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한 선조들의 거짓말일세.”

“하하, 어르신이 그렇다면 믿어야죠. 그런데 호랑이가 조그마한 참새까지 잡지는 못하죠.”

“경공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군. 자네는 빠져나가지만, 자네 가문도 빠져나갈 수 있을까?”

“·…….”

한빈은 조용히 공손수의 눈을 바라봤다.

살기도 장난기도 그 어떤 감정도 없다.

공손수는 지금 황실에서나 할 법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치라는 게 얻을 건 얻고 줄 것은 주는 과정.

받을 건 명확한데 줄 것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색하게 웃은 한빈이 말했다.

“과연 제가 어느 가문인지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럼 한번 맞춰 볼까?”

공손수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마치 하룻강아지를 바라보는 호랑이의 표정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림인과 마주 앉은 학자가 보일 여유는 아니었다.

공손수는 품속에서 물건을 주섬주섬 꺼냈다.

탁.

탁.

몇 가지 물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공손수는 한빈을 향해 손짓했다.

마치 확인해 보라는 표정이었다.

그 물건을 본 한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당했군요. 언제 제 품에서 제 물건들을 가져가셨습니까? 어르신.”

공손수가 꺼낸 물건들은 한빈의 품에 있는 물건들이었다.

공손수가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들켰습니까?”

“내 물건도 내놓게나.”

한빈은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진짜 황실의 스승이셨던 공손수 어르신이 맞습니까?”

“그러는 자네는 정체가 뭔가? 어떻게 내 품속을 뒤진 거지?”

공손수의 표정에 다시 한번 변화가 생겼다.

이번에는 호기심이 일렁이고 있었다.

한빈과 공손수는 교묘한 금나수의 수법으로 서로의 품에서 물건을 빼냈었다.

그러고는 지금 그것들을 앞에 늘어놓은 것이다.

잠시 대화가 침묵이 흐르고 옆에 있는 공손명후는 이 일이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휘영청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때아닌 바람이 정자를 쓸고 지나갔다.

휘이익.

한빈의 품속에서 꺼낸 주머니 하나가 옆으로 쓰러지며 내용물이 밖으로 굴러 나왔다.

데구르르.

그것은 한빈이 황제에게 하사받은 적혈석이었다.

순간 공손수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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